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을 시작하기에 앞서 나는 맹목적인 미신 신봉자는 아니라는 점을 밝히고 싶다. 사주와 신점을 이야기하며 미신 신봉자는 아니라니 이게 무슨 궤변인가 싶을 수 있으나, 적어도 나에게는 이러한 행위가 일종의 상담에 가깝다고 생각한다. 그저 때때로 삶의 궤도를 이탈하고 있지는 않은지 의문이 들거나 흔들릴 때, 사주나 신점을 통해 잘 살아가고 있다고 위안을 받는 것이다.
# 투쟁의 역사
어머니는 싫어하시겠지만 이렇게 생각하게 된 데에는 어머니의 영향을 많이 받았다. 부모님 세대에는 안 힘든 사람이 없었다더니, 어머니 역시 갖은 풍파를 겪으셨다고 한다. 형제 중 가장 재주가 많고 학구열이 강했지만 삼촌들의 학업을 위해 본인의 학업은 미뤄야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배워야 한다는 학구열은 사그라들지 않아 자그마치 1년을 투쟁하여 고등학교 진학을 성취해냈다.
그렇게 겨우 졸업했는데 하필이면 같은 성을 가진 아버지를 만나 사랑에 빠지고 말았다. 동성동본(同姓同本), 조선시대부터 시작된 그 사연 많은 제도는 우리 부모님에게도 예외는 아니었다. 한국에서 손꼽히게 흔한 성씨에 본도 두어 개뿐이라 사실상 촌수를 따질 수도 없는 사이인데도 가족과 주변의 인식은 그렇지 않았다.
당시 법적으로도 논란이 많아 특례법과 법 개정으로 지나치게 포괄적인 동성동본 금혼 규정은 삭제되었으나, 오랜 시간 관습으로 굳어진 인식과 고정관념은 쉽게 사라지지 않았다. 결국 부모님은 양가의 강력한 반대를 무릅쓰고 이불 한 채만으로 살림을 꾸렸다고 한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가족을 저버릴 수 없었던 부모님은 가족과 지인들에게 인정받고자 했고, 그렇게 어머니의 소리 없는 투쟁은 또다시 시작되었다.
산 넘어 산, 저항의 연속이었던 인생에서 엄마에게 가장 필요했던 것은 아마 공감과 위로였을 것이다. 쉴 틈 없이 일해서 겨우 숨 돌릴 수 있을 때쯤, 해마다 한 번씩 사주를 보러 다니기 시작했다고 한다. 나쁜 일은 원래 일어날 일이었으니 누구를 탓할 이유가 없고, 좋은 일은 예정대로 일어날 것이니 뜻대로 되지 않는다고 좌절하지 않아도 되었다. 적어도 점을 보는 그 순간만큼은 세상을 향한 긴장 태세를 풀고 묵은 근심을 내려놓을 수 있으니 고마운 일이다.
# 엄마에게 필요했던 건
내가 처음 신점을 경험한 것은 고등학교 3학년 수시 원서접수 시즌이었다. 그 전까지만 해도 나는 엄마가 다녀왔다는 용한 사주, 신점 이야기를 전혀 믿지 않았다. 처음 보는 사람에게도 묻지 않은 이야기까지 술술 쏟아내는 엄마가 그곳에 가서도 먼저 패를 보였겠거니 생각했다. 그러나 그런 나에게도 수시 원서를 넣을 6곳의 학교를 결정하는 문제 앞에서는 미신의 힘이 필요했다. 확고한 소신도 신뢰할 만한 정보도 없었으니, 갈팡질팡 하루에도 수십 번 바뀌는 마음을 다잡을 이름 모를 무언가가 필요했던 것이다.
그렇게 엄마 뒤를 따라 찾아간 곳은 시골의 작은 민가에서 신점을 보는 점집이었다. 결혼하지 않은 처녀가 점을 보면 복이 날아간다는 말에 나는 엄마의 손에 이끌려 조심스레 문가에 무릎을 꿇고 앉았다. 향 피우는 냄새, 방을 둘러싼 화려한 색채의 그림, 굳게 다문 입술로 매섭게 훑어보는 그 눈빛에 위압감을 느껴 숨죽여 있던 기억이 생생하다. 예상과 달리 엄마는 먼저 별다른 이야기를 꺼내지 않았고, 그는 엽전과 쌀알을 번갈아 던지더니 귀신같이 과거의 일을 맞히기 시작했다.
열아홉 생에 처음 접하는 진기한 경험이었다. 정말로 우리 조상님이 다녀가기라도 한 것인지, 나도 알지 못하는 집안의 비밀을 술술 이야기하는 것이 아닌가. 그리고 놀랍게도 그가 예견한 대로 나는 마지막에 원서를 넣은 대학에서 합격 통보를 받았고, 녹봉을 먹고 살 팔자라는 말처럼 공공 분야에서 직장을 얻었다. 지금은 여러 이유로 잠시 사기업에 몸 담고 있으나, 언젠가는 또다시 공공 분야에서 일하고 싶어 그 곁을 떠나지 못하는 신세다.
그 날의 예견이 단순한 우연이었는지 아니면 눈에 보이지 않는 누군가 다녀간 것인지 나로서는 알 길이 없다. 그러나 그 날의 기억 중 무속인의 말보다 더 기억에 남는 것은 어머니가 쏟아낸 수많은 걱정과 사연이었다. 엄마는 자신보다는 가족의 안위를 먼저 물었고, 자녀의 배우자와 손주까지 놓치는 이가 없었다.
올해 운이 좋다고 하면 자식 자랑을 하며 맞장구를 치다가도, 운이 좋지 않다고 하면 어떻게 해야 액을 피할 수 있는지 물어 수첩에 적기 바빴다. 복채 5만 원에 억척스럽기도 하다, 흉을 보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나는 온 가족의 생시가 적힌 빼곡한 수첩을 손에 쥔 엄마의 모습이 참 간절하고 슬프게 느껴졌다.
- 엄마, 엄마는 점을 왜 보는 거야?
엄마는 왜 그런 표정을 하고 있었을까. 점을 보고 나오면서 넌지시 건넨 말에 돌아온 대답은 의외의 것이었다.
- 안심하려고 보는 거다. 내 자식들 잘 낳아서 잘 키웠다고.
- 점 보면 걱정만 늘어나는 거 아냐?
- 전부터 내 자식들 타고난 팔자는 좋다더라. 안 좋은 말 들은 적이 손에 꼽아. 너희들 다 타지에 보내고 걱정되면 가끔 이렇게 와서 좋은 말 듣고 기분 좋게 돌아가는 거지.
나는 멀쩡하게 낳아서 번듯하게 키워놨으니 행여나 부모 탓하지 말아라. 농담처럼 덧붙인 말에 뼈가 있었다. 그러니까 엄마는, 일생이 투쟁의 연속이었던 우리 엄마는 점을 통해 자신의 인생을 인정받고 또 위로받고 싶었던 것이다. 모두가 반대하는 결혼을 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번듯한 가정을 꾸렸으니 이만하면 됐다고. 고생했다고.
# 그리고 나에게는
성인이 된 나는 1년에 한 번 정도는 재미 삼아 사주나 신점을 보러 간다. '인생은 가늘고 길게, 그리고 둥글게'가 모토인 내 인생은 굴곡 많은 엄마의 인생과 비교하자면 무난하고 평탄하다고 평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요즘의 사회는 이 무난함을 유지하는 것조차도 치열한 경쟁의 연속이라 나름의 스트레스와 고민이 끊이지 않는 것이 사실이다. 마음속으로는 안정을 추구하면서도 한편으로는 닿지 못한 곳을 바라는 이중성이 결국 스스로를 괴롭히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나에게도 엄마의 방법이 때로는 도움이 된다. 용기 내지 못했던 과거의 선택에 대한 후회로 현재의 나를 괴롭히기보다는 타고난 팔자였다는 운명론이 정신 건강에 이로울 때도 있으니까. 인생은 실전이라고들 하지만 팩트만 따지며 살아가기에는 팍팍하지 않은가? 기댈 수 있는 종교도 딱히 고민을 털어놓을 곳도 마땅치 않다면, 이러한 방법도 누군가에게는 위로가 될 수 있다고 조심스럽게 말하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