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접스러운 시대를 살아가는 방법 5
무엇이든 노골적으로 뚜렷하게 보아야 하는 시대다. 무엇을 보고 확인하려 하는 것일까? 불안을 잠재우고 싶은 것이다. 흔들리고 모호한 세상과 나의 관계를 안정적이고 뚜렷하게 여기게 해 줄 무엇이 필요한 것이다. 존재의 불안을 해소하려 뚜렷하고 확실한 것을 찾게 되고, 결국 보이는 대상을 선명하게 낱낱이 파헤쳐 볼 수 있어야만 흡족하게 되었다. 그러나 자세히 볼수록 의심은 불어나고 노골적인 시선은 그에 따라 점점 번져나가고 있다. 보지 않아야 지켜질 수 있는 것들은 보고자 하는 욕망에 침범당하여 짓밟히고 있다. 시선은 대상을 인정하는 온화함이 아닌 제거하는 폭력이 되고 있다.
볼 수 있다는 것은 권력이다. 보고 싶은 것만 볼 수 있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보고 싶은 것을 보지 못하는 사람이 있다. 자신이 원하는 때에 보고자 하는 것을 볼 수 있는 능력을 가진 사람은 세상의 꼴이 흡족하다. 그러나 세상의 꼴이 누군가 보기에 좋다면 다른 누군가는 희생하고 있음을 알아야 한다. 사람들은 고유한 욕망에 따라 추구하는 세상이 다르지만, 물리적 세상은 같이 공유하고 있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세상의 꼴은 소비력이 높은 사람에게만 친화적으로 꾸며진다. 시장의 권력자는 소비자이기 때문이다. 권력자가 보기에 좋게, 보기에 안 좋은 것은 약한 자들의 시선이 닿는 땅으로 밀어내 가린다. 세상은 누군가에겐 아름다움만을 누군가에겐 추함만을 드러내게 된다. 보고자 하는 욕망이 균형 없이 실현되는 까닭에, 같이 살아가는 사람들에 대한 예의가 무너지고 있다. 세상은 태어난 사람의 수만큼 울퉁불퉁하고 모나고 거칠고 엉망인 꼴이어야 맞다. 나에게만 어여쁜 세상은 타인의 비극 위에 지어졌음을 알아야 한다.
지금 이 시대는 사람들의 눈길을 상품에 두려 안달한다. 소비하는 인간을 만들기 위해서다. 모두가 원하는 상품을 보느라, 자기 삶에 소중한 의미를 지니는 대상들을 보는 데 소홀해진다. 시각적 자극을 위해서라면 상품화작업은 사람이든 물건이든 자연이든 가리지 않고 진행된다. 어쩌면 내가 시장이 권하는 것을 보는 것만으로도 인간상품화를 부추기고 있을지 모른다. 자신의 눈길이 어디에 닿는지, 어디로 향할지를 치열하게 고민하지 않으면 결국 시장이 원하는 곳에 눈을 빼앗기게 된다.
보고 싶지만, 도덕적으로 지탄받는 것은 볼 수 없었다. 보지 못하니 가상의 대상을 상상하는 것으로 끝났다. 그렇게 금기는 지켜졌다. 그러나 지금 이 시대는 부정한 것일지라도 돈을 주면 볼 수 있게 되었다. 취향이라는 단어로 부도덕한 것들을 끌어안는다. 보고 싶어 하는 것은 수요가, 보여주는 것은 상품이 되었다. 시장의 노출강요는 인격을 가진 사람이라도 예외 없다. 상품이 된 사람을 노출시키는 행태는 무자비하다. 특정 신체 부위를 확대하여 보게 하고, 일상과 개인적 사건에 대한 감정적 표출까지 적나라하게 보게 한다. 노출된 개인은 조롱당하기 쉽다. 노출은 영상물로 기록되어 당사자의 의사와는 상관없이 영구보존될 수 있다. 그 노출이 당사자의 의지가 아니더라도 상관없다. 수익을 낸 상품은 수요가 없을 때까지 팔려나간다. 상품이 된 영상물에서 출연 당사자의 철학과 감정, 의지 따위는 쉽게 무시된다. 타인을 훔쳐본다는 죄책감은 금전적 대가를 치렀다는 이유로 덜어낸다. 시장은 훔쳐보는 자들을 소비자로 만들어 노출착취를 당당하게 만든다. 인간상품화의 현장에서 시선을 거두겠다. 인간을 해치는 일이거나 당사자의 바람이 아닌 드러남은 보지 않겠다. 보지 않음으로 타인의 존엄을 지킬 수 있다.
렌즈가 계속해서 발전해왔지만, 인간은 대상을 믿지 못하고 더욱더 확대하고 뚜렷이 보려 애쓴다. 볼 수 없는 마음까지도 뇌를 찍는다던가, 신체반응을 초 단위로 관찰하는 등의 방법으로 들여다보려 애쓴다. 무엇이든 병적으로 선명하게 보려 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배신과 위협과 감염과 침범 등 모든 부정적인 것들을 확인하고 차단시켜 나의 존재를 안전하게 보호하고 싶은 마음 때문이다. 그러나 생명에 완전무결함이란 없고, 세상에 나만을 위한 낙원은 없다. 더 뚜렷이 본다고 해서 세상이 편안해지지 않는다. 불안하고 혼란스러운 마음은 세상을 명확히 볼 수 없어서가 아니라 세상을 신뢰하지 못하기 때문에 발생한다. 신뢰는 선명한 화질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다. 지나온 시간 속에서 겪었던 사건과 영향에서 나오는 판단이다. 많은 사람이 뚜렷함을 찾는 것은 시간 속에서 많은 불신의 경험을 겪었기 때문이다. 신뢰는 세상과 나의 상호작용으로 회복되는 것이지 세상을 더 꼼꼼히 관찰한다고 회복되는 것이 아니다. 외면하지 말고 세상의 흐릿하고 위험한 점을 인정해야 한다. 보이지 않는 것은 보이지 않는 대로 내버려두면 된다. 볼 수 없는 것에 두려움을 가지면 살아가는 내내 모든 것을 보고자 하는 강박에 시달릴 것이다. 두렵더라도 렌즈 밖 실체로 나아가 자신과 함께 생동하는 세상을 경험해야 필요 이상의 두려움을 떨쳐낼 수 있다. 불안을 잠재울 능력은 기술 발전에 있는 것이 아닌 자신의 의지에 달려있음을 알아야 한다.
시선에 소비성을 부여하는 순간, 이득과 낭비의 손익계산이 시작된다. 봄으로써 무엇인가를 얻으려 한다. 정보의 습득이 아니면 시선을 낭비했다는 생각이 든다. 휴식의 시간, 바라보지 않음은 죄책감이 된다. 본다는 것에는 보고자 하는 것과 보이는 것이 있을 뿐이다. 의지로 보고자 하는 것을 찾아 나설 수도 있고, 그저 보이는 것들을 편안하게 관망할 수도 있다. 이익과 손해라는 계산이 시선에 스며들면, 이미 본 것에 대해 미련을 가지게 된다. 효율적으로 보고자 노력하는 것은 질 좋은 정보입력기가 되어가는 과정이다. 기계가 아닌 사람은 예기치 않은 것을 볼 필요가 있고, 우연이 만들어낸 풍경을 음미할 수 있어야 한다. 보는 것을 중단하고 정보입력을 거부할 용기가 있어야 한다. 그렇게 쌓인 여유가 내면의 자신을 볼 기회를 선물할 것이다.
보고 싶다는 욕망은 모든 존재에게 빠르게 상품성을 부여했다. 시장은 욕망을 놓치지 않는다. 수요에 발맞추어 사람들에게 더 많이 보일 것을 강권한다. 자신에게 상품성이 있다는 것을 확인하면 더 많이 보이고 싶어 한다. 상품성만을 내세우기 때문에, 많이 보인 사람일수록 많이 숨고 싶어 한다. 자신의 추함이 보일까 전전긍긍하고, 자신의 아름다움이 보이지 않을까 초조해한다. 타인이 원하는 삶은 무대에서, 원하지 않는 삶은 커튼 뒤에서 해결하려 한다. 상품이 되면 경쟁하게 된다. 평가당하고, 선택되지 않는 것에 대한 두려움을 안고 살아야 한다. 보이면 보일수록 관객의 노예가 되어간다.
왜 가려져 있을까? 인간에겐 장막이 필요하다. 시선으로부터 해방되는 것은 수치심을 제거해 준다. 인간은 수치심이 없을 때 자유로울 수 있다. 생의 자유를 만끽해보아야 타인의 자유를 인정할 수 있다. 내 불안을 해소하기 위해 남의 장막을 들추지 않겠다. 사람은 비커 위에 놓여 있는 실험대상이 아니다. 구석구석 보는 것은 시선으로 대상을 난도질하는 것이다. 호기심을 해결하는 것이 상대에게 폭력이 된다면 멈추어야 한다. 인격이 있는 대상을 허락받지 않고 보는 것은 폭력이다. 보는 것이 시장인 시대, 보겠다는 것으로 협박할 수 있게 되었다. 보는 것 중에 어떤 경우들은 침범이 되었다. 대상이 보여주려는 의사가 없음에도 집요하게 보려 하는 짓은 호기심에 그치지 않고 실행되고 있다. 기술은 모든 사람의 일상을 보여줄 수 있다. 관음증을 위한 기술과 행동은 가능해졌으니, 침범을 저지할 수 있는 것은 개인의 도덕뿐이다. 이제 보이는 삶과 보이지 않는 삶의 경계는 기술이 아닌 사람의 선택에 따라 정해진다. 우리는 보이고 싶지 않은 모습을 보이지 않을 수 있어야 한다. 커튼 뒤의 삶은 존중받아야 한다. 인간은 어떤 권력도 상관하지 않고 현재에 몰입하는 때가 필요하다. 관찰하는 것만으로 대상을 억압하고 자유를 침해할 수 있다. 모두의 자유로운 삶을 보장하기 위해 개인의 커튼을 지켜내야 한다. 아름다움으로 자유로워지고자 하는 존재는 있어도 타인에게 아름답게 보이고자 태어난 존재는 없다. 상품성은 시장이 부여하는 것일 뿐, 날 때부터 상품인 존재는 없다.
기대한 것을 보지 못하면 실망하고, 실망하면 화를 낸다. 특히나 화면을 걸친 일방적 대면은 화를 표출하기에 딱 좋다. 내가 원하는 것을 보여주지 않는다는 이유로 욕설을 배설한다. 상대와 관련 없는 일상의 감정쓰레기까지 배설한다. 그렇게 화면 속 대상은 짜증통이 된다. 자신을 보이고자 마음먹은 사람은 온 사회가 짜증으로 들끓는 와중에 딱 좋은 먹잇감이다. 사람은 자신이 원하는 것을 보지 못하면 누군가를 쉽게 공격한다. 하지만 나에게 친절한 것으로 가득 찬 세상은 공상 속에서만 가능한 일이다. 세상은 매끈하지 않다. 거칠고 불쾌한 면이 있다. 제거할 수 없으니 다시 바라보고 끌어안아야 살 수 있다. 나를 위해 대상을 바꾸려는 폭력적인 생각을 멈추어야 한다. 내가 보기에 좋았다는 것은, 나 때문에 누군가 무언가를 감추고 있다는 뜻이기도 하다. 나의 감각적 쾌락을 위해 자행하는 폭력적 검열을 멈추어야 한다. 생명을 누리는 자들은 자유롭게 살다 떠나야 한다. 누군가 보기에 좋았다고 말하기 위해 존재를 없애거나 억압해선 안 된다.
보지 않아야 믿을 수 있는 것이 있다. 확신은 보는 것으로 얻을 수 없다. 보는 것은 감각일 뿐이다. 확신을 주는 것은, 감각의 차원을 넘어선 영역인 믿음이다. 확신 또한 의지를 받치기 위한 도구일 뿐이다. 확신하는 것에 집착하여 생을 고단하게 할 필요 없다. 타인에 대한 믿음은 시간과 의지와 행동과 결과들이 모여 이야기를 이루면 솟는 것이다. 우리는 믿고 싶은 이야기 속에 사는 사람을 아름답다고 한다. 그들의 아름다움은 적나라하게 보지 않아도 느낄 수 있다. 오히려 관찰하는 시선은 그들의 자유를 억압하여 아름다움을 뿜어내지 못하게 할 것이다. 적당한 거리를 지킬 때 느껴질 아름다움이 있다. 보지 않아야 지켜질 것들이 있다.
진짜 본다는 것은 무엇일까? 본다는 것은 대상이 존재함을 인정하는 것이다. 만남의 시작은 바라봄이다. 찬찬히 바라보며 대상에게 몰입한 나, 오랜 시간 바라보면 다가갈 용기를 얻는다. 바라보고 있노라면 돌보고 싶어 진다. 시선에는 타인을 돌보게 하는 힘이 있다.
그래, 세상은 보기에 좋을 수만은 없다. 저마다 보고자 하는 것이 다르다. 타인이 보고자 하는 것이 선하고 아름답다면 기꺼이 보고 싶은 것을 보여줄 친절을 베풀 것이다. 나 또한 보고 싶은 세상이 있기에 그 간절함을 외면하지 않겠다. 내가 원하는 광경을 이번 생에 보지 못한다 해도 괜찮다. 보이지 않으면 상상할 수 있다. 시대가 이목을 집중시키는 것들인 돈, 쾌락, 상품, 경쟁 따위에서 시선을 돌리겠다. 내 시선이 폭력이 되지 않기 위해 노력하겠다. 보고 싶은 세상을 위해 눈을 감을 용기를 내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