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우가 눈을 뜨자 여전히 거북이 등껍질 위에 있는 자신과 공주를 발견할 수 있었다. 공주는 다행히 팔에서 흐르던 피가 멈추고 깊은 잠에 빠져든 것 같아 보였다. 거대한 거북은 유유히 헤엄을 치고 있었다. 약간 기운이 생긴 신우가 등껍질의 앞부분으로 기어가 거북에게 말을 걸었다.
“저기 실례합니다.”
“오호 이제 정신이 좀 드니?”
“네, 구해주셔서 감사해요. 용궁으로 가시는 길인 가요?”
“그렇단다. 용궁에 내 오랜 친구가 있거든. 그 친구에게 볼일이 있어서 가는 길이란다. 너희도 용궁에 가는 길이니?”
“네, 이 친구가 용궁에 살고 있거든요. 얼른 가서 치료를 받아야 할 것 같아요.”
“그렇구나. 이거 내가 좀 더 속도를 내야겠는데, 허허허. 사실 난 나이가 많아서 더 힘을 낼 수가 없구나. 아마 이번 여행이 내 마지막 여행이 되겠지, 허허허.”
신우의 눈에 거북의 눈가에 깊게 파인 굵은 주름이 들어왔다.
“만나러 가신다는 친구 분은 어떤 분이세요?”
“난 이웃 나라의 남쪽 끝에 있는 섬에서 살고 있단다. 그곳은 수온이 따뜻해서 나와 같은 붉은거북들이 살기엔 딱 좋은 곳이야. 먼 옛날에 동해에서 거북이 한 마리가 여행을 왔더구나. 동해의 용궁에서 일한다는 거북이었지. 우리에게 많은 것을 알려주고 떠났어. 그때까지 우린 바다의 질서가 없었단다. 그 친구가 다녀간 뒤로 많은 것이 변했어. 서로 싸우는 일도 없고, 평화로운 바다가 되었지. 지금도 그 친구를 기억하는 바다 식구들이 많단다. 항상 그리워하고 있어. 그런데 얼마 전에 내 손주의, 손주의, 손주의 손주던가? 몇 번째 손주인지 기억도 안 나는구나. 아무튼 그 꼬맹이가 어른들의 눈을 피해 땅에 나갔다가 뭘 주워왔더구나. 동해를 오가는 갈매기들이 쉬어가는 섬이었다는데... 난 그것이 무엇인지 한눈에 알아볼 수 있었어. 지금 만나러 가는 친구가 예전에 말해줬던 물건이었거든. 참으로 소중한 물건이라고 말했었지. 난 그 물건을 돌려줘야 한다고 생각했고, 그래서 길을 떠난 거야. 옛 친구도 볼 겸 말이지, 허허허.”
신우는 붉은거북의 흐뭇한 표정을 보며 참으로 깊은 우정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때 멀리서 은은한 빛을 내뿜고 있는 용궁의 벽이 보였다.
“다 온 것 같아요!”
신우가 소리쳤다.
“저기가 동해의 용궁이니? 내가 살고 있는 바다의 용궁과 비슷하게 생겼구나.”
거대한 붉은거북이 용궁의 입구로 다가오자 놀라 긴장한 새우의 등이 꼿꼿이 펴졌다. 하지만 거북의 등껍질에 의식을 잃은 채 잠들어있는 공주를 발견하고는 다급하게 소리쳤다.
“공주님이시다! 문을 열어라!”
용궁의 입구가 열리자 용궁의 대신들과 궁녀들이 모두 마중 나와 공주를 반겼다. 공주가 사라져서 다들 걱정을 했던 눈치였다. 붉은거북은 천천히 궁궐 광장에 멈춰 섰고, 신우가 먼저 등껍질 위에서 뛰어내렸다.
“공주님이 다치셨어요! 어서 치료를 해야 해요!”
신우의 말에 놀란 궁녀들이 공주를 가마에 실어 궁궐 안으로 들어갔다. 항상 공주를 따라다니던 사람만 한 바닷가재는 원망스러운 눈빛으로 신우를 노려보고는 공주를 따라 궁궐로 들어갔다. 몇 안 되는 나머지 구경꾼들도 사라지고 이제 광장에는 신우와 붉은거북만 남아 있었다. 신우는 고맙다는 인사를 전하러 붉은거북에게 다가갔다. 붉은거북은 몹시 지친 모습으로 신우를 바라봤다.
“괜찮으세요? 많이 힘들어 보이세요. 친구분은 어디 계세요? 제가 불러 드릴게요.”
“아니다. 됐다 얘야. 이제 더는 힘이 없구나. 내 부탁 좀 들어주겠니? 여기 내 목에 걸린 목걸이를 좀 풀어다오.”
신우는 붉은거북의 목에 가까이 다가갔다. 그러자 등껍질 위에 있을 때는 보이지 않았던 목걸이가 눈에 들어왔다. 번쩍이는 황금으로 만들어진 목걸이였다. 신우는 조심스럽게 목걸이를 풀어냈다.
“우리 같은 거북들은 등껍질 속으로 목을 집어넣지 못한단다. 난 그게 마음에 들지 않았어. 위험한 순간에도 몸을 숨길 수가 없었거든. 그런데 난생처음으로 그것이 자랑스럽구나. 덕분에 친구의 소중한 물건을 무사히 가져올 수가 있었으니까 말이야. 그 목걸이를 내 친구에게 전해주겠니?”
붉은거북은 간신히 숨을 토해내며 말을 끝냈다.
“괜찮으세요? 목걸이는 제가 대신 전해드릴 테니 걱정 마세요. 그런데 누구한테 전해드리면 되죠?”
신우가 물었지만 붉은거북은 대답이 없었다. 신우가 붉은거북의 앞쪽으로 다가가자 편안히 눈을 감은 붉은거북의 얼굴이 보였다. 신우는 존경스러운 표정으로 붉은거북의 지친 얼굴을 쓰다듬었다. 그리고는 손에 쥔 목걸이를 들어 올렸다. 그러자 목걸이의 장식이 신우의 눈에 들어왔다. 황금색 번개였다. 신우는 붉은거북의 대답을 듣지 않아도 그 목걸이가 전해져야 할 친구가 누구인지 알 수 있었다. 신우의 얼굴에서 뜨거운 눈물이 흘러내렸다.
“언니! 괜찮아?”
신아가 공주의 침대 옆에서 울먹이고 있었다. 신우도 그 옆에 서서 공주를 바라보고 있었다. 힘겹게 눈을 뜬 공주가 신우와 신아를 번갈아 보며 희미하게 미소 지었다.
“난 정말 용왕님의 번개를 찾고 싶었어. 이제 희망이 사라진 기분이야.”
“용왕님의 번개는 용궁으로 돌아왔어요 언니!”
“뭐라고?!”
신아의 말에 놀란 공주가 침대에서 벌떡 일어나자 궁녀들이 다급히 공주를 다시 침대에 눕혔다. 신우는 차분하게 공주가 잠이 들었던 시간 동안 일어난 일들을 설명했다. 이야기를 모두 들은 공주의 눈에서 한줄기 눈물이 흘러내렸다.
“아버지는 처음 용왕에 오르시자마자 거북 대신을 이웃 나라의 바다로 보내셨어. 이웃 나라와 교류하고 친목을 다지는 일이 세상 모든 바다를 평화롭게 만드는 일에 가장 우선이 된다고 생각하셨기 때문이야. 당시 대부분의 대신들이 아버지의 의견에 반대했어. 이웃 나라의 용궁과 사이가 좋지 않아 자칫하면 다툼이 일어날 수 있다고 생각했거든. 하지만 거북 대신만이 아버지의 의견에 따랐고 자진해서 길을 떠났던 거야. 그 외교의 결과가 지금 이렇게 돌아오다니...”
공주는 기쁨을 감추지 못했다. 신우와 신아도 공주의 모습에 마음이 흐뭇해지고 있었다.
“이러고 있을 것이 아니라 얼른 아버지를 뵈어야겠어.”
공주는 궁녀들의 부축을 받으며 방을 나서 동쪽 별채로 향했다. 공주가 떠나자 방에 남아있던 바닷가재가 말했다.
“오늘이 축제의 마지막 날입니다. 이제 집으로 돌아가실 시간입니다.”
신우와 신아는 가재를 따라 궁궐을 걸어 나갔다. 몇몇 궁녀들이 따라왔다. 짧은 시간이었지만 어느새 용궁에 정이 들었다는 생각에 섭섭한 기분이 들었다.
“신아야, 오빠가 말도 안 하고 가서 섭섭했지? 미안해.”
“아니야 오빠. 궁녀 언니들이랑 맛있는 것도 많이 먹고 술래잡기도 했는걸.”
신아의 옆에서 어린 궁녀 한 명이 소매로 눈물을 훔치며 따라오고 있었다. 신우의 눈에 궁녀의 머리에 꽂혀 있는 신아의 꽃 모양 핀을 보였다. 신아의 머리에는 진주 모양의 머리핀이 있었다.
“신아야, 엄마 아빠께 무슨 이야기를 해드리고 싶니?”
“음... 이것저것 다! 신아가 다 말해줄 거야! 히히.”
‘엄마 아빠께서 과연 우리말을 믿으실까?’
신우는 신아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궁궐을 뒤돌아봤다. 공주에게 작별 인사를 못하고 가는 것이 못내 아쉬웠다. 입구를 지나자 새우들이 허리를 구부려 인사를 해주었다. 용궁을 둘러싼 벽의 빛은 한층 더 밝아져 있었고, 금이 갔던 부분은 말끔하게 메워진 상태였다. 멀리 바다생물들이 덕지덕지 붙어 오래된 폐차처럼 보이는 버스가 한대 보였다. 하지만 버스가 기지개를 켜자 붙어있던 따개비 따위가 깨끗하게 떨어져 나가고 신우와 신아가 타고 왔던 노란 미니버스의 모습으로 돌아왔다.
“오빠 그 버스야!”
“그래, 이제 정말 돌아가는구나.”
신아는 엄마 아빠를 볼 생각에 벌써 신이 난 모양이었다. 신우도 부모님이 빨리 보고 싶었지만 아쉬운 마음에 자꾸만 걸음이 느려지고 있었다.
“얘들아, 잠깐만! 거기 서!”
신우와 신아가 뒤돌아보니 공주가 궁녀들의 부축을 받으며 뛰어오고 있었다.
“인사도 안 하고 갈거니? 그럼 내가 너무 미안하잖아...”
가쁜 숨을 몰아 쉬며 공주가 말했다. 신우는 자신과 신아를 배웅하려 아픈 몸을 이끌고 나와준 공주가 고마웠다.
“아버지가 눈에 띄게 건강해지셨어. 이게 다 용왕님의 번개가 제자리로 돌아왔기 때문이야.”
“다행이다!”
신우는 정말 잘됐다고 생각했다.
“건강이 다 회복되시면 동해 곳곳을 방문하시면서 흐트러졌던 질서를 바로잡을 계획이셔. 나도 함께 갈 생각이야. 내가 어른이 되면 아버지의 자리를 물려받아야 할 테니까. 그렇지만 내년 축제 때는 용궁에 있을 거야. 저기... 내년에도 놀러 오지 않을래?”
신우가 대답하기 전에 신아가 먼저 대답했다.
“네! 신아는 내년에 또 올래요!”
모두가 웃음을 터뜨렸다. 그때 신우와 신아를 태우고 갈 노란 미니버스가 출발 준비를 마쳤다는 신호로 경적을 크게 울렸다.
“이제 가볼게.”
신우가 공주를 바라보며 말했다.
“뭐 잊은 거 없니?”
공주가 익살스러운 표정으로 말했다.
“멀미약 말이야!”
신우는 그제야 용궁으로 올 때 심한 멀미에 시달렸던 기억이 떠올랐다. 공주는 신우와 신아에게 새끼손톱 만한 동그란 알약을 하나씩 주었다.
“바다에서 나는 해초로 만든 멀미약이야. 이걸 먹으면 편안하게 돌아갈 수 있을 거야. 그리고 이거.”
공주가 신우의 목에 목걸이 하나를 걸어주었다. 용왕님의 번개와 똑같이 생겼지만 그보다 훨씬 작은 장식이 달린 목걸이였다.
“진짜 용왕님의 번개는 아니지만 돌아가서도 이 목걸이를 볼 때마다 용궁에서의 추억을 떠올려주길 바라.”
버스의 경적이 또 한 번 울렸다. 이제 정말 가야 할 시간이었다. 신우와 신아는 알약을 꿀꺽 삼키고는 버스에 올라탔다. 버스기사도 멀미약을 먹고 있었다. 의자에 앉아 차창 밖으로 공주와 신하들이 손을 흔들며 인사하고 있는 것을 보자 아쉬움의 눈물이 흘러내리기 시작했다. 버스의 안내방송이 흘러나왔다.
“버스가 곧 출발하오니 승객 여러분은 자리에 앉아 벨트를 착용해주시기 바랍니다.”
그러자 초록색 벨트가 뻗어 나와 온 몸을 휘감았다.
‘이제 정말 돌아가는구나. 모두들 고마웠어요. 안녕!”
“부르릉!”
버스는 시동이 걸리자마자 있던 자리에서 뱅글뱅글 돌면서 수면으로 올라가기 시작했다. 이번에는 멀미약 때문인지 하나도 어지럽지 않았다. 옆자리에 앉은 신아는 벌써 잠이 들어 오빠의 어깨에 머리를 기대어왔다. 점점 멀어지는 용궁을 바라보며 신우도 서서히 잠에 빠져들었다.
‘벌써 도착한 건가?’
따뜻한 기운이 온몸을 감싸는 느낌에 신우는 살짝 실눈을 떴다. 옆을 보니 신아가 여전히 어깨에 기대 잠들어 있었다. 그때 누군가 신우의 머리를 콩! 하고 세게 쥐어박았다.
“아야!”
신우는 너무 아파서 앉은자리에서 일어나 펄쩍 뛰었다.
“엄마가 볼 수 있는 데서 놀고 있으라고 했지! 어쩜 그렇게 말을 안 듣니? 누가 아빠 아들 아니랄까 봐.”
“거기서 왜 또 날 걸고넘어져?”
아빠가 머쓱한 표정으로 잠든 신아를 안아 올리고 있었다.
“아빠... 엄마...!”
신우가 울먹거리는 목소리로 외치며 엄마 품에 안겼다.
“아니 얘가 왜 이래. 혼날까 봐 미리 이러는 거지? 안 속는다, 요놈!”
엄마가 신우의 머리가 헝클어지도록 쓰다듬었다. 신우는 엄마, 아빠를 보자 자신이 꿈을 꾼 건지 헷갈리기 시작했다. 그때 잠에서 깨어난 신아가 용궁에서 겪은 일을 말하기 시작했다.
“엄마, 아빠. 신아랑 오빠랑 용궁에 가서 맛있는 거 많이 먹고 왔어. 막 상어도 보고, 오징어도 보고... 또... 또...”
신우가 깜짝 놀란 표정으로 여동생을 쳐다봤다.
‘꿈이 아니었구나!’
“우리 신아 그새 꿈꿨구나.”
아빠가 신아의 볼을 잡아당기며 말했다.
“꿈꾼 거 아닌데. 신아가 본 건데...”
신아가 심통이 나서 말하자 아빠가 신아를 달래주었다.
“어이구 우리 신아. 재미있었어? 우리 이제 구경 좀 하러 가자. 저기 조각상 앞에 가서 신우 숙제에 붙일 사진도 찍고 말이야.”
신우의 가족들은 사진을 찍기 위해 바다에 있는 상생의 손이 잘 보이는 곳으로 갔다. 아빠는 사진을 찍어줄 사람이 마땅히 없자 근처에 있던 국화빵 트럭으로 가 주인아저씨한테 사진을 부탁했다. 아저씨가 트럭에서 내려와 신우의 가족이 있는 곳으로 왔다.
‘우리를 못 알아보시네. 내가 정말 꿈을 꾼 건가….”
신우는 무덤덤한 국화빵 아저씨를 보자 용궁에 갔던 것이 꿈이라는 생각에 확신이 들었다.
“자, 찍습니다. 하나, 둘, 셋!”
“찰칵!”
아빠가 사진기를 받으러 아저씨에게 뛰어갔다.
“감사합니다!”
“잘 나왔나 모르겠네요.”
아빠가 폴라로이드 필름을 흔들자 사진이 뚜렷해졌다. 엄마랑 신아가 사진을 보고는 즐거워했다.
“우리 신아가 제일 잘 나왔네!”
신우도 사진을 구경했다. 사진을 보던 신우의 표정이 갑자기 밝아졌다. 신우는 가만히 가슴에 손을 얹어 보았다. 금속의 차가움이 느껴졌다. 손으로 꽉 쥐어보았다. 금세 따뜻해지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신우가 국화빵 아저씨를 바라보자 아저씨가 살짝 눈웃음을 지어 보였다. 신우의 얼굴에도 미소가 떠올랐다. 신우는 뒤돌아 서서 드넓은 동해를 바라보며 소리쳤다.
“엄마! 아빠! 우리 내년에 또 놀러 와요!”
신우의 목소리가 바람에 실려 바다 저 멀리 퍼져나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