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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우아써니 Oct 24. 2024

가장 예쁜 말

예쁘다. 정말 예쁘다.

며칠 전 유리는 신랑과 함께 압구정동에 갔다. 결혼하고 압구정동은 오랜만이다. 압구정동 골목상권이 예전만 못했지만 여전히 예쁘고 독특한 소품 샵이나 옷 가게들이 시선을 끌기에 충분했다. 


쇼윈도에 너무 예쁜 원피스가 보이길래, 신랑 눈치를 살피며 매장에 들어갔다. 네이비 컬러 원피스는 소매가 없고 허리를 잘록하게 보이게 해 주고 허리 아래로는 풍성하게 떨어지는 스타일로, 오드리 헵번이 입었을 것 같은 드레스였다. 평소 공주님 같은 의상을 입어보고 싶었던 유리 마음에 쏙 들었다. 


니트 소재라 맞지 않을까 봐 걱정할 필요도 없는데, 괜히 작으면 어쩌지 염려하며 옷을 입어봤다. 작을 수도 있으니 밑밥을 깔아 둔 거다. 너무 기대하지 않아야 실망도 크지 않으니까. 


입고 나왔을 때 신랑이 예쁘다고 해주기를 바랐다. 거울을 보는데 유리는 꽤 자기 모습에 만족했다. 

사야겠다! 마음먹은 순간, 신랑이 트집을 잡기 시작했다.


신랑은 유리가 입고 나온 옷이 브랜드 카피품인 것 같다며 뭔가 엉성하다고 한다. 뭔가 디테일이 다르단다. 

유리는 명품이나 브랜드에는 큰 관심이 없어서 브랜드 카피품인지는 알지 못했다. 가게 사장님이 완전 A급이라며 자랑스럽게 이야기하시기 전에는... 완벽했던 옷이, 갑자기 초라해 보였다. 


그러고 보니 라벨에 스펠링이 L이 i로 표기되어 있고 조악하다. 요새는 카피가 아니면 옷을 못 만드는지, 디자이너들이 문제인지, 카피여도 짝퉁이어도 명품 같아 보이는 걸 입는 여자들이 문제인지 알 수가 없다. 


카피한 제품인지 알고는, 그 옷을 입을 수 없어서 가게를 나왔다. 기분이 상한 것은, 예쁜 옷이 짝퉁이어서 그런 건지, 신랑의 태도인지, 옷을 못 사서 그런 건지 모르겠다. 괜히 옆에 있는 신랑의 태도에 심통을 내본다. 신랑은 이쁘다는 말을 하지 않았다. 


왜 이쁘다고 안 해주냐 물으니, 짝퉁 옷을 사줄 수는 없다며, 왜 짝퉁을 팔면서 저렇게 당당한지 모르겠다며... 열을 내고는 끝까지... 이쁘다는 말은 안 했다. 


유리는 문득 도원이 생각났다. 


그날은 눈이 펑펑 내리는 날이었다. 명동에서 도원을 만난 유리다. 크리스마스를 며칠 앞두고 있었다. 잠깐 먼저 지하철 역으로 가고 있으라고 말하고 사라진 도원은, 잠시 후 달라진 모습으로 나타났다. 점퍼 안이 불룩해져 있었다. 


"대체 뭘 숨겨 온 거야?"


아무리 유리가 물어도 도원이 대답을 하지 않았다. 도원은 모른 척, 유리를 잠실 집 앞에 데려다주었다. 그리고 다시 삼선교 본가로 돌아갔다. 명동에서 헤어져도 됐었는데, 유리와 도원에게 주어진 시간이 많지 않았다. 도원은 미국에서 잠깐 유리를 보기 위해 오랜만에 한국에 들어왔기 때문이다. 삼선교는 도원의 할머니가 사시는 곳이다. 


며칠 후 크리스마스에 도원은 헤어졌던 그날과 같은 모습으로 나타났다. 점퍼 안이 불룩한 그 모습...

"짠~메리크리스마스! 유리!" 도원은 점퍼의 지퍼를 내리며 숨겨온 선물을 꺼냈다. 

빨간색 코트였다. 그날 명동에서부터 숨겨온 것은.


길을 걸으며 빨간색 코트 예쁘다고 한 유리의 말을 듣고, 사주고 싶었다고 했다. 그런데 다시 그 가게를 찾아갈 자신이 없어서, 티가 날걸 알면서도 숨겨왔다고 했다. 

그 옷을 유리에게 입혀주고 도원은 몇 번이고 말했다. 


"예쁘다. 정말 예쁘다. 늘 이렇게 환하게 있어줘."


예쁘다는 말은 옆구리 찔러 받는 것이 아니다. 그 말은 유리에게 사랑받고 있다고 여겨지게 만드는 세상에서 가장 예쁜 말이다. 마음에서 나오는 진심이고, 사랑이다. 십수 년이 지났지만, 그날의 도원처럼 유리를 설레게 했던 '예쁘다'는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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