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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송수진 Mar 16. 2021

제2의 램지어 찾다 실패(?)한 썰

그리고 얻은 교훈

'미쓰비시 교수'가 또 있다?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와 한국인에 대해 망언을 일삼은 미국 하버드 로스쿨 램지어 미쓰비시 교수가 어떤 과정을 거쳐 일본 학자에서 일본 극우의 꼭두각시로 재탄생했는지를 최근 글을 통해 정리해봤습니다.   

램지어는 어떻게 일본 극우 편이 됐을까? 보고 오기

   

그런데 브런치에 글이 발행된 직후, 지인이 카톡으로 링크 하나를 보내왔습니다.      


“Mitsubishi professor로 검색하니 이 사람도 나오네요.”      


미쓰비시 교수가 램지어 말고 또 있다는 거였습니다. '그럴 수 있겠다' 싶어 보내준 링크를 눌러보니 정말, ‘미쓰비시 교수’가 나왔습니다. 로버트 핀다이크. 미국 명문 MIT 슬론스쿨 교수로, 미시경제학 분야 석학으로 꽤 알려진 사람입니다.

      


공식 명칭은 ‘Bank of Tokyo-Mitsubishi professor’.  핀다이크는 ‘Mitsubishi professor’인 램지어와 직함이 달랐지만 역시나 일본 기업의 타이틀을 달고 있다는 점에서 행적을 좀 더 알아볼 필요는 있겠다 싶었습니다. 한 학자의 양심과 그가 소속된 학교의 명성과는 큰 상관관계가 없을 수도 있고, 일본 기업 타이틀까지 달고 있을 경우 그 상관관계가 더 헐거워질 수 있다는 점을 램지어 사태를 통해 확인했기 때문입니다.    

   

핀다이크는 1979년에 MIT 교수로 임명됐는데 교수가 된 지 10년 뒤인 1988년에 도쿄-미쓰비시 교수 직함을 받게 됩니다. 이후 2년 동안 도쿄-미쓰비시 은행의 경영 자문을 해주면서 인연을 쌓아갑니다. 도쿄-미쓰비시 은행은 2006년에 UFJ라는 또 다른 은행과 합병돼 일본에서 가장 큰 은행이 됐지만 합병 전 명칭인 ‘Bank of Tokyo-Mitsubishi professor’라는 직은 계속 유지되고 있습니다.

      

우선, 핀다이크 교수가 쓴 360여 개 저술들의 제목을 훑어봤습니다. <불확실성 시대의 투자>, <미시경제학> 같이 대부분이 미시경제에 관련된 내용들이었습니다. ‘의심 논문’을 추려내기 위해 ‘Japan’이나 ‘Asia’, ‘Pacific’, ‘war’, ‘women’ 같은 검색어로 검색도 해봤지만 관련 논문은 단 한 건도 나오지 않았습니다.      


“한국인 위안부 피해자는 계약 관계에 따른 매춘부였다.”는 주장을 담은 램지어 논문의 제목은 <Contracting for sex in the Pacific War> 였는데 이와 비슷한 제목은 그림자도 찾을 수 없었습니다. 일본 검색 사이트, 유튜브도 뒤져봤지만 핀다이크 교수가 일본 극우나 일본 정부에 유리한 연구를 수행하거나 발언을 한 기록은 찾지 못했습니다. 결과적으로, Bank of Tokyo-Mitsubishi professor라는 직함과 핀다이크의 연구 활동은 별개로, 독립적으로 이뤄지는 것으로 보입니다.


일본 전범기업 미쓰비시 중공업이 하버드 로스쿨에 백만 달러를 기부했다는 내용을 담은 1972년 9월 뉴욕타임스 기사


세상에 램지어가 하나밖에 없을까?       

    

그래도, 세상에 램지어 같은 이가 램지어 하나밖에 없을까. 이번에는 일본 전범기업 미쓰비시의 하버드 로스쿨 기부 기사를 썼던 미국 뉴욕 타임스를 더 뒤져봤습니다. 그리고 이런 기사를 찾을 수 있었습니다. 일본 후요 그룹이 콜롬비아 대학에 '일본법 연구에 써달라'며 150만 달러를 기부했다는 겁니다.   

일본 후요 그룹이 컬럼비아 대학에 150만 달러를 기부했다는 내용의 1980년 10월 뉴욕타임스 기사

   

더 알아보니 컬럼비아 대학에는 ‘Fuyo professor’라는 직함도 있었습니다. 후요 그룹은 후지 은행과 거래하는 ‘은행계 기업집단’인데 기업 홍보를 함께 하거나 같은 은행과 거래한다는 특징이 있을 뿐 개별 기업은 독립적으로 운영되는 느슨한 기업 연합체입니다. 군수 물자를 독점 공급하며 덩치를 키운 전형적인 일본의 재벌 기업들(미쓰비시, 미쓰이, 스미토모)과는 운영 형태가 좀 다른데, 이 후요 그룹의 기부로 컬럼비아 로스쿨에 만들어진 자리가 Fuyo professor 였습니다. 일본 극우의 본산이라고 할 수 있는 <일본 회의>가 출범한 지 2년 뒤,  하버드 로스쿨에 미쓰비시 교수 자리가 생기고 나서 1년이 지난 1999년의 일이었습니다.  

 

컬럼비아 대학 로스쿨에 나와있는 밀합트 교수 소개 페이지

첫 Fuyo professor는 커티스 밀합트(Curtis Milhaupt). 밀합트는 어떤 활동을 했을까요. 논문을 뒤져보니 ‘초기 램지어’와 비슷했습니다. 즉, 일본인의 합리성을 연구 대상으로 삼았던 램지어처럼 일본에 우호적인 저술이 꽤 있었습니다. 예를 들어 밀합트는 <일본 기업 거버넌스의 관계 이론>이라는 논문에서 “일본 기업의 거버넌스가 이전보다 훨씬 덜 관계 지향적으로 변해가고 있고, 반면 미국은 더 관계 지향적으로 변해가고 있다.”면서 “미국과 일본의 기업 거버넌스는 다른 경로로 발전해 왔지만 이제 융합되고 있는 듯하다.”라고 주장했습니다.  이 논문은 후에 <사회, 경제, 정치 맥락에서 본 일본법>이라는 책에 실리기도 하는데, 이 책의 공동 저자가 바로, 램지어였습니다.


<사회, 경제, 정치 맥락에서 본 일본법> 서문. 저자명에 밀합트와 램지어의 이름이 보인다.


둘 다 ‘일본법’을 전공했기에 연구 분야와 접근 방식이 비슷했던 것으로 보이는데 램지어와 밀합트는 2007년에는 <일본법>의 긍정적인 부분만 뽑아내 책으로 묶은 일본법 안내서인 <일본 법-전환점>이라는 책의 공저자로 참여하기도 했는데 이 책은 일본 극우의 자금줄이라고 할 수 있는 일본재단의 지원을 받아 출판된 책이었습니다.

 

밀합트와 램지어 등이 일본재단의 후원을 받아 함께 낸 책 <일본법-전환점>의 표지

  

초기 램지어와 밀합트의 연구 내용이 비슷하다면 밀합트의 논문에서도 램지어 같은 역사수정주의 관점을 담은 내용을 찾을 수 있지 않을까. 뒤져봤지만, 일본 극우와 거의 동화된 수준의 ‘후기 램지어스러운' 주장은 찾을 수 없었습니다. 아베 정권이 추진했던 평화헌법 개정을 주장하는 글이 있을 수도 있겠다 싶어 살펴봤지만, 찾지 못했습니다. 아베 정권을 통해 정치 세력화에 성공한 일본 극우세력은 전쟁포기, 국가 교전권 불인정을 규정한 헌법 9조(평화헌법)의 개정을 주장하고 있습니다.  


요약하면 밀합트를 지일 학자 혹은 친일 학자로 볼 수 있을지언정 극우 패치 '램지어급'으로 볼 수는 없었습니다. 많은 분들이 아시듯 램지어 교수의 망언은 일본 아베 총리가 3선 연임에 성공한 2018년부터 본격적으로 시작됐는데 ‘후요 교수’ 자리는 2017년까지만 운영되다 없어졌습니다. 밀합트 교수는 처음이자 마지막 후요 교수로 재직하다 2018년에 스탠퍼드 법대로 자리를 옮겼고 현재는 중국법을 연구하고 있습니다.


미쓰비시 같은 또다른 전범기업인 '미쓰이(Mitsui)'와 '스미토모(Sumitomo)'를 앞세운 교수 직함도 있을 법해 찾아보니 '미쓰이 교수'는 MIT 공대에, '스미토모 교수'는 예일 대학교 일문학과에 재직 중이었습니다. 그렇지만 두 교수 모두에게서 특이점은 발견할 수 없었습니다.  

 

컬럼비아 대학 로스쿨 일본법 센터 홈페이지


램지어'급'은 램지어뿐이지만...     


이번 <제2의 램지어 찾기>는 극우에 의해 육성된 뒤 끝내 동화된 '제2의 램지어'가 미국 학계 어딘가에 또 있을 것이라는 가정 위에서 시작했습니다. 일본 극우 세력은 미쓰비시 같은 전범 기업 등이 내놓는 막강한 자금력을 바탕으로 극우 인사를 육성, 기획할 수 있는 힘이 있고 램지어의 삶이야말로 그 성공적인 결과물로 보였습니다. 미국의 신진 일본 학자가 ‘친 일본’을 거쳐 ‘친 일본 정부’, ‘친 극우’로 변모해 가는 과정은 극우가 점차 세력을 확장해 극단으로 치달아가는 주요 시기와 묘하게 맞아떨어졌습니다.      


그러나 취재 과정에서 또 다른 램지어를 찾을 수는 없었습니다. '제2의 램지어 있다!’는 제목의 TV 뉴스 제작을 목표로 취재를 했다면 이 취재는 '꽝'이 난 셈입니다. 그렇지만 한편으로는 안심이 되기도 했습니다. 램지어 한 명 만으로도 이미 우리는 충분히 분노했고 충분히 충격을 받았기 때문입니다.

미국 컬럼비아 대학 전경

그렇지만 안심할 수만은 없겠다는 생각이 들었던 건 취재 과정을 통해 알게 된 일본의 미국 학계에서의 큰 영향력 때문이었습니다. 그 영향력은 일본이 세계 경제를 주름잡기 시작했던 1970년대부터 1980년대까지 일본 기업들이 미국 유수의 대학에 냈던 기부금에서부터 나옵니다.  뉴욕타임스의 1989년 보도에 따르면 일본 기업의 미국 대학 기부액은 1987년 8500만 달러에서 1989년 1억 4,500만 달러로 급증했습니다.


1989년 11월 12일 자 뉴욕타임스는 이렇게 보도하고 있습니다.

     

“일본 기업들은 미국 기업이나 부동산 인수로 미국인들 사이에 생길 수도 있는 반일 정서에 대응하기 위해 대학에 기부를 해왔다... 기부를 통해 미국의 연구 인재를 확보하고 일본의 대미 수출에 해를 끼칠 수도 있는 무역 정책을 줄이려고 했다.”   


일본 사회의 모순을 파헤친 미국 저널리스트 E.M. 레인골드의 <국화와 가시>라는 책에도 비슷한 내용이 나옵니다. 이 책은 1990년대 초에 나왔는데, 미국 정부의 지원 감소와 일본 기업의 기부 러시가 맞물리면서 일본 자금 유치가 미국 대학들 사이에 활발해졌다고 설명하고 있습니다.  


“한 분석가는 일본 기업들은 도쿄대 교수들에게 지원하는 것보다 더 많은 액수를 미국 MIT 교수들에게 지원하고 있다고 말한다. 장학금 차원을 넘어 일본 기업들은 미국의 연구소 및 대학에 대한 지원을 강화해 연구로부터 이익을 얻고자 한다... 화장품 업체인 시세이도는 하버드 의대 등과 피부 연구를 위한 연구소 건립을 위한 8,500만 달러 합작사업에 투자했다. 그 연구소에서 나온 모든 특허권은 하버드 의대 소유지만 사용권은 시세이도가 독점하게 되는 것이다.”     


일본 기업의 막대한 기부금과 일본재단의 자금이 미국 대학에 뿌려지면서 하버드 로스쿨에서는 미쓰비시 교수 자리가 생겼고 콜롬비아 대학에서는 후요 교수 자리가 생겼습니다. 컬럼비아 대학에는 <일본법 센터>와 <일본 경제 센터>도 있는데 이들의 활동을 모아놓은 책자를 보면 얼마나 많은 교수와 학생들이 일본의 지원 아래 일본에 대한 연구를 하고 있는지 알 수 있습니다. 미국 중부 명문 미시간 대학교에는 일본학 센터가 있고 <일본 법-전환점>이라는 책을 출판한 워싱턴 대학에는 아시아 연구센터가 있습니다. 워싱턴 대학교가 2007년에 일본재단의 지원을 받아 출판한 일본 사법체계에 대한 개론서가 바로 램지어와 밀합트 교수 등이 함께 쓴 <일본법-전환점>이라는 책입니다.

컬럼비아 경영대 일본경제센터가 매년 발간하는 리포트

   

이들은 끊임없이 일본을 연구하고 그 결과물을 보고서로 작성해 외부자의 시선, 미국의 시선에서 일본 정부와 기업에 인사이트를 제공합니다. 이들의 연구 성과물 위에 새로운 연구들이 쌓이고, 일본에 대한 이해의 폭은 더 넓어집니다. 일본을 매개로 일본 엘리트와 미국 엘리트는 끈끈한 네트워크를 형성하고, 미국에서 지일/친일 학자는 늘어나며 두 나라의 결속은 심리적으로 뿐만 아니라 제도적으로도 강화됩니다. 일본은 그렇게 오랜 기간 미국 학계에서 자신들의 목소리를 키워왔습니다.  


2014년 9월 미국 컬럼비아 대학의 한 포럼에 참석해 연설 중인 일본 아베 신조 전 총리


이런 흐름은 최근까지도 이어져, 지난 2015년 일본 아베 정부는 일본학 연구를 위해 MIT 공대와 조지타운 대학 등에 500만 달러를 지원하겠다는 계획을 밝혔습니다. 당시, 컬럼비아 대학은 이미 500만 달러를 지원받은 상태였는데 이런 움직임에 대해 미국 외교가에서는 '아베 정부가 미국 내 일본 과거사에 대한 연구와 기록을 수정하려는 게 아니냐'는 지적이 나오기도 했습니다.

관련 기사 보고 오기


실제로 2018년 아베 총리가 3선에 성공한 이후 평화 헌법 개정을 본격적으로 추진하려고 하자 컬럼비아 로스쿨에서는 2019년에 <평화 헌법 개정>에 대한 토론회를 열기도 했습니다. 어떤 학자는 헌법 개정에 찬성하고 어떤 학자는 반대했을 테지만, 그런 토론회가 열리는 것만으로도 평화 헌법 개정 문제는 일본 본토에서뿐만 아니라 미국 학계에서도 뜨거운 토론 주제로 이슈 몰이를 했음은 분명합니다.


컬럼비아 대학에서 2019년에 열렸던 일본 평화 헌법 개정 관련 토론회 브로슈어


일본 기업명이 들어간 직함이 아니라 그냥 professor 가운데 제2의 램지어가 없다고 할 수 있을까요. 확신할 수 없습니다. 제2의 램지어가 육성될 토양은 충분히 갖춰져 있는 것 같습니다. 일본 우익은 포기하지 않았습니다.

       

일본의 양심세력 역시 적지 않은 기반을 갖고 있지만
고령화되고 있고 극우 세력이 발호하는 가운데
점점 목소리를 잃어가고 있다.
이런 때일수록 한국과 일본의 양심적인 시민 세력이
극우가 쳐놓은 장벽을 넘어 손잡고 하나가 되어야 한다.
- 한홍구, <한일 우익 근대사 완전 정복> 맺음말 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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