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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백서 May 11. 2019

'오이디푸스 왕'과 영화 '용서받지 못한 자'

비극이란,


 인간은 한계에 부딪혀 고통과 슬픔에 마주하였을 때, 자신의 정신적 크기를 가늠할 수 있다. 이때 인간은 고뇌하고 그로써 성장한다. 하지만 이러한 일련의 과정은 직접적인 경험만을 통해 얻을 수 있는 것은 아니다.

 비극적 요소를 담은 작품. 즉, 비극을 감상함으로써 간접적인 경험이 가능하다. 작품을 감상한다는 것은 외부의 산물을 개인적인 시각으로 풀어내면서 이입하고, 감내하며 내면의 세계를 확장해 나간다. 바로 여기에 비극의 가치가 있다. 마치 비 온 뒤 땅이 굳는 것처럼 우리는 비극을 통해 스스로 생채기를 내고 회복하는 과정을 반복하며 자아를 단련시킨다. 즉, 비극을 이용한 간접 경험으로 내면의 성장을 꾀한다는 것이다.  

    

 비극(悲劇)은 본래 인생의 슬픔과 비참함을 제재로 하고 주인공의 파멸, 패배, 죽음 따위의 불행한 결말을 갖는 극 형식을 일컫는 말이지만, 통용되는 의미로는 문학·영화 등 다양한 작품의 형식으로 승화시킨다. 또한, 이로써 다시금 문화를 형성한다. 이러한 비극의 서사는 극의 형식을 넘어 인간의 존재론적 물음을 던지기 위해 필수 불가결한 요소이다. 나에 대한 물음을 끊임없이 던지는 인간에게는 더없이 필요한 존재이다.


 특히, 비극의 정석이라 일컬어지는 ‘오이디푸스 왕’은 어머니와의 근친상간 관계, 인간의 존재론적 물음을 던지는 스핑크스, 오만과 착오라는 오이디푸스의 하마르티아(결함) 등의 수많은 장치적 요소들을 통해서 독자들을 비극의 낭떠러지로 내몬다. 이러한 서사를 통해 독자는 성숙해진다. 오이디푸스 왕은 현재까지도 많은 작품을 통해 재구성되며, 영감을 주는 존재이다. 이는 비극의 본질적 가치를 방증하는 바이기도 하다.     


 따라서, 현대의 작품 중 ‘오이디푸스 왕’과 같은 비극적 요소와 서사를 가진 작품. 즉, 패러디(parody)한 작품을 택해 비교하고 분석해보고자 한다. 이는 현대의 작품으로서 고전 비극과의 물리적·심리적 간극을 해소하여 ‘오이디푸스 왕’ 작품으로서 해소되지 않은 의구심을 푸는데에 목적이 있다. 이로써, 고대 작품이 현대까지 회자되는 이유를 찾고 필자가 느낀 점을 정리해보고자 한다.    

 


 이를 위해 필자가 선택한 패러디 작품은 영화 ‘용서받지 못한 자’이다. 이 작품은 2005년에 개봉한 작품으로서 군대에서 쉽게 적응하지 못하는 한국의 남성상을 다룬 영화이다. 이 영화에는 군대라는 특수한 장소이자 상황, 그 속에서의 계급 관계, 동성애라는 금기시된 관계 등 다양한 장치로서 비극을 다룬다.

    

 이렇게 익숙한 듯 낯선 비극적 서사는 작품 그 자체를 넘어 사회의 일원으로서, 방관에 일조하는 관객에게 한 번 더 물음을 던진다. 지금껏 무심코 지나쳤던 순간의 짧은 소식들은 누군가의 생명이었다는 것을 상기시키며, 실제로 현대에 범람하는 비극의 인용을 통해 한층 더 심도 있는 이입이 가능하다. 또한, 한국인만이 겪을 수 있는 군대라는 배경은 익숙한 단어이지만 동시에 미경험자에게는 미지의 세계이기도 하다. 이러한 양면적인 특성을 가진 ‘군대’라는 배경을 비극적 요소로 사용함에 따라 사회 혹은 개인에게 어떠한 영향을 끼치는지 다시 한번 생각해볼 만하다.     


 따라서 원작 ‘오이스푸스 왕’과 패러디 ‘용서받지 못한 자’의 상관관계를 파악함으로써 원작의 비극으로서의 가치를 되새겨본다. 또, 고전과 현대의 심리적·물리적 거리감을 좁혀 ‘오이디푸스 왕’에서 얻지 못했던 하마르티아(결함)의 모순적 딜레마에 관한 답을 찾아내고자 한다.     





 먼저, 오이디푸스 왕은 ‘비극의 대명사’라 말할 수 있으며, 후에 많은 작품에 영감을 주었다.줄거리를 간단히 살펴보면 이렇다.

 테베의 왕자 ‘오이디푸스’는 장성해 아버지를 죽이고 왕위를 위태롭게 할 것이라는 신탁을 받는다. 그리하여 그는 버림을 받게 된다. 오이디푸스는 그의 신탁을 알고 있었다. 하지만 그는 테베로 향하는 도중 노인을 죽이게 된다. 이 노인은 그의 아버지이자 테베의 왕 ‘라이오스’였다. 신탁을 알았음에도 결국 그대로 행해지고 만 것이다. 그 여정 속 스핑크스를 만나게 되는데 길목에 맞아 수수께끼를 내어 풀지 못하면 죽이는 것이 그의 역할이었다. 스핑크스는 오이디푸스에게 ‘아침에는 네발, 낮에는 두발, 저녁에는 세 발로 걷는 동물이 무슨 동물이지?’라는 수수께끼를 내었고, 그는 ‘인간’이라는 답을 통해 죽음을 면할 수 있었다. 그는 스핑크스의 질문에 정답을 맞힌 최초의 인물이 되었고, 스핑크스는 스스로 목숨을 끊는다. 이를 통해 오이디푸스는 테베의 왕으로 군림하게 되고, 선 왕비 ‘이오카스테’ 즉, 자신의 어머니의 남편이 된다. 후에 테베에는 역질과 기근이 들어 신탁을 듣자 그 원인은 자신에게 있다는 오이디푸스는 이를 책임지기 위해 스스로 눈을 멀게 한다.

 요약된 줄거리만 보아도 신탁, 운명, 아버지를 죽이는 오이디푸스, 어머니와의 관계성 등 다양한 비극적 요소를 담고 있는 것을 알 수 있다.     


 이렇게 극단적이고 비극적인 서사를 다룬 ‘오이디푸스 왕’은 어떠한 시대적 배경 속에 탄생한 것일까. 작가 소포클레스가 살던 시대는 페르시아 전쟁 승리 후 번영하기 시작했던 시기이다. 자유로운 토론의 장이 형성되고 이를 통해 자신의 의견을 주장하는 것이 자연스러운 시기였다. 이러한 자유로운 사고는 작품에도 그대로 드러난다. 이성을 중시하는 인본주의적 민주주의 시대적 영향이 드러나는 것을 볼 수 있다.    


 


 

 다음은 비교할 패러디 작품 ‘용서받지 못한 자’이다. 실제 이 영화가 오이디푸스 왕을 모티브로 했다는 근거는 없지만, 개인적으로 느꼈던 공통적인 비극적 서사와 장치를 통해 비교해보고자 한다. 이 작품은 군대를 배경으로 이루어지는 비극적 서사를 담고 있다. 간단한 내용을 살펴보자면 이렇다.

 주인공 ‘이승영’은 명문대 대학생의 신분을 뒤로한 채 군대에 입대한다. 부대에서는 중학교 동창이었던 ‘유태정’ 병장을 같은 부대 선임으로 만나게 된다. 분대 내 실세인 그는 공포의 대상으로 여겨졌다. 같은 부대에서 재회하게 되자 유태정은 반가운 마음에 챙겨준다. 둘은 잘 지내지만, 이승영은 군대 내 위계질서, 폭력에 대해 좋지 않은 인식을 가지고 있고, 부대 내에서도 계급을 넘어 문제를 제기하는 행동을 일삼았다. 그러던 와중 이승영 아래 허지훈 신병이 전입해 오는데, 이승영은 그를 챙겨주면서도 선임 행세를 하며 혼란스러워한다. 이때 분대 말년병장 수동은 신병 허지훈을 괴롭히는데, 이병 이승영이 병장의 행동을 부당하다며 이를 문제 삼는다. 이 사건으로 이승영은 몸싸움이 벌어지고, 선임들에게 미운털이 박히게 된다. 이러한 사건이 반복되자, 유태정은 이승영에게 폭력적 행위를 가한다. 유태정은 미안한 마음에 감싸지만, 그 와중에 제대를 한다. 이승영과 허지훈은 군내 소외된 채로 고문관으로 전락한다. 이승영은 자신을 감싸주던 유태정이 없는 군대에 적응하기 위해 변하기 시작한다. 적응하기 어려웠던 만큼 똑같은 폭력을 되풀이하지 않겠노라 다짐하지만, 결국 허지훈에게 폭력을 가하며 변해버린 자신의 모습에 혼란스러워 한다. 군대란 곳의 특이성을 다시금 깨달으며, 유태정이란 존재의 크기를 다시 가늠한다. 하지만, 그것을 깨달았을 때에는 허지훈은 이미 스스로 목숨을 끊은 뒤였다. 이 자책감으로 탈영을 한 이승영은 유태정을 찾아가게 되는데 태정에게 육체적인 요구를 하고, 태정은 승영으로 인해 여자 친구와의 다툼으로 괴로워한다. 이때 자책감을 견디지 못한 이승영이 자살을 하게 된다. 유태정은 이승영의 자살 원인을 자신에게 찾으며 자책한 채로 영화는 마무리 짓게 된다.


 용서받지 못한 자는 한국의 특수한 비극적 서사를 담고 있다. 군대라는 배경, 동성애, 자살 등의 장치를 통해 극단적이지만 익숙한 감정을 끌어낸다. 이 작품의 시대적 배경은 거시적으로 보면 한국의 국가적 배경, 미시적으로 보면 감독 개인적 배경으로 볼 수 있겠다. 한국은 마지막 분단국가로서 휴전인 상태이다. 따라서 징병제를 행하고 있어 20대 한국 남자들은 입대하는 것이 관례이다.


 감독의 개인적인 배경을 살펴보면 제대 후 군대 생각을 많이 했다고 하는데 군대로서 끝나지 않은 개인적 삶의 연장 선상에 대해 이야기를 담고 싶었다고 한다. 군대에 가기 이전에 느꼈던 한국 사회의 여러 가지 모순들, 의문들이 군대를 다녀오면서 이해가 됐다고 한다. 한국 사회의 한 단면을 보여주는 것이며 인간의 본성과 사회적인 거대 개념이 영향을 끼치는 그사이의 사람, 접점에 대해 말하고 싶었다고 한다. 따라서, 감독은 주인공 ‘이승영’에 투영됐다고 볼 수 있다.     



 이 두 작품을 비교해보았을 때, 파멸로 이르는 비극적 서사의 흐름은 유사하다. 또한, 이루어질 수 없는 금기시된 사랑과 스스로 행하는 주인공의 파괴적 행위 등의 공통점을 찾을 수 있다. ‘오이디푸스 왕’과 ‘용서받지 못한 자’. 두 작품의 공통점과 차이점을 짚어보고 비극의 의미를 다시 되짚어보고자 한다.  

   

 먼저, 첫 번째로 다룰 것은 주인공이다. 오이디푸스 왕에게서의 ‘오이디푸스’, 용서받지 못한 자에서의 ‘이승영’이란 인물의 공통점이다. 오이디푸스는 모두가 풀지 못한 스핑크스의 수수께끼를 풀 정도로 영리하다. 하지만, 자신의 신탁을 무시한 채 행하는 오만함 또한 가지고 있다. ‘이승영’이란 인물 또한 비슷하다. 명문대생인 그는 자신만의 정의와 신념을 주장할 수 있는 용기를 가지고 있는 인물이다. 동시에 계급 사회라는 군대의 특수한 상황에서도 굴복하지 않는 것은 일종의 ‘오만함’이라고 평가될 수 있다. 이러한 영리하고 용기 있는 기질, 동시에 자기기만을 통한 오만함은 공통점이라 할 수 있겠다.


 다음으로 다룰 것은 장치적 요소이다. 금기시된 사랑과 신탁이라는 운명적 굴레 등 오이디푸스 왕에 나타난 다양한 비극적 장치들을 용서받지 못한 자에 대입해 비교해본다.

 그중 먼저 주인공과 주변인의 관계를 파악해 보면, 오이디푸스는 아버지‘라이오스’와 어머니‘이오카스테’의 관계로 이루어지며 가족으로서의 필연성을 띤다. 반면 용서받지 못한 자의 경우, 병장‘유태정’과 주인공이자 이병 계급인 ‘이승영’, 그리고 그의 후임 ‘허지훈’이 있다. 이들은 군대라는 배경이라는 계급 사회를 통해 관계의 필연성을 부여한다.


 또한, 이러한 관계의 필연성은 운명적 굴레를 암시한다. 오이디푸스에서는 신탁이라는 운명적 굴레가 지워진다. 자신의 아버지를 죽이고, 어머니를 사랑하게 될 것이라는 비극. 용서받지 못한 자에서는 군대 내 폭력이나 자살 행위, 또한 범죄로 취급되는 동성애가 운명적 굴레로 작용하며, 이들의 관계는 금기시되었다는 점에서 동일하다.


 인간에 대한 존재론적 의구심을 던지는 과정은 표면적으론 다르지만 두 작품 모두 서사에 포함되어 있다. 오이디푸스는 스핑크스의 질문에 대한 답을 찾고, 용서받지 못한 자에서는 군대라는 특수한 상황 속에서 권력이나 규범 그리고 그로 인해 행해지는 관례와 폭력성에 대해 끊임없는 의구심을 표현한다. 이 의구심을 해소하는 데에 차이점이 두드러지는데 오이디푸스는 답을 통해 테베의 왕이 되지만, 이승영은 군대에 적응하면서 결국 자신의 신념을 버리고 굴복하게 된다. 이로 인해 혼란스러운 이승영은 ‘자살’이라는 자기 파괴적 행위를 통해 해소한다. 스스로 눈을 멀게 하는 오이디푸스의 행위 또한 의구심을 폭력적 행위를 통해 해결하려 한다는 성격에서 유사점은 찾을 수 있다.      


 이처럼 전반적인 서사의 비극적 흐름이나 장치적 요소에서는 많은 유사점을 찾을 수 있다. 그렇다면 두 작품의 차이점을 다시 짚어보도록 한다. 일단, 용서받지 못한 자에서의 군대란 배경은 다양한 특수성을 부여한다. 현대에 계급 사회로서 관계의 필연성, 허용되지 않는 동성애는 금기시된 관계로 치환된다. 개인의 근원적 물음을 무시한 채 자살이라는 파괴적 행위가 지속적으로 나타나는 이 ‘군대’라는 특수한 배경은 현재에도 일어나는 비극적 상황이다.      


  또한, 유태정이라는 인물의 역할이 두드러진다. 부대 내에선 후임이자 중학교 동창인 이승영과의 관계는 운명적 굴레를 지워주는데 그를 챙겨줌으로써 비극이 시작되기 때문이다. 동시에 이 유태정이라는 인물의 권력 하에 이승영은 허울뿐인 정의를 내세울 수 있었다. 즉, 오만할 수 있었단 얘기이다. 따라서, 유태정은 이승영에게 신탁이자 오만함을 자극하는 양면적 역할을 수행한다. 이러한 입체적인 관계성은 비극의 모순을 한층 더 깊게 생성한다.     



 심리적·물리적 거리감에도 불구하고 고전 비극은 여전히 많은 사람에게 깊은 울림을 주고 있다. 이는 시대가 변모하여도 변하지 않는 인간의 속성을 시사하는 바이며, 비극으로서 성숙하고자 하는 모습을 다시금 발견할 수 있었다. 또한, 이러한 비극적 서사를 구성하는 많은 장치적 요소들은 표면적으론 다르지만 결국 그 본질은 같은 흐름을 하는 특성을 보인다.


 오이디푸스의 하마르티아는 여전히 의견이 갈리고 있는데 크게 오이디푸스의 오만한 성격적 결함과 벗어날 수 없는 운명적 결함으로 나뉜다. 나는 이에 대한 의구심을 용서받지 못한 자를 통해 실마리를 얻었다. 이 작품에서는 결국 용서하는 자도, 용서받는 자도 없었다. 즉. 완전한 주체와 객체는 존재할 수 없으며, 서로의 상관관계는 모순으로서 허물어지는 경계 속 빠져나올 수 없는 딜레마를 형성한다. 이 관계의 모순성은 결국 오이디푸스의 성격 또한 운명적 결함의 한 요소일 뿐이며 운명 그 자체는 헤어나올 수 없다는 모순점을 시사하는 바이다.      


 이 두 작품을 비교하면서 안타까웠던 점은 고대에서의 비극적 장치가 현대의 군대라는 배경을 통해 구현된다는 점이다. 현재에도 많은 이들이 필연적으로 겪는 비극이 말이다. 필자는 직접 겪어보지 못했지만, 숱하게 스쳐 지나간 짤막한 뉴스들은 누군가의 목숨이었음을 다시금 상기시킨다. 또한, 작가의 인터뷰를 보면 ‘군대 체계를 벗어나는 방법도 죽음이라는 전형적인 방법을 택했다.’고 하는데 이는 단순한 작품의 비극적 장치가 아닌, 현실에서도 일어나는 일임이 너무나 안타까웠다. 이로써, 누군가의 아픔에 조금이나마 공감하는 데에 작품의 의의를 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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