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접스러운 시대를 살아가는 방법 1
추접한 시대는 결국 웃음을 상품으로 전락시켰다. 웃음은 더 이상 드러나지 않고 보여주는 것이 되었다.
웃음을 포장지 삼아 삶을 홍보한다. 자신이 웃는 것을 더 많은 사람들이 봐야 한다는 듯이 웃고 있다. 어느 광고에나 인격을 가진 것들은 웃고 있다. 이때의 웃음은 찬란한 삶을 살고 있다는 증거인 듯 보는 자를 현혹한다. 웃음 짓는 자와 함께라면 저절로 삶이 쾌활해질 것이라 유혹한다. 그렇게 소비와 애정을 유도한다. 그러나 목적을 가진 웃음은 보는 이들의 삶을 나아지게 할 수 없다. 그것은 좋은 포장지로써의 쓰임을 다하면 그 어떤 감흥도 일으키지 못한다. 내 웃음을 남들에게 보이려 하는 것은 나의 삶을 상품화하려는 시도다. 보여주려고 웃지 않겠다는 것은 나의 감정을 상품화하지 않겠다는 존엄의 선언이다.
웃음은 삶을 드러내지 못한다. 타인의 삶을 느낄 수 있는 방법은 시간을 함께 나누는 것이다. 타인과 일상을 공유하면서 사건을 같이 마주할 때만이 타인의 태도, 감정, 의지 등을 느껴낼 수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나에게 주어진 삶의 시간에서 느껴낼 수 있는 타인의 삶은 아주 적다. 더 많은 타인의 삶을 알겠다는 듯이, 더 많은 사람에게 자신의 삶을 보이겠단 듯이 욕심을 내도 그것은 불가능하다. 만남은 무한하지도, 많지도 않기 때문이다. 만남이란 시간과 장소와 우연, 의지가 겹쳐져 일어나는 몇몇 개의 사건이다. 만나서 함께하지 않고는 삶을 느낄 수 없다. 찰나의 웃음으로 타인의 삶을 예단할 수 없다.
웃음은 모든 것을 긍정한다. 긍정하는 대상에는 한계가 없다. 그래서 웃음은 위로가 될 수도, 폭력이 될 수도 있다. 일상 속에서 섣부른 농담에 웃어낼 때가 많다. 그러나 나의 웃음이 무엇을 긍정하고 있는지, 무엇을 해하고 있는지를 고민해보아야 한다. 모든 행동이 돌이킬 수 없기는 마찬가지지만, 그중에서도 타인에게 상처를 내는 일은 완전히 속죄할 수 없다. 유쾌함의 유혹에 이끌려 사리 판별을 하지 않고 웃음이 먼저 나가서는 안 된다.
웃음은 지금 이 상태가 괜찮다는 메시지를 던진다. 웃음 후에 변화가 있을지 없을지는 모르지만, 웃는 그 순간만큼은 현재의 상태에 대해 안심하게 한다. 그러나 현재가 고통스러운 자들에게 그 안심은 변화를 늦추는 올가미일 뿐이다. 분노와 체념, 증오와 억울함이 들끓는 시대에 많이 웃는다는 것은 부끄러운 일이다.
관계의 종류와 수가 늘어난 만큼 억지로 웃는 비극도 늘어나고 있다. 권력이 그 주범이다. 돈이든 애정이든 받아야 사는 자는 주는 자에게 비굴할 수밖에 없다. 받는 자는 원하는 것을 주는 자에게 당신을 공격하지 않음, 당신을 긍정함, 당신에게 이익을 안겨다 줄 수 있음, 즉 당신에게 무해함을 적극적으로 표현해야 한다. 그 가장 쉬운 방법이 웃음을 보이는 일이다. 웃음을 많이 보여야 하는 사람일수록 약할 확률이 높다. 그래서 자신을 상품화하고 있는 사람은 웃음을 많이 보인다. 지금처럼 주고받을 것이 많아진 사회에서 웃음은 온전한 충만함이나 즐거움으로만 지어지지 않는다. 더 많은 웃음이 지어질수록 슬퍼지고 있는 시대다.
아무나 웃을 수 있지만 아무나 웃지 않을 수는 없다. 긍정적인 것에 매몰되어 부정적인 것을 배척하는 요즘 사회는 웃지 않는 상태를 부정적인 것으로 여긴다. 사람들은 웃지 않는 사람과 같이 있는 것을 불안해하고 관계에서 소외시킨다. 살아남기 위해 웃는 것이 최선의 전략일 때가 많다. 드물지만 웃지 않는 용기를 가진 사람들이 있다. 웃음으로써 자신에게 이득이 생기거나, 관계의 위협으로부터 방어할 수 있다는 것을 알아도 꿋꿋이 웃지 않는 자들이 있다. 그 웃음에 누군가를 향한 차별과 조롱이 담겨있을 때, 그 웃음이 악한 권력을 옹호하기 위함일 때, 같이 웃음으로써 부조리의 동지가 될 때, 자신의 웃음이 누군가를 아프게 할 수 있음을 알 때 웃지 않는 자들이 있다. 그들은 웃으라는 시대의 압박을 견딜 줄 아는 강인한 자들이다. 그들은 다수의 우매함을 알아차리는 현명한 자들이다. 그들은 도덕에 대해 고민하는 엄격한 자들이다. 그들은 웃음이 찌를 누군가를 배려하는 섬세한 자들이다. 그들은 웃음의 결과를 책임지고자 하는 성숙한 자들이다. 그들은 웃음의 주체가 자신임을 깨달은 자들이다.
자신만을 위해 웃는 사람은 가증스럽다. 웃음 뒤에 애정이 따라오는 것은 자연스럽지만, 애정을 바라고 웃는 것은 거북스럽다. 아이가 서툰 짓을 하면 사랑스럽다 여기지만, 성인이 유아적 행동을 하면 민망스럽게 여기는 것과 비슷하다. 애정은 갈구하는 자를 농락한다. 그러므로 웃음을 이용해 애정을 얻으려 하는 것은 그 수가 읽히는 순간 실패한다. 웃음은 자신에게 떳떳하게 지어질 때 타인에게 그 즐거움이 전달된다. 전달된 즐거움으로 인해 타인은 활기를 얻는다. 관계 속에서 짓는 진실한 웃음은 타인의 존재를 응원할 수 있으므로 이타적이다. 이타적인 것은 대체로 사랑스럽다.
소리 내는 웃음은 넘치지만 은은한 미소는 사라지고 있다. 웃음소리는 같이 웃지 않는 자들에겐 소음이다. 웃음소리로 인해 웃는 자를 보고 있지 않아도 누군가 웃고 있음을 알아챌 수 있다. 그에 비해 미소는 전파력이 약하다. 미소는 소음을 만들 수 없다. 미소는 바라보는 자에게만 흔적을 남긴다. 타인의 미소를 인지하는 일은 타인과 같은 공간에 있으면서 미소 짓는 순간을 바라보고 있어야만 가능하기 때문이다. 얼굴이란 대지에 막을 수 없는 빛처럼 펼쳐지는 온화한 미소. 그것은 존재의 황홀함에서 우러나오는 반응이다. 언제부터 지어졌는지 자각하지 못할 미소는 올라간 입꼬리와 내려가 눈꼬리로 평온함을 전달한다. 미소는 보는 이에게 대가 없는 평안을 선물한다. 불안으로 인간을 자극하고 소음이 넘쳐나는 시대에서 고요한 미소를 간직한 이를 바라볼 수 있는 기회는 적다.
웃음은 행복의 유일한 증거가 아니다. 표정은 삶의 만족과 별개의 것이다. 삶의 만족은 혼돈의 세상 속에서 자신의 존재를 인정하고 신념을 지켜나갈 때 발생하는 것이다. 자신만의 삶을 살아가는 과정에서 비치는 낯빛이 어떤 이는 고단해 보일 것이고, 어떤 이는 평온해 보일 것이고, 어떤 이는 명랑해 보일 것이다. 한 사람은 유일한 존재이기 때문에 삶의 빛깔은 저마다 다르다. 내 삶의 빛깔을 알아채는 사람은 나와 시간을 함께 나누는 사람들이다. 시간을 함께 보낸 자들에게 구태여 나의 삶을, 존재의 만족을 순간의 표정으로 설명하려 들지 않아도 된다. 나의 선택과 변화를 지켜봐 온 자들은 순간의 표정을 기준 삼아 나의 삶을 평가하지 않는다. 그들은 시간의 흐름에 따른 변화로 나를 느껴내기 때문이다. 순간의 웃음으로 얼굴을 장식하지 않아도 원하는 삶의 빛깔을 타인에게 뿜어낼 수 있다. 그러니 한 사람이 웃지 않는다고 그가 삶의 자부심이 없다거나 행복하지 않다는 것이 아니다. 행복은 본인의 신념과 그에 따른 실천으로 만들어진다. 웃음과는 무관한 것이다.
웃음으로 나아가고자 하는 곳은 어디인가? 어떤 삶을 살고 있기에 지금 웃고 있는가? 내 웃음을 어떤 이들에게 보이고 싶은가? 내 웃음이 어떤 이들에게 위로가 되고 어떤 이들에게 폭력이 되는가? 진정 나의 의지로 웃고 있는가? 웃음을 강요당하거나 강요하고 있지는 않는가? 웃음에 조바심내고 있지는 않는가? 혼자서도 웃을 수 있는가?
보여주기 위해 진심이 담기지 않은 채로 웃지 않겠다. 웃지 않아야 할 때를 배워가겠다. 내가 웃지 않음으로써 힘을 얻을 사람이 있다는 것을 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