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지막 페이지까지 안심하지 마라~
방황하는 칼날, 그 무렵 누군가, 가면산장 살인사건까지 내가 읽었던 히가시노 게이고 소설이다. 지금까지 읽었던 작품 때문에 히가시노 게이고에 대한 선입견은 무겁고, 우중충하고 암울한 미스터리 소설을 쓰는 작가로 여겼다. 그런데 섣부른 선입견은 화를 부른다. 질풍론도를 읽고 히가시노 게이고도 위트 있고, 기발한 소설을 쓰는 작가임이 드러났기 때문이다.
작가 편식주의자로서, 재미와 재치는 오쿠다 히데오 / 숨 박히는 긴장감에 글인데 영상처럼 느껴지는 기욤 뮈소 / 세밀한 묘사에 디데일은 더글라스 케네디였다. 그런데 그저 미스터리 소설가로 여겼던 히가시노 게이고가 미스터리는 기본에 재미와 재치 그리고 글인데 영상처럼 느껴지는 세밀하고 디테일한 묘사까지 다 보여줬다. 질풍론도에서 말이다.
총 368페이지로 4시간 만에 다 읽었다. 천천히 책을 읽는 편인데, 이건 도저히 천천히 읽을 수가 없었다. 화장실 가는 거조차 잊을 만큼 다음 장, 다음 페이지가 궁금해서 계속 넘기다 보니, 어느새 마지막 페이지에 도착을 하게 됐다. 그런데 마지막 페이지가 끝나고도 한동안 움직일 수 없었다. 왜냐하면 이야기가 다 끝난 게 아니었기에. 그다음 이야기는 어떻게 됐을지, 저절로 상상의 나래를 펼치게 만들어 줬기 때문이다.
히가시노 게이고의 질풍론도. 미스터리라고 해야 하나? 스릴러라고 해야 하나? 아니면 코믹 로드라고 해야 하나? 딱 이거다라고 장르를 정할 수가 없다. 그런데 재미있다. 읽다 보면, 무조건 끝을 봐야 하는 소설임에는 틀림없다. 반전에 반전에 반전이 있으므로 스포일러는 자제하려고 한다.
구즈하라라는 한 남자가 있다. 대학 연구소 연구원이었는데, 위험한 생물학 무기를 만들게 된다. 해서는 안 되는 일이라 그는 회사에서 쫓겨 난다. 그런데 그가 그 무기를 몰래 훔쳐서 숨겨 둔다. 그리고 대학 연구소 제일 높은 사람에게 돈을 주면 그 물건을 준다고 협박 편지를 보낸다. 그리고 그 다음날 어처구니없는 교통사고로 죽게 된다.
도고 마사오는 구즈하라가 다니던 연구소에 소장이다. 협박 편지를 받은 장본인이다. 그는 그에게 돈을 줄 생각이 없다. 그런데 물건은 찾고 싶다. 그러다 구즈하라의 죽음을 알게 된 후, 그는 몰래 물건을 찾아오라고 누군가에게 지시한다.
구리바야시는 그 대학 연구원이다. 구즈하라보다는 높고, 도고 마사오보다는 낮은 직급으로, 도고의 지시에 따라야 하는 인물이다. 이 중요한 업무는 당연히 그가 맡게 된다. 경찰에 알려야 하지만, 무기를 만들었다는 사실도 함께 알려야 하기에, 그냥 조용히 물건만 찾아오라고 상사는 지시한다. 부소장 자리를 준다고 하면서 꼬시니, 그도 어쩔 수 없이 동참하게 된다.
슈토는 구리바야시의 아들이다. 스노보드를 엄청 좋아하는 중학교 2학년 학생이다. 구즈하라가 보낸 테디베어 인형이 있는 사진으로 어느 스키장임을 알아낸 장본인이다. 그 덕에 아빠와 함께 학교도 안 가고 스키장에 가게 된다. 스키도 못 타는 아빠는 중요한 업무를 처리한다고 하면서 자기에게는 그냥 스노보드만 타라고 한다. 그래서 그냥 스노보드만 타는 인물이라고 생각했는데, 마지막에 엄청난 큰 일을 해내는 중요 인물이다. 히가시노 게이노는 인물 하나하나를 그냥 허투루 쓰지 않는 거 같다.
아빠와 아들이 가는 스키장에서 안전 요원인 네즈와 스노보드 선수인 치아키는 물건을 찾다가 다친 구리바야시 대신해 물건을 찾는 중요 직책을 맡게 되는 인물이다. 평범한 일상을 보내던 네즈와 은퇴를 생각하는 치아키에게 찾아온 3일은 구니스처럼 인디아나 존스처럼 엄청난 모험을 안겨주게 된다.
오리구치 마나미는 발톱을 숨긴 여우다. 구즈하라가 숨긴 무기를 찾아 더 비싸게 팔려고 한다. 그래서 남동생을 시켜 구리바야시의 동태를 예의 주시하라고 지시한다. 정말 치밀한 여자다. 그녀 손에 무기가 들어가면 안 되는데, 왠지 마지막에 물건은 그녀 손에 들어 갈 거 같다. 그리고 물건이 있는 장소를 아는 슈토와 동갑인 두 아이와 그의 가족 그리고 친구들이 있다.
스키장이 밝혀지고, 아빠와 아들이 스키장에서 물건을 찾기 시작하면서, '이거 너무 싱겁게 끝나겠는데 했다.' 그런데 갑자기 악당이 나오고, 잡힐 듯 잡히지 않는 장소를 찾다 구리바야시가 다치게 된다. 그 덕에 본격적인 설산 액션을 책임질 네즈와 치아키에게 사건이 이동되면서 이야기는 영화가 된다.
물건을 숨긴 곳을 알려주기 위해 걸어두었던 테디 베어 인형의 존재를 파악하고, 범인(?)을 잡기 위한 숨 막히는 시간과의 싸움, 그리고 밝혀진 인형의 진실과 함께 물건의 장소를 알아 내게 된다. 그런데 멀리서 지켜만 보던 악당이 드디어 움직인다.
'눈 위의 제다이들을 만나다. 사토자와 온천 스키장에서' 소설이 아니라 영상으로 봐야 하는 장면들이 몇 페이지에 걸쳐 진행된다. 중복해서 읽었던 부분이기도 하다. 스노보드 스킬을 잘 모르기에 더더욱 글이 아닌 영상으로 보고 싶은 부분이다.
위험한 물건은 어떻게 됐을까? 스포일러는 노출하지 않기에 물음표로 남겨야겠다. 그런데 한 가지 팁을 주자면, 마지막 페이지까지 안심해서는 안 된다. 얘기가 다 끝났구나 했다가, 뒤통수를 제대로 맞았기 때문이다.
중학생이 벌써부터 스노보드를 타다니, 슈토가 부러웠다. 그보다는 평범한 일상에 셜록홈즈가 될 수 있는 기회를 갖게 된 네즈와 치아키가 가장 부러웠다. 감정이입이 가장 많이 됐던 인물이기도 하고, 그들이 하나씩 하나씩 물건을 찾아 나서는 그 길이 엄청 신나 보였기 때문이다.
더불어 히가시노 게이고는 무거운 소설만 쓰는 작가가 아님을 알았다. 생물학 무기가 나와서 이거 또 엄청 묵직한 소설이구나 했는데, 결과는 새털처럼 가볍고 엄청 신난 소설이었다. 살인사건이 없어도 충분히 재미있는 미스터리 소설이다, 질풍론도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