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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송수진 Mar 27. 2021

2차 정인이 법 국회통과... 그후

한국판 <클림비 보고서>를 기대하며

‘브런치’ 작가에게는 잘 알려지지 않은 베네핏(?)이 하나 있습니다. 바로, <통계> 메뉴인데요. <통계> 중 ‘유입 키워드’를 보면 어떤 검색어를 통해 브런치에 들어와 내 글을 읽게 됐는지, 많이 읽히는 글은 또 무엇인지를 알 수 있습니다. 제 브런치에서 가장 ‘많이’ 읽힌 글은 <삼성이 상속세를 줄일 수 있는 신박한 방법>이었습니다. 그런데 ‘꾸준하게’ 읽힌 글은  <정인이 법... 우리는 최선을 다 했을까>입니다. <서울 양천구 학대 어린이 사망 사건> 즉, 정인이 사건 직후 국민 분노가 끓어오르자 국회는 그동안 처리하지 않고 있던 아동학대 처벌 관련 법안을 빛의 속도로 심의/의결해 법으로 만들었지만 그 과정이 충분히 빨랐을지 몰라도 충분히 논의되지 않았음을 지적한 글이었습니다.


이 글은 비슷한 사건이 발생한 날이나 정인이 양부모 재판 날에는 어김없이 읽혔고, 그렇지 않은 날에도 자주 인기글에 들어있었습니다. 이 결과는 뭘 말할까? 결론은 하나였습니다. 정인이를, 그 사건을 기억하고 여전히 분노하는 분들이 그만큼 많다는 것. 그 분노는, 나쁜 어른들에 의해 어린 영혼들이 더 이상 희생되지 않기를 간절히 원하는, 사회 정의에 대한 갈망과 맥이 닿아있는 것 같습니다. 그런 점에서 보면 정인이 법은 완성되지 않았고, 영원한 진행형입니다. 여전히 부족하고, 완전히 해결되지 않았습니다.


국회도 이런 국민의 맘을 알아주길 바라면서, 정인이가 생후 16개월로 세상을 등진 지 5개월이 넘어가는 2021년 3월 26일 현재, 국회에서 진행 중인 정인이 법에 대한 논의 내용들을 점검해보려고 합니다.



지난달 통과된

'2차 정인이 법' 내용은?   

  

‘2차 정인이 법’이라는 용어는 없습니다. 1월 8일에 국회에서 통과됐던 <정인이 법 개정안>과 구별하기 위해 임의로 만든 말로, ‘2차 정인이 법’은 2월 25일에 국회 본회의를 통과한 아동학대 범죄의 처벌 등에 관한 특례법 개정안 등을 일컫습니다.



<정인이 법... 우리는 최선을 다했을까>에서 한 번 말씀드렸듯, 1차 정인이 법은 국회가 분노한 여론을 지나치게 의식한 나머지 충분한 논의 과정 없이 서둘러 통과시킨 측면이 있었습니다.  당시 국회는 부족한 부분은 2월에 더 살펴본 뒤 마저 통과시키겠다고 약속했는데 그 결과가 2차 정인이 법인 셈입니다. 1, 2차 정인이 법을 쉽게 요약하면 아래와 같습니다.

  

[1차 '정인이 법' 주요 내용]
● 아동학대 신고 시 즉각 수사 착수 의무화
● 경찰관/전담 공무원, 가해자와 피해 아동 분리 조사
● 전담 공무원 및 경찰, 아동학대 관련 교육 의무화
● 피해아동 응급조치 기간 3일->5일로 연장 등      
[2차 ‘정인이 법’ 주요 내용]
● 아동학대 살해죄 신설(최소 형량 5년->7년)
● 학대 피해아동에 대한 국선변호인 선정 의무화
● 학대 피해아동에 대한 국선 보조인 선정 의무화
● 미혼부도 출생신고 가능


2차 정인이 법에 등장하는 보조인은 좀 낯선 단어이긴 한데 쉽게 말해 법률적 조력자가 변호사라면 보조인은 정신적인 조력자를 뜻합니다. 가족 등 가까운 사람이 보조인이 될 수 있습니다. 다시 법안 내용으로 돌아가면, 1차 정인이 이 경찰과 아동보호전문기관 등이 학대 사실을 알아차리지 못한 점을 개선하는 데 초점이 맞춰져 있다면 2차 정인이  법적발된 아동학대 범죄를 제대로 처리하는 데 집중하는 것 같습니다. 가해자의 죄는 더 무겁게 처벌하고 피해자의 권익은 더 보호하자는 겁니다.


국선 변호인과 보조인을 꼭 선정하도록 한 점은 특히 의사소통이 서툴 수 있는 피해 어린이가 사법 절차가 진행되는 과정에서 자신의 권리를 온전히 지켜낼 수 있도록 하는 실제적인 대안이 될 수 있단 점에서 큰 진전인 것 같습니다. 법 개정을 담당했던 국회 법제사법위원회 의원들도 국선 변호인 제도를 제대로 운영해달라며 법무부에 신신당부하기도 했습니다. 당시 회의록을 보면 이런 내용이 나옵니다.



[2021년 2월 24일 법제사법소위원회 오후 5시 40분쯤]


송기헌 의원 : 차관님, 피해자 국선 변호 제도가 실효적으로 운영되는지 점검을 보셔야 돼요.

법무부 차관 이용구 : 예, 말씀 들었습니다.

송기헌 위원 : 법정에 나오는 국선 변호인은 괜찮은데 법정에 나오지 않는 과정에서 선임되는 국선 변호인은  법정에 가는 일이 잘 없다고 그래요. 점검을 법무부 차관이 하셔야 될 것 같습니다.

법무부 차관 이용구 : 알겠습니다.

유상범 위원 : 그게 일반 형사사건도 똑같더라고요. 성폭력범죄 피해자인데 피해자 국선 변호인들이 연락이 안 되는 경우가 굉장히 많아요. 저도 변호사 할 때 합의를 하려고 연락을 하려니 아예 안 돼요. 피해자와도 연락이 안 되고. 실효적인 관리 감독이 필요한 것 같아요.

송기헌 위원 : 이게 시스템이 안 돼 있어서 그런 것 같아요. 재판에서의 국선 변호는 정에 나가야 하니까 체크가 되는데 피해자 국선 변호는 그런 시스템이 안 되어있다 보니까 변호사들이 어디까지 해야 하는지에 대한 매뉴얼도 적고. 매뉴얼을 만들 필요가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어요.

법무부 차관 이용구 : 알겠습니다. 실태를 파악해 본 다음에 매뉴얼을 만들어보도록 하겠습니다.

유상범 위원 : 일선 경찰청에 지시해서 피해자가 실제로 국선 변호인과 연락이 되고 필요한 조언을 받는지 등에 대해 실태 점검을 직접 한 번 해 보세요. 일반 형사범도 잘 연락이 안 되는 경우가 많은데 아동 피해자 국선 변호인의 경우에는 그게 더 잘 안 되는 경우가 많을 거예요. 부모와의 갈등도 있을 것이고요.

법무부 차관 이용구 : 알겠습니다.


법무부는 조만간 학대 피해 아동을 위해 선임되는 국선 변호인을 위한 운영 매뉴얼 작성 작업에 돌입할 것으로 보입니다.



"2차 정인이 법이

전부는 아니다"


이렇게 1차와 2차에 걸쳐 정인이 법이 통과됐지만 국회에는 아직 담당 상임위원회인 법제사법위원회를 떠돌고 있는 <아동학대 범죄의 처벌 등에 관한 특례법 개정안>이 ‘많이’ 있습니다. 


우선, 21대 국회가 본격적으로 시작된 지난해 5월 30일 이후 올해 3월 26일까지 발의된 법안은 모두 67개입니다. 이 가운데 21개가 대안 반영되거나 통과됐습니다. 대안 반영’이라는 건 국회의원이 당초 발의했던 법안을 고치고 보완해 만든 ‘대안’이 최종 법에 반영됐다는 뜻으로 사실상 법안 통과 같습니다. 위의 1차, 2차 정인이 법이 국회에서 통과되면서 개선된 조항은 모두 열 개 정도지만 그 안에는 ‘대안 반영’된 법안 20개 정도가 녹아들어 있다고 볼 수 있습니다.

     

67개에서 21개를  나머지 법안 46개는 처리되지 않고 있습니다. 하루빨리 진짜 법이 되면 좋을 것 같은데 지지부진할까요?


46개 2차 정인이 법이 국회 본회의를 통과한 225일 이후 발의된 7개는 의의 첫 단계라고 할 수 있는 상정(토의할 안건을 책상 위에 올려놓음)’조차 되지 않은 상태입니다. 없던 법을 새로 만드는 게 아니라 있던 법을 수정해서 만드는 개정법의 경우는 법안이 발의된 다음날이면 대개 소관 상임위원회에 회부(소관 상임위원회로 법안이 송부)되고 회부된 뒤 45일이 지나면 자동 상정돼 논의가 시작되게 돼 있습니다. 따라서 이 7개 법안은 4월에나 상정돼 심의/의결이 시작될 가능성이 높습니다.      


46개 법안 중에 논의가 시작되지 않은 7개를 뺀 나머지 39개는 ‘진행 중이거나 사실상 아웃된 법안들입니다. ‘진행 중법안은 추가 논의를 거치면 법제사법위원회를 통과할 확률이 높고, ‘사실상 아웃’된 법안은 더 이상 논의되지 않을 가능성이 큽니다.


발의된 법안이 전부 다, 그대로 법이 돼도 될 만큼 잘 구성돼 있다면 좋겠지만 그렇지 않은 경우가 더 많아서, 다른 법안이랑 합치기도 하고 수정도 하는 심의 과정이 필요한 것일 텐데 이렇게 해도 답(?)이 안 나올 거 같은 법안들은 더 이상 논의하지 않고 그냥 둡니다.


예를 들어, 더불어민주당 박상혁 의원(경기 김포 을)이 지난해 제출한 법안이 '사실상 아웃'된 법안으로 보이는데 그 이유는 법안 내용을 보면 짐작할 수 있습니다.   

민주당 경기 김포 을 박상혁 의원 인스타그램

박 의원은 지난해 6월 ‘창녕 학대 어린이 사건’이 발생하자 7월에 ‘창녕 어린이 사건’의 재발을 막자는 취지로 아동학대 신고 의무를 전 국민에게 확대하는 법안을 발의했습니다.

    

창녕 학대 어린이 사건은 감금돼 있던 9살 A양이 친모와 양부를 피해 4층 창문을 통해 옆집으로 탈출한 뒤 편의점에 갔다가 이웃에게 발견돼 세상에 알려지게 된 사건인데 A양이 쇠사슬에 목이 묶이고 물고문 등을 당했던 사실이 드러나 큰 충격을 줬습니다.


온 국민을 더 큰 충격에 빠뜨렸던 건 A양이 학대 피해를 받고 있을 위험성이 크다는 사전 경고를 받았음에도 적절한 조치가 취해지지 않았단 사실이 드러났기 때문입니다. 학교 출석률 등 40여 가지 빅데이터를 분석해 학대 피해 아동을 조기에 발견할 수 있도록 한 e아동 행복지원시스템은 이미 A양의 가정을 학대 위험 가구로 분류했고 여러 차례 경보음을 울렸지만 행정 당국은, "수차례 방문했으나 학대 정황이 없다"라고 결론내고 말았습니다. 행정당국이 두 손 두 발 다 놓고 있는 기간만큼 A양은 더 많은 학대 피해를 당해야 했습니다.  

관련 기사 보고 오기

    

 피해자 A양 모습이 담긴 편의점 CCTV 화면(채널A 화면)  


박상혁 의원은 ‘이렇게 시스템이 작동해도 소용없으니 차라리 사람에게 전적으로 책임을 지우자’는 주장을 담아 법안을 발의한 걸로 보입니다. 그러나 그 선의(?)를 인정한다 해도 내용 자체가 좀 무리하단 지적을 피할 수 없어 보입니다. 국회 법제사법위원회 전문위원도 검토 보고서에서 그 부분을 지적하고 있습니다.


"사회적 약자를 상대로 한 범죄를 규율하는 <장애인 복지법>, <노인복지법>, <가정폭력범죄의 처벌 등에 관한 특례법> 등에서는 일반 국민의 범죄 신고를 임의적인 것으로 규정하고 있음을 고려할 때 이 개정안은 과도한 의무를 부과하는 측면이 있음.
또 일반 국민에게 신고 의무를 부과하면서도 의무 위반에 따른 과태료 등 제재 규정은 없어서 실효성이 담보되지 못하는 문제가 있음. "      


요약하자면, 법안이 다른 법들과 형평성에 맞지 않을뿐더러 의무는 지우면서도 의무를 다하지 않을 경우 처벌할 수 있는 내용은 빠져, 법의 구성 요건에 맞지 않다는 겁니다. 경찰청과 법제처, 보건복지부도 “신중히 검토돼야 한다.”면서 사실상 반대 의견을 냈습니다.


박 의원의 법안은 지난해 7월에 발의됐지만 여전히 계류 상태입니다. 큰 이변이 없는 이상 21대 국회 내내 상정 상태에 머무르다 임기 만료로 폐기될 가능성이 높습니다.


국민의힘 김정재 의원 페이스북

국민의힘 김정재 의원(경북 포항북)과 더불어민주당 고영인 의원(경기 안산 단원갑)이 발의한 법안 역시 비슷한 처지에 놓인 걸로 보입니다. 두 의원이 각각 대표 발의한 법안은 학대 피해 아동을 아동의 의사와 무관하게 '무조건' 보호시설로 옮기자는 건데, 복지법의 대전제를 무시한 법안입니다. 아동복지법아동이 가정이란 울타리 안에서 제대로 성장할 수 있도록 하는 것을 목표로 삼고 있기 때문입니다. 또 현행법은 이미, 피해 아동을 보호해야 할 경우에는 피해 어린이가 가정으로 돌아가고 싶다는 말을 설사 하더라도 보호 시설로 보내도록 하고 있기 때문에 개정안처럼 '무조건' 보호시설로 옮기도록 하면 어린이의 의사가 외려 존중받지 못할 우려가 커집니다. 이 두 법안 역시 이변이 없는 이상 임기 만료로 폐기될 가능성이 큽니다.


“국가는 아동이 태어난 가정에서 성장할 수 있도록 지원하고 아동을 가정에서 분리해 보호해야 할 때는 신속히 가정으로 복귀할 수 있도록 지원해야 한다.”
- 아동복지법 4조



'3차 정인이 법'

통과 가능성은?        


2차 정인이 법 개정 이후부터 최근까지 발의된 법안 7개와 39개 법안 가운데 '아웃된 법안'들을 제외한 법안들이 4월 국회에서 논의돼 이른바 3차 정인이 법으로 탄생할 수 있습니다. 물론, 4.7 재보궐 선거 직후에 국회가 열려 의원들이 열심히 일을 할 거란 전제 위에서 그렇습니다. <아동학대 범죄의 처벌 등에 관한 특례법 개정안>이 여야가 첨예하게 대립하는 법안은 아니니 관련 논의가 멈추지 않고 꾸준히 진행되길 바라봅니다.

    

3차 정인이 법이 4월 국회에서 다뤄진다면 우리가 더 큰 관심을 갖고 지켜봐야 할 법안이 하나 있어서 소개해드리려고 합니다. 국회 부의장인 더불어민주당 김상희 의원(경기 부천 병)이 발의한 <양천 아동학대사망사건 등 진상 조사를 및 아동학대 근절대책 마련 등을 위한 특별법안>입니다.


이 법안은 3년 시한의 조사 위원회를 꾸려서 정인이 사건을 포함해 최근 3년 동안 발생했던 모든 아동 학대 사망 사건의 처음부터 끝까지를 '매우 면밀하게' 조사해 재발 방지 대책을 만든 뒤 각 정부 기관이 '의무적으로' 시행하도록 하고 있습니다. 한국판 '클림비 보고서'라고 할 만합니다.

        

빅토리아 클림비(1991~2000)


클림비 보고서(Climbie Inquiry)는 영국 정부가 빅토리아 클림비라는 소녀에 대한 학대 사건을 면밀하게 조사한 결과와 재발 방지 대책을 담은 보고서입니다. 클림비 사건으로 영국 사회는 매우 큰 충격을 받았고, 영국 정부는 우리 돈으로 치면 56억 원을 들여 클림비의 삶과, 죽음에 이르는 과정을 2년 동안 면밀하게 조사해 400 페이지가 넘는 보고서를 냅니다.

클림비 보고서 다운 받을 수 있는 곳


조사단은 클림비가 학대를 받던 당시 거쳐갔던 복지센터, 병원 같은 공적 관리망들 즉, 클림비가 학대당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아챘어야만 했던 곳들을 일일이 찾아 클림비 사건에 직간접적으로 관계가 있는 270여 명을 인터뷰합니다. 클림비의 삶에 공적인 개입이 이뤄졌던 그 모든 순간에 왜 국가는 학대 사실을 알아채지 못했는지 그 원인을 찾아내려 애씁니다. 당사자들에게만 집중하는 게 아니라 그들을 둘러싼 구조의 문제를 들여다보려 노력합니다.  


예를 들어 클림비 담당 사회복지사에게 “왜 클림비가 학대받고 있다는 사실을 알아채지 못했습니까?”라고 묻지 않고 “아동학대 대응력과 전문성을 키우기 위해 어떤 교육을 받아봤습니까?”, “어떤 경로로 이 일을 하게 됐습니까?”라고 질문하는 식입니다. 아래 사진은 보고서의 <목차>인데 사건의 원인-진행-결과라는, 이미 작성자의 관점이 들어간 구성 방식을 택하지 않고, 그저 클림비가 거쳐갔던 곳들을 시간 순서대로 따라가며 담담하게 기술하고 있단 점을 알 수 있습니다. 클림비의 삶 자체가 이미 큰  비극이기에 그 삶 자체를 있는 그대로, 충실히 보여주는 것이 보고서의 역할이라는 점을 잘 알고 있는 듯 보입니다.


클림비 보고서는 얼링/브렌트/해링게이/토트넘 복지센터 등 10곳을 직접 찾아 왜 클림비의 학대가 묻혔는지 그 구조적 원인을 짚어본다.  


보고서가 만약 우리나라에서 만들어졌다면 지명도, 인터뷰 한 사람의 이름이나 직책도 다 숨겼을 듯한데 클림비 보고서에는 거의 다 공개되고 있습니다. 영국 정부가 클림비 보고서에 어느 정도의 의지를 갖고 임했는지를 알 수 있는 대목입니다. 보고서는 있는 그대로, 정말, 다 공개를 하고 있는데 이 모든 일이 실제 있었던 이라는 점이 가장 큰 충격이었습니다.

아래 내용은 클림비 보고서 1페이지인데 경찰의 수사 보고서를 연상시킬 정도로 상세하게 클림비의 학대 피해가 적혀있습니다. 보고서를 그대로 옮겨보겠습니다.


고모할머니 동거남(좌)과 고모할머니 품에 안긴 클림비


"클림비의 고모할머니와 동거남은 매일 신발과 옷걸이로 클림비를 때렸고 망치로 클림비의 발가락을 내려찍기도 했다. 동거남의 축구화에서는 클림비의 혈흔이 발견되기도 했는데 동거남은 우리에게 이렇게 말했다.
"클림비는 아무리 때려도 울지 않았어요. 그 어떤 고통도 다 참아낼 수 있는 듯 보였죠."
클림비는 1999년에서 2000년으로 넘어가는 겨울 대부분을 난방이 되지 않는 욕실 바닥에 방치된 채 보냈다. 손발이 묶인 채, 쓰레기 봉투 안에서 자신의 대소변으로 범벅이 된 채 말이다. 클림비가 온몸에 멍이 든 채 영양실조와 저체온증으로 병원 응급실에 실려온 날을 클림비를 진료했던 담당 의사 레슬리 알스포드는 이렇게 기억했다.
"클림비 같은 경우는 처음 봤습니다. 아동 학대 피해자 중에서도 너무 상태가 안 좋았습니다."   


보고서는 왜 영국 사회가 클림비를 놓쳤는지, 그런 일이 다시 발생하지 않기 위해 영국 사회가 무엇을 해야 하는지를 망라해 108개 정도의 정책으로 정리해냅니다. 이 결과를 토대로 영국 의회는 2004년 아동법을 전부개정(Children Act 2004)해버립니다. 다 뜯어 고친 겁니다.


클림비 보고서 표지

     

클림비와 정인이는 다른 나라에서 다른 시기를 살다 떠났지만 여러 가지 면에서 비슷합니다. 클림비의 삶과 죽음을 통해 영국 사회가 각성하고 그 결과물을 입법으로 완성시켰듯 정인이 사건을 계기로 우리 사회도 그렇게 할 수 있지 않을까요. 가칭 '정인이 보고서'가 만들어진다면 아동학대 범죄의 처벌 등에 관한 특례법은 처음부터 다시 쓰일 수 있습니다. 다시 잘 쓰이면, 제2의 정인이가 생길 확률도 줄어들 수 있지 않을까요? 사회 구성원들이 느끼는 공적인 분노를 실제 변화를 위한 제도 개선으로 한 데 묶어내는 것 역시 정치의 역할 같습니다.  


엄마들의 정치 참여를 통해 한국 사회의 모순을 개선하자는 취지로 만들어진 시민단체 <정치하는 엄마들>의 장하나 활동가가 올해 1월 KBS 라디오 <열린 토론>에 출연해 한국판 클림비 보고서 작성이 시급하다면서 이런 말을 했는데 무척 공감되는 얘기였습니다.    

"언론에서 '정인이 사건이 재발하지 않기 위해 뭘 바꿔야 하지?'라는 질문을 하고 '그럼 뭘 바꾸면 됩니다!'라고 답을 하기도 하는데 이렇게 말하는 거 자체가 기만이나 거짓이라고 생각합니다. 왜냐하면 경찰의 수사 기록을 다 볼 수 있는 사람이 아무도 없는데 어떻게 진실에 다가가겠습니까. 청와대가 이번에 의지가 있다면 한국판 클림비 보고서를 꼭 만들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국회 보건복지위원회 회의록을 보면 법안이 보건복지위원회를 통과하는 건 크게 어렵지 않을 것 같습니다. 조사 위원회를 청와대 소속으로 할 것인지 국회 소속으로 할 것인지를 두고 약간 이견이 있는 듯 하지만, 의지만 있다면 위원회의 소속이 큰 문제는 아니니 법안이 하루빨리 통과되길 바라봅니다. 법안이 본회의를 통과해 한국판 클림비 보고서 작성이 본격적으로 시작된다면, 그래서 아동학대 처벌법을 비롯한 관련 법안들이 총체적으로 개선된다면, 어른들의 탐욕과 무관심에 희생당한 어린 생명들에게 우리가 아주 조금은 덜 미안해질 것 같습니다.  


{2월 19일 국회 보건복지위원회}

남인순 의원 : 반짝하고 마는 그런 정책 갖고는 안 된다는 게 지난 7, 8년 동안의 현장의 목소리였어요. 우리들이 해야 될 일입니다, 정말. 저는 이것을 빨리 조사를 해야 한다고 생각하고 정부가 주도해서 조사를 좀 해 주십시오.

보건복지부 장관 권덕철 : 저희들도 필요성은 공감을 합니다. 왜냐하면 아동학대 대책이 대개 1회로 끝나는 경우가 많이 있습니다. 그런데 3년 동안 쭉 조사를 해 보면 거기에서 함의하는 여러 가지 정책적인, 제도적인 또 우리 사회적인 인식 이런 것들을 좀 다뤄 볼 수 있지 않을까 싶습니다.


이 보고서는
클림비로 시작해서 클림비로 끝난다...
조사의 모든 과정에 마치
클림비가 참여한 것처럼 느껴졌다.
불행히도 그 죽음을 되돌릴 순 없다.
두 번 다시는 클림비와 비슷한 운명에 처하는 아이가 없어야 한다.
- 클림비 보고서 중-
 


** <법안으로 세상읽기>는 국회의원이 발의한 법안을 통해 정치와 사회를, 그리고 우리를 들여다보는 연재물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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