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쾅!"
주차장에 소형차가 한대 들어오더니 운전석에서 내린 남자가 신경질적으로 차문을 세게 닫았다. 이에 질세라 조수석에서 내린 여자도 차가 흔들릴 정도로 문을 닫고는 앞 타이어를 살짝 발로 차며 말했다.
"에잇, 똥차! 남들처럼 외제차는 못 탈망정 이게 뭐람."
"지금 뭐라고 그랬어요 당신?"
"그렇잖아요. 신우, 신아 그리고 뱃속에 요놈까지 이제 식구가 다섯 명인데 이런 코딱지만 한 차로 어디 마음 놓고 가겠냐고요!"
"꼭 말을 그렇게 해야겠어? 바쁜데 겨우 시간 내서 몇 시간째 운전만 하고 온 사람한테?"
뒷좌석에서 내린 남매가 부모님의 말다툼을 지켜보고 서 있었다. 시무룩한 표정을 짓고 있는 남매 중의 오빠는 올해 열두 살인 신우다. 며칠 전 학교에서 가족여행 감상문 숙제를 받았을 때 신우의 표정도 지금과 같았다. 항상 회사일로 바쁜 아빠와 몇 달 뒤면 태어날 동생 때문에 신경이 예민한 엄마는 요즘 들어 자주 다투셨다. 가끔 언성이 높아지는 날이면 신우는 울먹거리는 여동생 신아를 방에 데리고 들어와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아직 한 번도 가보지 못한 바다에 관한 이야기였다. 주로 텔레비전이나 책에서 본 바다의 모습에 신우의 상상력이 더해져 이야기가 만들어졌다. 오빠의 이야기를 듣던 신아는 어느새 잠에 빠져들곤 했다. 신우는 바다에 꼭 한번 가보고 싶었다. 끝없이 푸른 바다. 생각만 해도 가슴이 설레었다. 하지만 부모님이 데려가 주실지 걱정부터 들었다.
어느 날 저녁을 먹고 나서 신우는 용기를 내어 부모님께 숙제에 대해 말씀드렸다. 바다에 다녀오는 것이 숙제라고 말한 신우는 부모님의 눈치를 살폈다. 예상외로 아빠는 시간을 내보겠다고 말씀하셨고, 엄마도 신우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주말에 가보자고 했다. 신우는 너무 기뻐 거실에서 폴짝폴짝 뛰며 소리를 질렀고 신아도 덩달아 오빠를 쫓아 뛰어다녔다. 그렇게 주말이 왔고 가족은 신우가 여행 장소로 정한 포항의 호미곶으로 출발했다. 새벽부터 짐을 싸서 출발했지만 처음 와보는 길에 장거리 운전이라 아빠는 몇 번씩이나 길을 잘못 들었고 즉시 엄마의 잔소리가 터져 나왔다. 또다시 시작된 부모님의 말다툼이 호미곶에 도착한 뒤에도 이어지고 있는 것이었다.
"오빠, 오빠!"
신아가 신우의 점퍼 소매를 잡고 흔들었다.
"오빠, 저기 저거 오빠가 얘기해준 그 커다란 손 아니야?"
신아가 가리키는 쪽으로 고개를 돌린 신우는 언젠가 텔레비전에서 봤던 조각상이 눈앞에 있는 것을 보고는 가슴이 뛰기 시작했다. 빨리 가서 구경하고 싶은 마음에 부모님의 말다툼이 얼른 끝났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오빠, 저기 가보면 안 될까? 가보자 오빠, 응?"
신아가 졸라대기 시작했다.
"저기... 엄마, 아빠. 저희 먼저 구경하러 가도 돼요?"
그동안 쌓였던 불만들을 이번 기회에 다 쏟아내기로 결심한 듯 보이는 엄마가 신우를 보며 말했다.
"엄마가 보이는 곳에서만 구경하고 있어. 그래서, 당신이 요즘 집안 돌아가는데 신경을 제대로 썼냐고요!"
"내가 다른 거 하느라고 신경을 못썼어? 나 없으면 우리 식구들 입에 들어가는 건 누가 책임지는데?!"
신아는 벌써 조각상이 있는 광장으로 뛰어가고 있었다.
"신아야! 오빠랑 같이 가야지!"
신우도 신아를 따라 뛰었다. 조각상이 가까워질수록 바다와도 가까워졌다. 하늘과 바다의 경계를 모를 정도로 모든 것이 푸르렀다. 조각상의 이름은 상생의 손이었다. 손은 광장에 하나, 그리고 바다에도 하나가 있어 두 손이 마주 보고 있는 모양이었다. 마치 두 손이 하늘을 떠받치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거대한 조각상을 마주한 신우는 감탄이 절로 나왔다.
길었던 겨울이 지나고 따뜻한 봄날이 시작된 탓인지 나들이 나온 사람들로 광장은 북적이고 있었다. 조각상에서 눈길을 뗀 신우는 순간적으로 시야에서 신아를 놓치고 말았다.
"오빠! 여기야 여기!"
신아의 목소리가 들리는 곳을 쳐다보니 바다에 있는 조각상을 바라보는 목 좋은 곳에 국화빵을 파는 트럭이 보였다. 신아는 트럭 앞에 서서 오빠를 부르고 있었다. 신우가 다가가자 신아는 국화빵을 사달라며 조르기 시작했다. 신우는 주머니를 뒤져 오백원짜리 동전을 하나 찾았다.
"아저씨, 국화빵 하나에 얼마예요?"
"하나에 삼백원, 두 개에 오백원에 주마."
신우는 아저씨에게 동전을 건네고는 국화빵 두 개를 받아 하나는 신아에게 주었다. 맛있는 향기가 몸속까지 따뜻하게 만들어주는 것 같았다.
"동생이 참 예쁘게 생겼구나. 포항엔 처음이니?"
"네, 서울에서 가족끼리 여행 왔어요."
"그렇구나, 국화빵 맛있게 먹고 재미있게 놀다 가거라."
"네, 감사합니다."
아저씨에게 인사를 하고 신아를 보니 벌써 국화빵을 다 먹은 뒤였다. 아직 점심을 먹지 않아 배가 고픈 모양이었다.
"뜨거운데 천천히 먹어야지. 오빠 것도 줄까?"
"응! 신아 배고파."
신아는 신우와 다섯 살 터울이었다. 오빠를 항상 잘 따르는 신아가 귀여워 신우는 무엇이든 챙겨주곤 했다. 나머지 국화빵도 신아에게 준 신우는 신아의 손을 잡고 바닷가 쪽으로 걸어가 적당한 곳에 걸터앉았다. 태어나서 처음 보는 바다. 푸른색과 흰색이 섞인 파도가 넘실거리는 동해바다가 눈앞에 펼쳐져 있다는 사실이 믿어지지가 않았다. 바다는 정말 넓고 하늘은 그런 바다마저 감싸고도 끝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더욱 넓었다. 바다 구경을 하고 있자니 따사로운 봄 햇살에 몸속에 남아있던 추위가 녹아내리는 것 같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