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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노도 Sep 15. 2022

보이지 않는 것을 믿겠다

추접스러운 시대를 살아가는 방법 4

 살고자 하는 자에겐 이야기가 필요하다. 이야기 없이는 삶의 목적과 방법을 유추하지 못해 불안하다. 존재의 확신을 가지고 당차게 살아가려면 자신을 살게 하는 이야기가 필요하다. 한 사람을 살리는 이야기는 개인만의 비밀스러운 공상 일수도, 여러 사람들이 함께 믿는 종교 일수도, 사회적 합의를 이루는 보편적 도덕 일수도 있다. 여태껏 인류는 인간의 존엄성과 선과 악, 종교와 사랑과 경제와 예술 등 눈에 보이지 않는 이야기를 믿으며 발전해왔다. 그리고 지금도 이야기를 믿는 자들은 자신의 이야기가 진실임을 확인하기 위해 분투하며 살아가고 있다.


 보이지 않는 믿음은 보이는 것을 바꾼다. 법은 눈으로 보이지 않지만 사람들은 법을 지키며 살아간다. 법을 어기면 자유를 박탈당하고 사회와 물리적으로 고립된다. 보이지 않는 도덕과 종교와 사랑이 그렇게 지켜져 왔다. 보이지 않는 믿음들의 결과가 지금 세상의 꼴이다.


 시장은 이야기를 파괴하고 있다. 보이지 않는 이야기를 사장하고 보이는 물질만을 믿을 것을 강권하고 있다. 시간의 흐름에 따른 변화보다는 현재의 상태에 집중한다. 현재에 집중하니 당장의 짧고 감각적인 순간인 쾌락, 사진, 수치 등을 중시한다. %, +, -, 숫자 등을 내세워 신뢰성을 홍보한다. 원치 않는 일상으로 피로해진 상태로는 그런 것들을 믿는 편이 쉽다. 고민할 여력이 남아있지 않기 때문에 시장의 쏟아지는 상품들을 믿기로 한다. 눈에 보이는 것을 믿으면 덜 불안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지금의 세상을 가장 시끄럽게 하는 것은 돈의 이야기다. 생존을 위해 어쩔 수 없이 떠들어야 하지만, 그 위세가 과하다. 돈을 벌어 일상을 윤택하게 하는 것이 인간의 숙명이고, 많은 돈이 최고의 자유를 보장하리라는 통용된 이야기. 그런 이야기들은 탐욕을 미덕으로 둔갑시켜 부를 향한 욕망을 부추겼다. 하지만 자유는 본인의 마음에 달려있는 것이고, 소비하는 능력을 얻는 것만이 인간의 숙명이 아니다. 숙명은 스스로가 삶에 부여하는 뜻이고 자신이 택한 삶의 의미를 위해 분투해나가는 인간이 자유로운 인간이다. 돈을 외면하는 이야기는 대개 현실에 적용하기 힘드니 섣부른 조롱을 당한다. 존경할만한 이야기라도 이야기가 바라는 바를 실천하려는 사람은 드물다. 돈이 아닌 이야기를 순진하게 믿다가는 시장에서 외면당할 것이라는 두려움 때문이다. 


 그러나 돈의 이야기야 말로 믿을만한 이야기가 되지 못한다. 돈의 이야기는 희생양이 꼭 필요하다. 돈의 이야기 속에서는 더 많이 가지지 못한 자가 필히 패하기 때문이다. 돈의 이야기는 이익과 손해가 필요하고, 이익과 손해로 계산되는 수치에는 사람의 목숨 또한 포함된다. 돈의 이야기의 주인공은 돈이며 해피엔딩은 이익, 베드엔딩은 손해다. 이야기를 믿는 자는 베드엔딩이 되지 않기 위해 기꺼이 자신을 희생한다. 돈만 얻으면 자신이 믿는 이야기가 진실이라 외칠 수 있으므로. 인생의 원동력이던 이야기가 틀리지 않았음을 보이기 위해, 자신의 삶을 부정하지 않기 위해 기꺼이 자신을 이야기 속의 희생자로 만든다. 신념은 희생 앞에 냉정하다. 그래서 돈의 이야기는 절망적이다. 자신을 저버리고 구하는 것이 생명이 아닌 물질일 경우에 그 이야기 속의 비극은 희생이 아닌 버림, 즉 폐기일 뿐이다. 돈의 이야기에서 사람은 하나의 소비자일 뿐이기에 나의 존재는 언제든지 다른 소비자로 대체할 수 있기 때문이다. 돈의 세계에서 대체 불가능한 것이란 없다. 돈의 이야기는 유일한 주인공을 필요로 하지 않는다. 사람이 버림받지 않기 위해서는, 모든 존재들이 자신만의 이야기의 주인공으로 살아가기 위해서는, 모두가 편안히 존재하기 위해서는 다채로운 이야기들이 무수하게 필요하다. 이 시대는 돈의 이야기가 아닌 다른 이야기들이 필요하다. 세상에는 아무도 지지 않는 이야기들이 분명 존재한다. 그런 이야기를 지켜온 자들 덕분에 선한 이야기들은 돈의 이야기보다 훨씬 오래전부터 시작되어 지금까지 이어져오고 있다. 돈의 이야기는 지나치게 과장돼있고, 다른 다채로운 이야기들을 잠식하려 하고 있다. 이제 돈의 이야기는 멈추어도 충분하다.


 어떤 이야기를 믿어야 할까? 가장 좋은 이야기는 그 이야기가 진실이 아님이 밝혀졌을 때, 그 이야기 속에 살면서 시간을 보냈던 나를 책망하지 않을 수 있는가를 따져보면 된다. 인간이 희생양이 되는 이야기는 믿지 말자. 시간이 흐른 뒤에 이야기가 거짓으로 밝혀져도 후회 없을 행동을 하는 이야기, 더 이상 믿지 않아도 이야기의 한 일원으로 살았던 시간이 있어서 다행이라 말할 수 있는 이야기, 미련 없이 뭉클하게 추억할 수 있는 이야기를 믿어야 한다. 특히나 인간을 해치는 이야기는 믿어선 안 된다. 후회에는 타인을 해쳤던 것만큼 강렬한 것이 없다. 그 어떤 인간도 이야기를 위해 이용되어선 안 된다. 존엄함을 가진 자는 도구로 이용되지 않는다. 이야기의 흥과 망의 과정에서 개인을 책망하며 정신을 과거에 묶어 놓는 이야기는 좋은 이야기가 아니다. 정해진 시간을 살다 죽는 인간은 탄생과 소멸, 흐르는 시간에 대해 아무것도 확언할 수 없다. 이 점에 체념하지 말고 아무것도 모르기 때문에 가장 창조적일 수 있다는 명랑한 마음을 먹어야 한다. 확증이 없다 하여도, 믿음으로 인한 행동을 후회하지 않을 자신이 있는 선의 이야기를 믿고 뚜벅뚜벅 정진하는 것이다. 


 믿는다는 것은 행동의 이유를 아는 것이다. 믿음은 의지를, 의지는 행동을 부른다. 믿는 자는 진실을 확인하려 한다. 확인하려면 자신이 믿는 이야기의 주인공으로서 충실히 살아야만 한다. 기꺼이 자신의 삶의 시간을 할애하는 것이다. 이야기에 속할 때에는 원칙에 따라야 한다. 자신이 선택한 속박은 오히려 자유를 가져다준다. 인간은 원하는 대로 자신을 통제할 수 있을 때 자유롭기 때문이다. 그렇게 믿음은 행동의 원칙을 정하고 그 결과들로 일상이 구성된다. 내가 왜, 어떻게 행동할 것인지를 알고 통제하는 것은 사소한 불안을 가라앉힌다. 그래서 강한 믿음을 가진 자들의 마음은 평온하다.


 믿음에 증거는 없다. 어떤 종교, 이론, 이야기라도 인간과 우주의 존재 의미에 대해 완전히 설득시키지 못한다. 인간은 우주의 시작과 끝을 보지 못하기 때문이다. 그러기에 믿는 것은 힘겨운 일이다. 믿음은 눈에 보이지 않기 때문에 숭고하지만 잔인하다. 신념에 따라 행동하지 못하게 될 물리적 현상을 만났을 때, 이야기의 증거들을 발견할 수 없을 때, 이야기가 죄 없는 무언가를 희생양 삼아 힘을 얻고 있음을 알아차렸을 때, 이야기가 하찮아 보일 때, 더 이상 의지를 불러오지 않을 때 믿음은 반짝임을 잃고 만다. 한 순간에 허탈해지거나 맥을 놓을 수 있다. 심술궂은 침범에 공들여 세운 내 세상이 와르르 무너질 수 있다. 눈에 보이는 것은 파괴돼도 흔적을 남기지만, 눈에 보이지 않는 믿음은 사라져 버리면 어디서도 그 흔적을 찾아낼 수 없다. 그러기에 믿음은 허무와의 싸움이다. 마침내 그 체념의 순간이 다가오면, 절실히 붙들었던 믿음은 서러움이 되어 나를 괴롭힌다. 절망을 겪고 나면 이런 자포자기의 마음이 들어찬다. ‘나와 우주의 존재에 대해 어떤 믿음도 가지지 말자.’ 하지만 얼마 안 가 또다시 새로운 이야기를 찾아내고 믿는다. 인생을 사는 데는 아무것도 믿지 않는 쪽이 더 어렵기 때문이다. 아무것도 믿지 않으면 인생에 서사를 부여하지 않게 되니, 현재의 감각에만 반응하다 쏟아지는 자극들에 속수무책으로 범벅되고 만다. 그렇게 살아있지만 자유롭지 않은, 자극을 느끼고 반응하는 기계에 불과한, 죽음만이 해방시킬 수 있는 시간의 노예로 살아가게 된다. 어려운 만큼 지켜냈을 때 가치가 있는 법이다. 믿음이 무너져도 곧 다시 세울 수 있음을 알아야 한다. 그래야 믿음에 집착하지 않고 진실을 직시할 수 있다. 믿고, 정진하고, 주저앉고, 또다시 믿고 일어나는 것을 반복하다 보면, 중요한 것은 믿고 있는 이야기가 아닌 무엇인가를 믿는 자신임을 알 수 있다. 내가 보이지 않는 것을 믿고 행동할 수 있는 사람이라는 것을 안다면, 눈에 보이는 성과를 요구하며 사람에게 쓸모를 부여하려는 혼란한 세상의 협박에 겁먹지 않게 될 것이다. 결국 가장 온전하게 믿을 만한 것은 이야기가 아닌 무엇인가를 ‘믿을 수 있는 나’다. 그렇게 믿음으로써 강인해진다. 그러니 나는 믿겠다. 믿으면서 살아가겠다. 아주 다행인 점은, 이야기는 죽지 않는다는 것이다. 이야기를 지은 인간만 죽을 뿐이다. 그러니 이야기가 사라질까 두려워하지 말고 나의 이야기 안에서 명랑한 주인공으로 열심히 살아가자. 


 내가 믿는 이야기는 체념과 회피와 외면과 소멸과 망각의 이야기가 아니다. 존재를 없애는 허무의 이야기가 아니다. 못 보고 안 봤던 것들을 볼 수 있게 만드는 발견의 이야기다. 새로운 삶을 시작할 힘을 주는 창조의 이야기다. 선한 이야기를 믿으며 사는 사람들로 인해 세상은 모든 존재를 맞이하는 환대의 땅으로 가꾸어질 것이다. 나는 눈에 보이지 않는 것들을 믿는다. 세상이 점점 더 적나라해져도, 보이지 않는 것을 믿겠다. 그 믿음이 내 눈에 보이는 것을 바꾸게 하고, 한계를 부수고, 용기를 준다. 존재에 확신을 준다. 어릴 적 믿었던 달에 사는 토끼 이야기, 별에 사는 왕자 이야기, 우주를 누비는 신들의 이야기, 간절히 구하는 자에게 하늘이 내려준다는 신성한 능력의 이야기, 우주의 시작과 끝에 대한 비밀의 이야기들……. 그런 이야기들을 믿고 있노라면 외면하고 싶은 현실은 이야기에 꼭 필요한 조각이 되었고, 나는 시련을 겪는 중인 주인공이 되었다. 시간은 그저 증발할 뿐일 감각의 순간이 아니라, 서사의 일부가 되었다. 이야기는 이런 식으로 구하는 자에게 손을 내민다. 이야기의 품에서 고비의 순간들을 버티며 성장할 수 있었다.    


 누군가도 보이지 않는 것을 믿으며 살아가고 있다는 것을 안다. 선의 이야기를 들려주는 사람들, 자신의 이야기를 지키려 분투하는 사람들, 과거의 사람이 글로 전해준 이야기들이 알려주었다. 그렇게 힘을 얻는다. 얼마나 많은 이야기를 듣게 되고, 믿게 되고, 또 나만의 이야기를 지어갈까. 이야기들이 있기에 미래를 기대할 수 있다. 시간을 즐기는 자가 되는 것이다. 선한 의지들의 힘을, 후에 태어날 의지들을 믿겠다. 나와 닮은 존재가 외롭지 않도록, 나의 이야기들을 지키고 열심히 글을 써가는 것이 그에게 가닿을 방법이라 믿겠다. 의심치 않고 보이지 않는 것들을 믿겠다. 믿음으로써 상품이 되라는 시대의 요구를 거절하겠다.


 당신은 어떤 이야기를 믿고 살아가는가? 당신의 행동은 어떤 믿음으로부터 나왔는가? 보이지 않는 것들의 존재를 믿을 수 있는가? 삶을 지속하게 하는 믿음의 힘을 느끼고 있는가? 가장 중요한 것은 믿음이라는 능력을 가진 자신임을 알고 있는가? 믿음으로써 시대의 요구로부터 자신을 지킬 강인함이 있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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