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왜 이 글을 쓰는가
바람 부는 퇴근길, 흐린 하늘 아래 나는 멈춰 섰다. 어떻게 살아야 할지 모르겠다. 세상에 태어나 살아온 시간도 삼십 년이 다 되어 가는데, 내가 왜 살고 있는지에 대해서는 감도 잡히지 않는다. 스스로 삶을 끝내는 것이 두렵다면 그냥 그저 살아지는 대로 물렁하게 살면 될 것을, 또 그런 편안한 마음으로는 살아지지 않는 것이 요구 많은 이 시대다.
먹는 즐거움으로, 자식 앞길 위해, 여행하는 재미로, 취미생활의 기쁨으로 살아간다는 일상에서 마주친 사람들이 해주는 말, 또 핸드폰으로 들여다본 여기저기 잘난 사람들 이야기, 책 속에 빼곡히 적힌 지혜의 글들이 더 이상 내게 울림을 주지 않는다. 어쩌다 이렇게 얼이 빠져선 감흥 없는 좀비로 살아가게 되었을까?
어렸을 적엔 아마도 내가 가난한 탓이라고 생각했다. 내가 행복하지 않은 것은 원하는 상품과 서비스를 누리지 못해서이기 때문이라고, 노동에 시간을 많이 뺏겨서 자유롭지 못하기 때문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면 내가 돈을 많이 가지고 노동을 하지 않으면 행복할까? 잠시 일을 쉬어보고 소비도 많이 해봤다. 시간적 여유를 가지고 소비를 늘리는 와중에도 인생의 충만함은 느껴지지 않았다. 오히려 갖고 있는 시간과 돈이 소진되고 있다는 불안만 가중됐다. 내가 아주 많은 시간과 돈을 가졌대도 새침한 좀비의 상태로는 권태의 늪에서 허우적댔을 것이다. 현자들의 말처럼 행복은 물질에 있지 않았다. 물질은 쾌락을 줄 순 있지만 존재의 의미를 찾아주지는 않는다. 애초에 행복과 물질을 너무도 쉽게 연결하는 이 천박한 생각은 언제부터 내 머리에 둥지를 틀었을까?
보고 배운 성공의 길이 소비뿐이라 그렇다. 미디어는 떠든다. 경제적으로 우위를 점한 자들의 이야기를 쉬지 않고 들려준다. 내가 가지지 못한 것을 숨 쉬듯이 누리는 그들을 보며, 막대한 재산만 가지면 찬란한 삶을 누릴 수 있을 것만 같다. 관계, 재미, 여유, 만족 등 행복과 관련된 모든 요소가 돈만 있으면 딸려오는 패키지 선물과 같이 느껴진다. 일상 속의 사람들도 푸념하듯 떠든다. “돈이 짱이죠.” 그런데 그렇기만 하다면 아무래도 어리둥절해진다. 그들이 떠드는 대로만 산다면, 인간이 태어난 목적은 마치 하나의 충실한 소비자인 것만 같다. 소비자가 되지 않으면 폐기처분당해 세상과 유리되어야 하는 것만 같이 끔찍하게 느껴진다. 물질만능주의를 자중하자는 어른의 목소리는 들리지 않는다. 오히려 탐욕을 미덕으로 감싸주는 시대가 되었다. 나는 주변 어른들의 삶을 보고 자라며 돈을 바랐다. 돈에 대한 결핍은 애써 외면해도 매번 중요한 결정의 순간에 찾아와 삶을 흔든다. 우리 세대들의 삶을 보며 자란 우리의 다음 세대들 또한 돈과 애정을 갈구하며 클 것이라 예상한다. 성장에는 시장만 한 것이 없어 보이기에, 고삐 풀린 시장은 폭력적이고 무지성적인 방법으로 관계들을 파괴시켜왔다. 또 개인의 내면에 스며든 돈의 논리는 인간의 마음을 추접스럽게 변질시켰다. 지금 이 시대는 망가진 관계와 상처 입은 마음들을 감당할 사회적 자본이 부족하다. 그래서 멈추어야 한다.
아주 가끔 다른 빛깔의 삶들을 발견하곤 한다. 그들의 목소리는 아주 작지만 분명히 들릴 때가 있다. 그들은 사유의 단단한 뼈대가 느껴진다. 그들은 우아하게 경청하며 시끄럽지 않다. 그들은 은은하게 삶의 빛깔을 뿜어낸다. 평온한 태도는 보는 이를 안심하게 한다. 시대가 요구하는 경험, 능력, 효율, 긍정, 상품화, 착취 등의 인간상품화를 거부하고 존엄한 존재로 주체적으로 살아갈 방법을 고민하는 사람들이 있다. 일상에서 마주치는 작은 순간들에서 그들은 용기를 준다. ‘아, 그래. 이렇게 살 수도 있는 거야.’ 같은 하늘 아래서 일상을 버티며 살아가는 희망들이 있다. 삶의 의미가 소비와 쾌락만이 아니라는, 좀 더 숭고한 의미가 숨어있다고 말하는 살아있는 증거들이 있다.
내가 태어난 시대는 추접스럽다. 돈 때문이라면 사람이든 자연이든 멀건 눈으로 해쳐버린다. 나는 순응하지 않기로 한다. 자본주의 시대에 태어났다고 마음마저 돈을 따를 수는 없다. 분명 인간은 개인마다 고유한 삶의 의미가 있을 것이고, 나는 나만의 삶의 방식을 세우고 지켜나갈 수 있을 것이다. 인간의 마음에는 수치로 환산할 수 없는 에너지가 있다. 내가 느껴낸 반짝이는 순간들을 기억한다. 보이는 돈이 아닌 보이지 않는 의지들을 믿어보기로 한다. 개인마다 고유한 삶의 빛깔이 빛나고 태어난 어떤 것이든 환대받으며 자유롭게 세상을 누빌 날이 올 것이다.
왜 살아야 하는가? 내 고민의 끝이 체념으로 얼룩져 죽음만을 기다리는 좀비가 되긴 싫다. 분명 답이 있을 것이라 믿고 열심히 정진해나가겠다. 그 답을 모색하는 길의 채비 과정이 지금부터 써 내려갈 글이다. 삶의 목적인 ‘왜?’를 아직은 명확히 알 수 없다면 삶의 방법인 ‘어떻게?’에 먼저 답을 해보겠다. 짧은 생이었지만 내가 겪었던 세상의 어리둥절한 부분들을 짚어내고, 나를 지키고 성장시키는 방법들에 대해 글을 써나가겠다. 나를 반성하고 나아가게 하는 것에는 글만 한 것이 없었다. 글과 함께 성장하겠다. 멀고 지난해도 괜찮다. 태어날 세상을 택할 수는 없었지만 삶의 자세는 내 의지로 택해보겠다. 나만의 길이 있다는 것을 믿는 것만으로 괜찮다. 이번 생 안에 도착하지 않아도 괜찮다. 반성하고 고민하고 결심해서 정진하다 보면 길 위에서도 도착한 것과 같은 만족을 느낄 수 있을 것이다. 인생의 의미를 찾아 모험에 나서자.
시대가 바라는 한 명의 충실한 소비자로만 살아가지는 않겠다. 난데없이 던져진 이 세상에 적응하기 힘든 나를 위해 남은 날들을 살아갈 방법에 대해 고민하겠다. 어떻게 살 것인지 고민하다 보면 왜 사는지에 대한 힌트를 얻을 수 있을 것이란 기대도 해본다. 이 글을 통해 또 기대하는 것이 있다. 세대적으로도 경제적으로도 약자의 위치에 있는 나와 닮은 청년노동자들에게 시장논리를 벗어난 다른 삶을 향한 명랑한 의지의 글을 전하고 싶다. 나를 살게 하는 글이 누군가에게 기운을 전한다면 큰 기쁨이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