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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노도 Sep 01. 2022

할 수 있다고 하지 않겠다

추접스러운 시대를 살아가는 방법 2

 할 수 있다고 해야만 하는가? 이 시대는 모든 것을 해낼 수 있을 것처럼 만들어 하지 않았음에 죄책감을 가지게 한다. 무엇이든 하지 않는 인간을 한심해한다. 당신에 대한 세상의 대우가 형편없다면, 그 이유는 당신이 할 수 있는 것을 하지 않았기 때문이라 말한다. 모든 일을 할 수 있는 개인의 탓으로 돌려 세상의 대우를 정당화한다. 사람들은 할 수 없음으로 인해 좌절하는 것이 아니라 할 수 있음으로 인해 지쳐 체념한다. 우리는 응당 그래야만 하는 것처럼 하지 않았음에 대한 세상의 처분을 고분고분 받아들인다. 그러나 세상은 처형장이 아니다. 인간은 형벌을 결정받기 위해 태어난 죄수가 아니다. 무엇인가를 할 수 있으면, 안 할 수도 있어야 한다. 그리고 그것을 선택할 자유는 스스로에게 있다. 


 1)초인들의 시끄러운 소음. 미디어는 신체리듬과 심리적 안정의 균형을 무시하고 보편적 일상을 뛰어넘은 소수의 초인적 성공담으로 대중을 자극한다. 그리고 초인을 따라 할 수 있는 가능성이 누구에게나 같은 것처럼, 어쩌면 초인보다 당신이 더 나은 형편에 있는 것처럼 속삭여 도전을 유도한다. 그 이야기들은 신선한 영감과 응원 등의 달콤한 껍데기로 코팅되어 있다. 그러나 시간이 흐른 뒤 껍데기가 녹고 나서 드러나는 알맹이는 불안이다. 성공담을 마주한 자들은 저 사람이 해냈으니 나도 해낼 수 있다는 용기를 얻는다. 곧 자신의 일상을 수정하여 목표에 도달하기 위해 우악스럽게 자신을 단련한다. 급격히 틀어진 일상은 피로를 쌓아 의지를 무너뜨린다. 피로에 시달린 인간은 곧 초인 따라 하기를 멈춘다. 멈춰야 살 수 있기 때문이다. 행동을 멈추어도 욕망은 줄어들지 않는다. 다른 사람은 해냈는데 나는 해내지 않았다는 죄책감으로 스스로를 공격한다. 그 와중에도 미디어는 초인들을 또 다른 스타로 대체하고 성공담을 조금씩 변주하여 끊임없이 제공한다. 쏟아지는 성공담에 자극받아 가만히 있으면 도태된다는 불안감으로 또 다른 도전을 시작하고, 비슷한 실패를 반복한다. 반복된 실패 후에는 스스로를 체념하여 자기 비하나 망상에 빠진다. 자신을 미워하는 것에 지치면 초인들을 미워하기도 한다. 여유를 가졌다면 내지 않았을 상처를 떠안고 살아가게 된다. 상처 입은 이들에게 세상의 대우는 더욱 모질어진다. 범상치 않은 능력을 발휘한 소수가 인정받는 일은 세상 곳곳에서 일어난다. 그 성공담들은 흥미를 자극하고 감동을 유발한다. 범상치 않은 능력을 발휘하여 인정받는 것은 개인의 욕망과 주변의 환경이 조화를 이룰 때 일어나는 일이다. 모두가 그런 경험을 쌓아야 하는 것은 아니다. 그리고 중요한 것은 자신과 그들을 비교할 필요가 없다. 공연을 생각해보라. 관객으로서의 우리는 감동적인 무대에 박수를 보내지 뜬금없이 배우와 자신을 비교하려 들며 무대에 난입하지는 않는다. 자신의 욕망을 세상에 실현시킨 초인의 삶은 비교의 대상이 아니라 감탄의 대상이다. 미디어의 부추김에 현혹되어 초인과의 쓸데없는 경쟁과 모방을 반복하며 스스로를 소진해선 안 된다. 인간들의 우열을 가리려는 미디어에서 멀어져 건강한 일상을 무너뜨리는 자해를 멈추어야 한다. 


  미디어는 유능한 엿장수처럼 혼을 쏙 빼놓는다. 화려하게 치장한 진로들을 제시하며 당신도 할 수 있다고 유혹한다. 더 나아가 유행하는 진로를 따라가지 않는 것은 인생의 손해라고 부드럽게 협박한다. 협박의 용어로는 기회, 도전, 희망, 가능성, 극복 등이 사용된다. 아무것도 하지 않는 인간은 미디어에 노출시키지 않는다. 미디어의 목적은 소비이기 때문이다. 미디어는 사람들의 우열을 가리고, 우위에 놓인 소수에 대한 동경을 심어 활동하는 인간을 만들려 한다. 비교를 통해 움직이며 소비하는 인간을 만든다. 소수를 향한 동경에서 이것저것 준비물을 구입하고, 시험에 뛰어들어 경쟁을 과열시키고, 노력하다 지치면 스트레스를 해소할 오락거리를 찾고, 다음 꿈으로 갈아타기 위한 정보 수집을 하는 성실한 소비자를 양산한다. 소비의 반복 끝에 남는 것은 환희도 사회적 경탄도 아닌 체념과 나태, 귀찮음, 무기력이다. 미디어의 부추김에 휘청거리다 보면 고요하고, 사색적이고, 행동하지 않는, 소비력이 없는, 있는 듯 없는 듯 잔잔히 존재하는 평온한 사람이 되기 힘들다. 아무것도 하지 않지만 단단해서 흔들리지 않는 돌 같은 사람이 되기 힘들다. 도전하는 것만이 긍정적 인생인 듯 강요하며, 잔잔한 일상을 고요히 운용하는 것은 지루한 것으로 치부한다. 미디어는 꿈을 전시하고 대중들은 쇼핑하듯 타인의 욕망을 욕망한다. 욕심내지 않아도 될 것에 욕심을 내니 지나치게 많이 행동하고 배운다. 그러는 사이 미디어가 원하는 얼빠진 소비자로 변해간다. 


 욕망이 나쁜 것이 아니다. 다듬어진 욕망을 다수에게 강요하는 것이 나쁜 것이다. 개인들은 저마다 부여할 삶의 의미가 다르고, 그것은 선택이다. 욕망은 다채로운 관계를 만들고 개인의 삶에 고유한 특성을 칠한다. 소비를 위한 욕망만이 권해져서는 안 된다. 소비하지 않는 개인을 불안하게 해서는 안 된다. 삶의 예술적 시도들을 짓밟아선 안 된다. 삶의 개척자들을 겁박해선 안 된다. 


 도대체 언제까지 얼마나 해야 하는가? 할 수 있다는 가능성은 인간의 여유와 전쟁을 시작해 안식을 쓰러뜨리고 이제는 의식주마저 위협하며 개성을 전멸시키려 하고 있다. 거세게 몰아치는 할 수 있음의 가능성은 성과를 내지 않는 인간을 소외시켜 소리 없이 소각시키고 있다. 한병철 선생은 2)『피로사회』에서 긍정성의 과잉과 ‘할 수 있음’이 불러오는 소진, 우울, 주의력결핍과잉행동장애 등 현대인의 신경증적 병리 현상에 대해 지적한 바 있다. 우리는 성과를 내야 한다는 불안에 떤다. 끊임없이 무엇인가 할 수 있음을, 또 하기를 바라는 세상의 기대 때문이다. 기대에 부응해야 보상받는 교육으로 범벅된 채 자란 세대는 기대를 저버리거나 기대 자체를 문제시하는 것을 어려워한다. 칭찬에 범벅된 채로 자라다보면 부정적 평가를 기피하게 된다. 그 영향으로 세상이 바라는 인간상에 자신을 끼워 넣기 시작한다. 누가 만들고, 왜 입어야 하는지도 모르는 채로 맞지 않는 옷에 몸을 욱여넣고 있다. 자본주의 사회는 시장 발전을 위해 인간이 계속해서 성과를 내기 바란다. 우리에게 할 수 있음은 기회가 아닌 강요가 되었고, 자유가 아닌 채찍이 되었다. 우리는 할 수 있다는 메시지에 지나치게 노출되어 끌려 다닌 결과, 보지 않고 듣지 않고 말하지 않고 움직이지 않는 법을, 행동하지 않고 멈추는 법을 잊어가고 있다. 스스로가 무엇을 얼마나 어떻게 할 것인지 한계를 정하지 못하고 움직이는 사이에, 몸과 마음은 버티다 못해 삐거덕거리며 망가지고 있다. 아무도 정도를 알려주지 않는다면 스스로 자신을 돌보며 정해야 한다. 한계를 무시한 채 허둥지둥 쫓아가다 보면 건강한 육신과 맑은 정신은 떨어져 나가고 퀭한 눈만 남게 될 것이다.  


 누구에게나 기회는 있다는 말은 틀리다. 개인마다 능력과 의지의 정도, 환경의 상태가 다르니 가능성이란 누군가에겐 충분하고 누군가에겐 희박하다. 그러나 할 수 있다는 메시지는 개개인의 건강, 환경, 자산, 심리 등을 고려하지 않고 무차별적으로 퍼부어진다. 넌 충분히 할 수 있다고, 가능성은 충분하다고 주입한다. 왜 틀린 걸 알면서도 믿게 만드는가? 이 메시지로 인해 불특정 다수들은 스스로 질 좋은 노동자가 되기 위해 노력하기 때문이다. 사회적 투자를 하지 않아도 스스로 배우고 경험하여 질 좋은 노동력을 갖춘다. 노동자가 스스로를 희생하여 투자비용을 줄이기 때문에 노동시장을 매끄럽게 돌아가게 한다. 자신에게 기회와 성공의 가능성이 많다고 믿는 사람일수록 삶은 만족의 순간보다 더 많은 의무의 시간으로 채워진다. 


 할 수 있다고 쉴 틈 없이 사람들을 상기시킨 결과 우리는 쓸데없이 많은 질병을 얻었다. 스스로를 착취하면 감당할 수 없는 피로를 지고 살아야 하고, 착취하지 않으면 낙오될 수 있다는 불안감에 시달리게 된다. 스스로를 학대하는 삶은 문화에 뿌리 깊게 박혀 자기착취를 멈출 수 없게 되었다. 착취의 상흔은 다음 세대들에게 더 큰 공포감을 전한다. 이제 이 상처를 회복하려면 ‘할 수 있다.’라는 말을 한 세월보다 더 길고 더 많이, ‘하지 않아도 돼.’라는 말을 쏟아내야 할 것이다. 그래도 자신을 상품화하려는 사람들을 말리는 일은 험난한 여정이 될 것이다. 인간착취의 세뇌를 퍼뜨리는 사람이 되어선 안 된다. 더 나아가 소중한 사람을 착취의 굴레에서 해방시키고자 노력해야 한다. 소중한 사람에게 선택지를 제시하는 대신 그에게 요구된 시험지를 대담하게 찢어버릴 수 있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 할 수 있음을 상기시켜 착취를 부추기는 푼수데기는 되지 말아야 한다. 


 하지 않으면 폐기될 것 같은 두려움에서 벗어나야 한다. 스스로 체념하지 않는다면, 아무도 나를 폐기할 수 없다. 누군가에게 폭력이 되지 않는다면 인간은 한껏 나태해도 된다. 인간이 여유로울 수 있는 삶의 조건들은 이미 마련된 세상이다. 인간의 존엄성을 보장할 수 있는 기술과 자본과 문화가 있으니 안심하고 아무것도 하지 않아도 좋다. 두려움이라는 야비한 기생충이 나를 갉아먹을 수 없도록 충분한 휴식으로 몸과 정신을 튼튼히 돌봐야 한다. 나약한 몸과 정신은 함정에 빠지기 쉽다. 인간에게서 쓸모를 찾으려는, 인간에게 용도를 부여하려는 음흉한 주술에 걸려들지 않아야 한다. 인간은 존재 자체로 기쁨이다. 인간은 물건처럼 용도를 정할 수 없고, 버릴 수도 없다. 한 인간을 버릴 수 있는 것은 자아라는 작은 우주의 주인, 자신만이 할 수 있다. 나는 나만이 벌하고 반성할 수 있다. 내가 아닌 어떤 것에 나를 부술 망치를 쥐여 주어선 안 된다. 그것은 한 우주를 포기하는 일이다.  


 하지 않는 삶은 체념과 다르다. 하지 않는 삶은 퇴행과 다르다. 인간의 삶은 허락된 시간이 짧아 모든 것을 경험할 수 없다. 지금은 얕은 경험을 쌓아 수치화하는 것을 권하는 사회다. 그것을 경력이라 부르며 사람들의 시간을 저당 잡는다. 아무 행동도 하지 않는 것을 나태하다 낙인찍어 멈춤의 진가를 가린다. 경험을 강요하는 사회에서 하지 않음은 조바심을 진정시키는 일이다. 소음들을 물리치고 내면의 고요 속으로 빠지는 것, 움직임을 멈추고 숨을 깊게 순환하여 신체를 구석구석 돌보는 것, 허겁지겁 허둥지둥 대던 일상을 멈추고 충분한 휴식을 취하는 것, 자신의 선택을 의심하는 것 등은 반성할 시간을 선물한다. 반성은 지혜를 불러온다. 지혜는 용기를 불러온다. 용기는 변화를 불러온다. 세상의 선호와는 동떨어질 수 있지만 고유한 나이기에 편안하고 당당한 자태로 변화한다. 즐거운 낙오자가 되는 것이다. 내가 보인 낙오의 용기는 타인의 소진을 막을 수 있을 것이다. 인간은 경험하는 기계가 아니다. 인간은 행동하기 위해 태어난 것이 아니다. 인간은 사유하는 생명들을 세상에 이어지게 하는 자들이다. 인간은 모호해서 다채롭고 복잡해서 신비로운 삶들을 이어지게 하는 자들이다. 그러니 삶을 이어가기 위해 사유가 필요하다면 멈추어 주저앉을 결심이 필요하고, 휴식이 필요하다면 눈을 감고 드러누울 당당함이 필요하다. 그래야 체념하지 않고 씩씩하게 살아갈 수 있다. 용기를 내야 움직이는 기계가 아닌 멈출 수 있는 인간으로 살 수 있다.  


 ‘할 수 있다’ 이전에 ‘하고 싶다’가 있어야 한다. 욕망하는 것이 있어야 포기하지 않고 움직일 수 있다. 상품처럼 사달라고 조르는 경험들에서 눈을 거두어 자신이 무엇을 행하고 무엇을 행하지 않을지 차분히 선택해야 한다. 무엇에 자극을 받고 무엇을 원해야 할까? 가장 쉽게 답을 찾는 방법은 다수로 포장된 상품의 이야기가 아닌 진실로 자신의 이야기를 하는 모험가를 만나는 것이다. 다수의 이야기는 늘 늦고, 지고, 바래서 폭력적이기까지 하다. 인류는 시간의 흐름에 따라 새로운 빛깔의 삶을 탄생시키고, 새로운 것은 늘 소수로 시작하기 때문이다. 미디어가 우상화하는 인간이 아닌, 언제나 시끌벅적하고 친절하고 매끈한 스타들이 아닌, 아무도 치켜세우지 않고 정적을 품은, 까칠하고 삶의 굴곡이 거친 사람의 이야기를 들어봐야 한다. 그 이야기는 이질성으로 나의 감각을 깨우고 새로움으로 내게 영감을 줄 것이다. 영감은 욕망을 만들고, 욕망으로 인해 나는 진정 하고 싶은 일을 할 수 있을 것이다. 


 할 수 있다고 하지 않겠다. ‘할 수 있다’는 것을 ‘해야 한다’로 오도하지 않겠다. 할 수 있음을 상기시키는 사람이 되지 않겠다. 과열된 조바심을 가라앉히는 침착한 상냥함을 건네겠다. 나도 당신도 아무것도 하지 않아도 괜찮다.



1)니체의 초인 개념과 다르다. 이 글에서의 초인은 보통 사람들과 비교해 뛰어난 능력을 발휘한 사람을 뜻한다. 

2)한병철, 2012, 피로사회, 문학과지성사. 현대 자본주의 사회에서 물리적 외압 없이 이루어지는 자발적 자기착취와 그 영향에 대해 저술한 책이다. 시대의 정곡을 찌르는 문장들이 많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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