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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송수진 Apr 09. 2021

이해충돌방지법의 이해에 대한 이해

그리고 입법 머신


정치는 원칙의 경쟁으로 위장하는
밥그릇 싸움이다.
사익을 위한 공공적 활동이다.
-미국 작가 앰브로즈 비어스-
   


"부동산 투기를 막고 주택시장 안정화시키겠다는 약속도 반드시 지키겠습니다. 2.4 공급대책도 차질이 없도록 입법적, 행정적인 노력을 하겠습니다. 공직자 투기 근절과 부동산 적폐 청산의 최우선 과제인 공직자 이해충돌 방지법, 거래분석원 설치도 조속히 하겠습니다."
- 4월 8일 의원총회 중 김태년 원내대표      


 더불어민주당은 부동산 정책에 실패했기 때문에 이번 4.7 재보궐 선거에서 진 걸까요? 주요 패배 원인 가운데 하나인  분명해 보입니다. 선거 다음날 김태년 당시 원내대표가 낸 메시지를 보면 더불어민주당은 그렇게 보고 있는 것 같습니다. 전체 메시지의 절반 정도가 부동산 대책에 대한 내용이었습니다. 


이 대책에는 공직자 이해충돌 방지법이 포함돼 있었습니다. 원래  '3월 이내', 늦어도 '4월 7일 재보선 전까지 통과'시키려고 했지만 결과적으로 여당은 실패했고, 4.7 재보선 결과의 충격을 정리하는 법안으로 다시 등장했습니다. 세번째 통과 기한이 또 잡힌 셈입니다.  


참여연대는 2003년부터 공직자 이해충돌 방지법 입법을 위해 노력해왔다.


이 법안에는 공직자의 이해 충돌을 사전에 규제하고 미공개 정보를 이용한 재산 증식을 막는 내용이 포함돼 있습니다. 이 법안이 진짜 법이 된다면 국민들 입장에서 LH 사태로 커질 대로 커진 정부와 여당에 대한 분노를 멈출 수 있는 정당한 이유가 생긴 셈이 되고 174석을 가진 거대 여당 입장에서는 할 일은 한 셈이 됩니다. 4.7 재보선 전에 통과했다면 하락 국면이었던 문재인 대통령 국정 지지도가 상승 반전할 수도 있었습니다.


[공직자의 이해충돌 방지법안] 제13조(직무상 비밀 이용 금지)
① 공직자는 직무수행 중 알게 된 비밀을 이용하여 재물 또는 재산상의 이익을 취득하거나 제삼자로 하여금 재물 또는 재산상의 이익을 취득하게 하여서는 아니 된다.
② 공직자는 직무수행 중 알게 된 비밀을 사적 이익을 위하여 이용하거나 제삼자로 하여금 이용하게 하여서는 아니 된다.      




이해충돌 방지법에 대한

야당의 이해


야당 입장에선 그러나 공직자 이해충돌방지법안을 급하게 심의해야 할 이유는 크지 않습니다. 서울시장과 부산시장 보궐선거에 출마했던 국민의힘 두 후보들에 대한 지지율이 10% p 이상 여당 후보들을 앞서게 됐던 결정적인 원인은 정권 심판 프레임이며, 이 프레임은 LH 사태로 촉발된 국민들의 분노를 먹고 자랐습니다.


오히려 이해충돌 방지법안이 국회를 통과하지 않는 게 국민의힘 이해에는 더 맞습니다. '진보 정권도 부패했다', '진보가 오히려 더할 수도 있다.'..는 인상을 주기 딱 좋습니다. 자당 의원 중에도 이해충돌 사례가 있었지만 뭐, 어떻습니까? 이해충돌 규모가 제일 컸던 박덕흠 의원, 전봉민 의원은 이미 탈당했기에 더 이상 국민의힘 소속이 아닙니다.   법안 심의를 담당하는 국회 정무위원회는 3월 중순부터 이 법안을 본격적으로 살펴보기 시작했는데 이해충돌방지법 적용 대상에 언론인과 사립학교 교원도 넣어야 하는지, 다양한 공무원들 계약 형태 가운데 어느 선까지를  포함시켜야 하는지 등을 놓고 위원들 사이에 합의가 아직 이뤄지지 않았습니다.

 

전 국민의힘 박덕흠 의원 일가가 운영하는 건설사가 피감기관으로부터 수주했다고 알려진 금액은 3천억 원에 이른다.  


이해충돌 방지법안,

여야 이해 사이에서 Rollin’ 

        

공직자 이해충돌 방지법안을 놓고 서로 다른 우주를 살고 있는 두 당의 상황은 회의록에 그대로 나타납니다.   


{2021년 3월 23일 국회 정무위원회 법안소위원회}
[주요 등장인물]
여당 김병욱(경기 성남 분당을):여당 간사(반장)
국민의힘 성일종(충남 서산태안):법안소위 위원장   

   

김병욱 의원 : 위원장님, 이해충돌 방지법에 모든 언론의 관심이 집중돼 있고 우리가 반드시 해야 될 법이기 때문에 바로 진행을 해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소위원장 성일종 : 그러면 (여당) 간사님, 이렇게 하시죠. 지금 공정거래위원회 김재신 부위원장이 와 있으니까 대리점 거래 공정화법(이하 대리점법)에 대한 보고까지만 받고 이해충돌 방지법안 논의로 넘어가시죠.

김병욱 의원 : 그러지 마시고 대리점법은 다음에 심도 있게 논의하시지요. 오늘은 이해충돌 방지법 바로 넘어가시고요. 시간이 너무 없습니다. 저희가 지금.

소위원장 성일종 : 지난주에도 내가 김 간사님 해 달라는 대로 해줘서 굉장히 욕을 먹었는데... 또 이렇게 해도 되는 거예요?

김병욱 의원 : 저희가 이해충돌 방지법안 논의 시간이 너무 적다 보니까 깊숙이 논의를 하려면 시간 확보를 좀 해야 되거든요.

유의동 의원 : 그런데 지금 대리점법 이거 보고 받는 데 시간이 10분, 20분 정도밖에 안 걸릴 텐데 그 정도 더 하면 되지요. 어차피 안 할 것도 아닌데.

김병욱 의원 : 이거는 다음 회의 때 보고 받고 집중적으로 논의하는 게 맞다 봅니다.

소위원장 성일종 : 그러면 다른 의원님들 의견 좀 들어 보죠.

유의동 의원 : 대리점 법안 논의하는 데 30분 정도로 되면 대리점 법안 보고 난 다음에 시간 연장해서 이해충돌 방지법안도 논의할 수 있는 거 아닌가요?

김병욱 위원 : 오늘 이해충돌 방지법 하시지요.

박수영 위원 : 대리점 법안이 오늘 일정에 포함돼 있고 위원장님도 상정을 하시려고 했던 거니까 보고는 일단 듣고 진행하시죠.


국회 정무위원회 여당 간사인 김병욱 의원(좌)과 법안소위 국민의힘 성일종 위원장


이해충돌 방지법안은 3월 23일에 가장 깊이 있게 다뤄졌는데, 국회 의안정보시스템에 올라온 회의 속기록을 보면 여당 간사 김병욱 의원이 가장 자주 했던 말은   


“다음으로 넘어가시지요.” 


였습니다.  사실, 이해충돌 방지법안은 김병욱 의원 말대로 빨리 “넘어가”도 되는 구석이 분명 있습니다. 왜냐하면 원래 대통령령으로 존재하고 있었던 공직자 행동강령을 거의 그대로 법안으로 옮겼기 때문입니다. 또, 2015년에 이른바 ‘김영란법’(부정청탁 금지법)이 만들어질 때 이미 한 번 논의된 적이 있기 때문에 없던 법이 새로 만들어지는 재정법 치고는 완성형에 가까운 것도 사실입니다. 이 분야 권위자인 윤태범 한국방송통신대학교 행정학과 교수도 법안의 완성도를 꽤 높게 평가했습니다.       


정부가 제출한 공직자 이해충돌 방지법안은 이전과 비교해 많이 보완됐다. 적용 대상을 공직자로 명확하게 한정하고 이해 충돌을 회피할 수 있는 방안도 다양화해서 긍정적인 평가를 하지 않을 수 없다. 이번에 논의가 꼭 이뤄지길 기대한다.”       


반면 국민의힘 성일종 소위원회 위원장이 가장 자주 했던 말은 이 말이었습니다.      


“또 다른 위원님들 의견 주시지요.”   


보통, 소위원회 심의는 의원들이 주도하고 위원장은 순조롭게 진행하는 데 집중하는데 성 위원장은 직접 등판해 어느 의원보다 활발히 의견을 개진했습니다. 회의록을 보면 성 위원장의 활약상을 짐작할 수 있습니다. 이날 가장 발언량이 많은 의원이 성 위원장일 정도였습니다.        


소위원장 성일종 :  또 다른 위원님들 의견 주시지요.

김병욱 의원 : 자꾸 말씀드리는데요, 위원장님. 한 조문 한 조문 다 보다가는 시간이 너무 지체됩니다.

소위원장 성일종 : 알았어요...

차관님 하나만 더 여쭤볼게요. 정부가 특수 T/F팀 같은 걸 운영하잖아요. 예를 들어서 민간 전문가 몇 명하고 공무원하고 같이 논의하는 경우에 민간 전문가를 공무원에 준해서 처벌할 수 있는 규정도 있나요?

국민권익위원회 부위원장 이건리 : 예, 그런 조항이 있습니다.

소위원장 성일종 : , 그런 부분이 이해충돌 방지법안이미 있다는 거죠?

국민권익위원회 부위원장 이건리 : 예, 그렇습니다.

소위원장 성일종 : 알겠습니다. 어쨌든 질의 과정에서 권익위원회에서 잘 저리를 해주셔서 감사드리고 이 부분은 넘어가도록 하고요...  



김병욱 간사가 “빨리 진행하자.”라고 하면 성일종 위원장은 일단 “알았다.”라고 답합니다. 그리고선, 김 간사의 요청은 못 들은 척, 본인이 하고 싶은 말을 계속합니다.  23일 회의는 오후 2시 50분에 시작해 밤 11시까지 이어졌는데 국민의힘 쪽에서는 성일종 위원장박수영 의원(부산 남구갑), 윤두현 의원(경북 경산)이 조문 하나하나를, 마치 현미경을 통해 보듯 디테일하게 살폈고 민주당 의원들은 김병욱 간사를 통해 꼭 짚을 것만 짚는 한편 나머지 의원들은 발언을 최소화하려 노력했습니다. 어느 정도였느냐 하면 김병욱 의원이 47번 말할 동안 민주당 박광온 의원과 송재호 의원은 7시간 동안 단 한 마디도 하지 않았습니다.  4월 2일에 열린 법안심사 소위원회에서도 두 의원은 내내 입을 꾹 닫고 있었습니다.    



이해충돌방지법에 대한

우리의 이해


공직자 이해충돌 방지법안에 대한 두 정당의 정치적 득실은 이렇게 갈리고 있고, 언론 역시 이런 관점에서 해석 기사를 내놓고 있습니다. 특히 이번에 4.7 재보선 이후 민주당이 공직자 이해충돌 방지법안의 조속한 국회 통과를 천명하면서, 여당은 더 답답한 처지가 됐고 야당은 더, 덜 답답하게 됐습니다.  그런데, 이 법안을 유권자 입장에서 보면 어떨까요?  


공직자가 재임 기간 중 '사인'인 개인의 이해관계와 충돌할 때를 대비한 법은 아직 우리나라에 없다.


공직자가 외부로부터 부정한 청탁을 받는 경우 이른바 김영란법(부정청탁 및 금품 등 수수의 금지에 관한 법률)을 통해 막을 수 있고 처벌할 수도 있습니다. 퇴직 이후를 염려한 나머지, 퇴직 전부터 개인적인 이익을 도모하는 공직자들 공직자 윤리법이 어느 정도 막아 줍니다. 퇴직 후 같은 업계 취업이 제한되는 게 이 법 덕분입니다.          


그런데 재임 기간 중 ‘공인’의 직무와 ‘사인’의 자아가 충돌할 때 공직자들이 어떻게 해야 하는지, 사적 이익을 추구하는 공직자를 어떻게 처벌해야 하는지 정해놓은 법이 우리나라엔 아직 없습니다. 공직자윤리법에서 "이해와 관련돼 공정한 직무 수행이 어려운 상황이 일어나지 않도록 노력해야 한다"라고 선언적으로 말할 뿐, 구체적인 내용은 하나도 없습니다. "학생은 공부를 열심히 해야 합니다."라고 한 마디 해놓고는 구체적인 방법은 하나도 가르쳐주지 않고서 시험을 잘 보길 기대하는 교사와 다를 게 없어 보입니다.    



미국, 캐나다, 영국 같은 다른 나라들은 어떨까요? 미국은 1962년에 뇌물 및 이해충돌 방지법(Bribery, Graft and Conflict of Interest Act)을 만들었고 1978년에는 닉슨 대통령의 워터게이트 사건을 계기로 정부 윤리법(Ethics in Government Act)도 추가돼서 ‘정부 윤리국’이라는 공직자 윤리 전담 부서도 생겼습니다. 연방정부, 사법부, 입법부 공무원들은 이 법에 따라 자신뿐 아니라 배우자와 자녀의 재정상황도 공개해야 합니다. 캐나다도 2006년에 이해충돌 방지법을 제정했고 프랑스도 2013년에 공직사회의 투명성법을 만들었습니다.


웬만한 나라에 공직자 이해충돌 방지법이 있는 건 UN이 2003년에 세계 최초의 반부패 국제 규범이라고 할 수 있는 반부패 국제협약을 제안해 180여 회원국들이 지키겠다 약속했기 때문입니다. 우리나라도 2008년에 이 협약을 국회에서 비준했지만 정작 공직자의 임기 중 이해충돌을 막는 구체적인 방법에 대한 법은 큰 구멍으로 남겨뒀습니다. 공직자 행동강령이 있었지만 법적 지위가 ‘대통령의 명령’에 불과해 어겨도 제대로 처벌하기가 어려웠습니다. 우리나라에서 정치인이나 고위 공직자에 대한 신뢰가 바닥인 점을 고려하면 이해충돌 방지법 없이 지금까지 지내온 게 더 신기할 정돕니다.




이해충돌 방지법에 대한

국회의원의 이해


참여연대는 이미 UN이 반부패 협약을 채택했던 2003년부터 공직자 이해충돌 방지법을 추진했지만 국회에서 관심을 갖기 시작했던 건 그로부터 10년이 지난 2013년부터 였습니다. 부정청탁 금지 및 공직자의 이해충돌 방지법안’이 논의될 무렵입니다.


여기서 잠시... ‘부정청탁 금지?’ 어디서 많이 들어봤는데요. 맞습니다. 우리가 아는 그 ‘김영란법’입니다. 2015년에 부정청탁 금지 및 공직자의 이해충돌 방지법안 가운데 ‘부정청탁 금지’에 대한 내용은 이른바 김영란법으로 제정됐습니다. 그러나 나머지, 이해충돌 방지 부분은 통과되지 못했습니다. 무슨 일이 있었던 걸까요? 당시 회의록을 좀 보겠습니다.      


{2015년 1월 8일 국회 정무위원회}
[주요 등장인물]
새정치민주연합(현 민주당) 김기식/김기준 의원
새누리당(현 국민의 힘) 신동우/김용태 의원(소위원회 위원장)  


김기식 의원 : 그런데 사실은 이 법(부정청탁 금지 및 공직자의 이해충돌 방지법안)이 제정됐을 때 가장 많이 발생할 사안은 이해충돌과 관련된 부분입니다.

신동우 위원 : 그래요, 나도 동의해요.

김기식 의원 : 그러니까, 금품수수의 경우 받는 놈만 걸리는 문제고요. 부정청탁 부분은 김영란법이 생기면 줄어듭니다. 그런데 이해충돌 문제는 내 의사와 상관없이, 내가 뭘 하지 않아도 객관적으로 존재하는 현실의 문제입니다. 그래서 이해충돌 문제가 가장 빈번하게 발생할 것이기 때문에... 2000개든, 3000개든 이런 기관들이 이해충돌 조항을 실행할 수 있을지 그 가능성도 봐야 합니다.

신동우 의원 : 이해충돌 방지 부분은 빼고 가는 방법도 있어요.

국민권익위원장 이성보 : 아까 그 방안에 대해 설명을 좀 드렸는데요.

소위원장 김용태 : 아, 그랬어요?

김기준 의원 : 지난번에 이런 방안을 검토해달라고 국민권익위원회에 주문을 했어요, 소위에서. 그래서 권익위가 가지고 온 거예요.     



공직자 이해충돌방지법안을 처음으로 제안했던 참여연대에서 사무처장을 했던 김기식 의원이 입법을 사실상 반대했단 게 좀 놀라운데요. 회의록에도 나오듯, 이해충돌 방지법안은 ‘이해 충돌 문제가 빈번하게 생길 수 있고 전국 공무원이 몇 명이나 걸릴지 알 수 없다’는 이유로 2015년 당시 여, 야 국회의원 합의를 거쳐 최종 법안에서는 빠지게 됐습니다.  좀 더 솔직하게 말하면, 당시 정무위원회 의원들은 이해충돌 방지법안을 꼭 '지금' 통과시키지 않아도 당장 해가 될 게 없다고 판단했기 때문입니다. 또, 이해충돌 방지법안을 통과시켰을 때 돌아올 이익이 충분히 크지도, 분명하지도 않다고 여겼기 때문입니다. 이해충돌 방지법안을 버리는 게 당시 의원들 이해에는 더 맞았습니다. 이 부분에서 여야의 이해는 다르지 않았습니다. 당시 이 법안을 제안했던 김영란 전 국민권익위원장은 “이해충돌 방지 규정이 빠져 원안에서 후퇴한 부분을 아쉽게 생각한다.” 라면서 국회를 우회적으로 비판했습니다.

 관련 기사 보고 오기 

     

김영란 전 국민권익위원장


21대 국회에 들어서도공직자 이해충돌 방지법안이 논의될 기회는 여러 번 있었지만 제대로 논의된 적은 없었습니다. 국민권익위원회가 이해충돌 방지법안을 국회에 낸 게 2020년 7월이었고 이후 정의당 심상정 의원과 민주당 박용진 의원 등이 비슷한 내용으로 발의했습니다. 그러나 LH 사태가 터진 3월 2일 전까지는 국회 정무위원회에 상정만 돼 있었고 한 번도 심의되지 못했습니다. 2015년과 비슷한 이유가 작용했을 겁니다.




이해충돌 방지법안은 처음으로 제안됐던 2003년 이후 지금까지 15년 가까운 세월동안 국회의원들의 이해 관계라는 상자에서 한 치도 벗어나지 못한 채 미처리 법안 신세로 강제 냉동보관 돼 있었습니다. 그러다 LH 사태를 만나면서 급히 해동돼 논의되기 시작했지만 이번에는 여당의 강력한 필요가 존재한단 점에서 역시나 국회의원 이해 관계라는 자장 안에 있습니다.  


법안은 이렇게 국회의원들과 이해 관계가 맞을 때만 비로소 진짜 법이 될 수 있는 걸까요? 국회의원들 입장에선 그렇게 볼 수도 있을 것 같습니다. "그 많은 법안을 언제 다 심의하냐.", "우리가 법만 만드는 게 아니라 지역구도 챙겨야 되고 할 일이 많다.", "정당 일도 봐야되고 대선도 챙겨야 된다."...


그런데 정말 그런 거라면 우리 유권자 입장에서는 좀 억울합니다. 꼭 이렇게 문제가 터지고, 꼭 이렇게 온 사회가 "시급하다."라고 앓는 소리를 해야만 법안이 국회 본회의장 문턱을 넘을 수 있는 거라면, 제 아무리 좋고, 필요한 법안도 당장 급하지 않으면 처리되지 못하는 거라면, 사건이 터지고 피해가 커질 때까지 제대로 된 법 없이 마냥 기다려야 한단 말과 다르지 않습니다. 이런 방식으로 국회가 돌아간다면, 굳이 유권자들이 더 능력 있는 국회의원을 뽑을 필요가 있을까요? 피해가 큰 사건, 국민 분노가 끓어오르는  사건에 대한 법안만 만들고 처리하면 된다면 의원의 인성이나 감수성, 능력 따위는 넘치는 스펙입니다. 정파적 이해 관계가 꼭 없다고 해도, 법이 필요하고 중요하다는 단지 그 이유로 단박에 국회 본회의를 통과해 진짜 법이 될 수는 없는 걸까요. '입법 로봇'을 잠깐 상상해보다가 칸트가 했던 어떤 멋진 말이 떠올랐습니다.


정치가 한 걸음이라도 앞으로 나아가려면
먼저 도덕에 경의를 표해야 한다.
- 이마누엘 칸트(1724~1804) -




* 커버 이미지는 네이버 카페  <프라모델 카페 꼬물딱>에 초보게임님이 올린 이미지입니다.

* 글 서문에 인용한 미국 작가 앰브로즈 비어스의 말은 강준만 교수의 책 <싸가지 없는 정치>에서 인용했습니다.  

** <법안으로 세상읽기>는 국회의원이 발의한 법안을 통해 정치와 사회를, 그리고 우리를 들여다보는 연재물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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