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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Haim Jung Apr 18. 2023

초록의 방랑

빌헬름 뮐러 『겨울 나그네』 독후감

트레바리 '이참에 읽자' 북클럽, 독일 문학 시즌 2, 빌헬름 뮐러 『겨울 나그네』


[줄거리]

슈베르트의 가곡으로 잘 알려진 빌헬름 뮐러의 연작시 『아름다운 물방앗간 아가씨』와 『겨울 나그네』가 담긴 시집이다. 『아름다운 물방앗간 아가씨』는 방랑하던 청년이 물방앗간에서 일하게 되면서 물방앗간의 딸을 짝사랑하게 되고,  짧은 사랑을 나누지만 결국 물방앗간 아가씨는 돈이 많은 사냥꾼에게 가버리고 만다는 내용이다. 이어지는『겨울 나그네』는 길을 떠난 나그네가 끝없는 방랑을 하며 절망에 빠져가는 모습을 담았다. 두 편의 연작시는 각각 따로 쓰였지만 하나의 이야기로 이어지기도 한다. 또한, 이야기를 사랑을 잃은 청년의 비참함으로 해석할 수도 있지만 사랑을 국가에 빗대어 보다 사회적인 차원의 이상에 대한 염원으로 해석하는 시각도 있다.






『겨울 나그네』의 각 색깔에는 의미가 있다. 초록은 희망과 생명, 하양은 절망과 죽음, 빨강은 환상이다. 그중에서도 초록은 하양, 빨강과 대비를 이루며 극에서 가장 급격한 의미변화가 일어나는 색이다.


1부 초반에서 초록은 방아꾼의 희망이다. 방아꾼은 초록빛 가시덤불 사이에서 딸기를 찾는 물방앗간 아가씨의 아름다운 모습을 보며 그녀를 향한 마음을 키워간다. 아가씨와 함께 시간을 보내며 마침내 그녀의 마음을 얻게 되자, 방아꾼은 짝사랑의 고통을 달랬던 칠현금에 초록색 리본을 묶으며 짝사랑을 매듭짓는다. 희망의 끈을 스스로 묶음으로써 초록의 주인이 된다. 그러나 사랑하는 여인이 장식품으로 전락한 초록색 리본을 보며 안타까워하는 모습을보고, 리본을 풀어 그녀에게 선물하면서 초록의 소유권을 초록 여인에게 돌려준다. 그리고 자신의 것이 아니게 된 초록을 흠모하며 노래한다. ‘초록색이 좋다’는 뜻의 ‘Grün so gern’에서 초록을 뜻하는 Grün과 좋다는 뜻의 gern의 발음이 비슷하게 느껴지는데, 두 단어를 한 문장에서 발음할 때의 운율감은 날아갈 듯 기쁜 방아꾼의 마음을 더욱 잘 보여준다. 초록은 좋은 것, 좋은 것은 초록.


그러나 행복은 오래 가지 않는다. 사냥꾼이 등장하면서 방아꾼은 위기감을 느낀다. 물에 사는 물고기가 초록빛 나뭇가지에서 뭘 하겠냐며, 뭍에 사는 다람쥐가 연못에서 뭘 하겠냐며 사냥꾼이 물방앗간에 어울리지 않는 사람이라는 경계심을 다급하게 드러낸다. 이때까지 초록은 물방앗간의 색, 물방앗간 아가씨를 가진 방아꾼의 색이다. 그러나 사냥꾼은 방아꾼으로부터 초록을 빼앗아 가버린다. 「처음엔 고통, 나중엔 농담」에서 ‘새파란’ 사냥꾼의 ‘새파란’은 초록의 의미를 가진 grünen으로 묘사된다. 이 순간부터 초록은 죽음의 색이 된다. 독일어로는 초록이 계속 grün으로 표현되지만, 한국어로는 초록, 파란, 푸른, 새파란 등 발음의 용이함에 따라 같은 뜻이 다르게 번역된다. 이후 방아꾼은 「좋아하는 색깔」에서 죽음의 사냥터인 들판과 초록색 잔디가 깔린 무덤을 향하며 절망으로 빠져든다. 특히 3행마다 반복되는 ‘Mein Schatz hat 's Grün so gern.’은  「칠현금의 초록색 리본을 풀어」의 'Ich hab das Grün so gern!'과 비슷한 단어, 비슷한 조성으로 부르지만, 더 낮은 음계와 느린 박자로 슬픈 감정을 표현하여 실연당한 방아꾼의 슬픔이 더욱 깊이 느껴졌다.


마침내 초록은 「싫어하는 색깔」이 되고, 이 순간부터 초록색과 대적하는 흰색이 등장한다. 그리고 방아꾼은 여인이 초록 리본을 풀어 자신을 그녀로부터 해방시켜주기를 소원한다. 「‘나를 잊어 주세요’ 꽃」이 핀 정원에는 초록빛은 없고 검은 빛만 있는데, 극의 초반에 아가씨의 창문에 심고자 했던 「물방앗간 젊은이의 꽃」이 “나를 잊지 마세요!”를 외치던 과거와는 반대되는 안타까운 상황이다. 이후 5월의 초록은 되돌아오지 못하고 꽃들은 하얗고 창백한 「시든 꽃」이 된다. 시냇물은 초록의 여인을 잃은 상처를 극복하면 빨갛고 흰 장미가 피어난다며 붉은색으로 희망을 노래하지만, 실현되지 않을 환상은 방아꾼을 개울 밑으로, 죽음으로 이끌 뿐이다. 그리고 초록색은 여지없는 사냥꾼의 소유가 되었다. 사냥꾼이 처음 등장했던 구절에서 숲은 아무 색으로도 묘사되지 않았지만, 「시냇물의 자장가」에서 나무꾼의 숲은 ‘초록빛’으로 묘사된다.


2부에서, 방랑하는 나그네는 눈 덮인 하얀 벌판을 떠돈다. 물방앗간 아가씨에 대한 미련으로 들판에서 초록색 풀을 찾지만, 잔디는 창백한 흰색일 뿐이다. 그녀가 사는 마을로 가는 우편마차, 이전과는 다른 마을 초입의 분위기에 쓰라림을 느끼고 보리수의 유혹을 견디며 방랑을 계속한다. 「폭풍우 치는 아침」에 나그네는 하늘에서 붉은 빛을 본다. 구름 사이로 내리쬐는 붉은 빛은 마치 나그네의 누더기 옷 사이로 흐르는 피를 연상시킨다. 시냇물이 노래했던 빨간 장미의 환상이 깨지는 순간이다. 나그네 역시 그것이 「착각」임을 알고 자조한다. 끝없는 그의 여정에서 「이정표」는 소용이 없다. 「여관」이 이끄는 초록빛 장례, 「도깨비불」과 「가짜 태양들」의 붉은 환상을 견디며 방랑을 계속한다. 잠시 동안 초록빛 초원과 잎새를 떠올리며 「봄을 꿈꾸다」가도, 꿈에서 깨어나 진짜가 아닌 그려진 잎새를 보며 절망하기를 반복한다. 이후 나그네는 자신의 고통을 가려주었던 바람과 폭풍우가 잦아들면서 진정한 「고독」의 고통을 안게 된다. 그리고 그 고통의 감각을 잊고자, 자신의 존재를 지우고 「거리의 악사」와 함께 끝없는 방랑을 이어간다.


1부에서 팽팽한 주도권 싸움의 한가운데 있던 초록은 2부에서 하양과 빨강에 의해 밀려나 기억 속에만 머물게 된다. 방아꾼의 초록빛 희망은 그렇게 사그러들었다.





덧.


이번 독후감의 무척 반응이 좋았는데 특히 클럽장님, 그리고 독일 문화에 박식하신 놀러오기 멤버분이 너무 좋아해주셔서 얼떨떨했다. 나는 독일어 원문에서 잘 드러나는 색채 관련 시어에 집중해 시를 해석했다. 청년과 아가씨의 색인 초록을 사냥꾼이 빼앗고, 청년은 초록을 찾아 헤매지만 청년의 기억과 환영 속에만 존재한다. 그래서 초록의 방랑이라는 제목을 붙였다. 전체 이야기의 흐름을 초록이라는 색채를 의인화해 분석했다는 점이 멤버분들에게 흥미롭게 다가간 것 같다. 그동안 트레바리에서 8편의 독후감을 쓰면서 보편성과 개별성을 모두 획득한 독후감이 아니었나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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