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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장윤영 Oct 19. 2020

엄마와 좋은 관계 유지하기

feat. K-딸내미

엄마와 대체 다들 어떻게 좋은 관계를 유지하는 거지? 


가끔 정말 궁금하다. 나는 도대체 안 되는 것이기에. 어렸을 때부터 점도 많이 보러 갔다. 갈 때마다 해주는 얘기는 달랐지만. 어디는 살이 꼈다 그러고, 어디는 아무 말도 없고. 


나는 10살부터 한국무용을 배웠고, 중학교는 선화예중엘 갔다. 한국 무용가는 엄마의 어린 시절 꿈이었다. 부모님을 몇 년 간격으로 초등학교 시절 잃은 엄마는, 나이 차이가 많이 나는 언니 손에서 자랐다. 부모 없다는 소리를 들을까 엄하게 자랐다고 했다. 옆 집 고등학생 놈이 연애편지를 담 넘어 종이비행기를 애타게 날려 보내도, 엄마 손에 온전히 도달하는 법이 없었다고 했다. 엄마의 언니, 그러니까 이모가 큭큭거리며 읽고는 곧 쓰레기통으로 매몰차게 버려지는 모습 만을 바라봤어야 했다고. 


당시 이모네는 담배 가게를 운영했는데, 그맘때 "담배 가게 아가씨"란 노래가 나왔고, 엄마는 마치 이 노래가 엄마에 대한 헌정가가 아닐까 느낄 정도로, 동네 남성들의 인기를 한 몸에 받고 있었다고 했다. 이모를 도와 가게를 자주 봐주었는데, 고등학생들은 담배를 못 사니, 성냥만 주야장천 사갔다고 한다. 엄마 얼굴 한번 들여다보려고. 얼마나 풋풋한가. 그들끼리, "봤어? 봤어? 이쁘지?", "오늘도 이쁘네~" 하는 모습이 그려졌다. 


배우를 지망했던 엄마는, 옆 동네 부산으로 가서 배우를 뽑는 대회에 나가 탑 3에 들면서 지역 신문에 실리게 됐다. 이모가 알게 됐고, 엄마는 무진장 혼났단다. 예쁘고, 공부를 잘했던 엄마는 서울 이화여대로 진학해서 엄마의 어린 시절을 갉아먹었던 우울이 가득했던 그 동네를 떠났다. 지금은 서울에 산 기간이 더 길어서 서울 사람이 다 되었지만, 아직도 엄마가 살았던 곳을 가기 싫어하신다. 당신의 어린 시절 우울한 모습이 떠올라서 그렇단다. 


나는 엄마의 꿈을 이루고자 태어난 것처럼 엄마 인생의 철저한 연장선으로 살아왔다. 그러다 사춘기가 일찍 왔던 중학교 3학년의 나는 그게 너무 싫었다. 그래서, 그 학교를 보내기 위해 엄마가 나를 수년간 차를 태워 서울에서 분당으로 매일매일 왔다 갔다 하며 레슨 받고 입시를 치른 것도, 중학교를 다니면서 억에 가까운 돈이 들어간 것도 다 없던 일처럼 나는 자퇴서를 냈다. 나도 최선을 다했지만, 나는 그 당시에도 나로 살고 있지 못하다고 느꼈다. 


중, 고등학교를 거치며 오빠는 나를 극심하게 질투했다. 엄마의 뒷바라지를 고스란히 받은 동생인 싫어했다. 나는 많이 맞았다. 엄마와 아빠가 부재중일 때 오빠는 나를 때리면 그간 엄마의 빈지라에 대한 보상이라도 되는 양 나를 때렸다. 당시 합기도를 배우던 오빠한테 죽도로 맞고, 검도를 배우던 아빠가 집에 두었던 목도로 맞고, 나중 권투를 배우고선 그 스킬이 들어간 주먹으로 얼굴을 맞아서, 얼굴이 눈퉁이 밤탱이가 됐었다. 




더 이상 견딜 수 없던 나는 독일로 떠났다. 하지만, 채 일 년을 채우지 못하고 들어왔다. 엄마의 전화 때문이었다.


 "너 거기서 그렇게 남자친구랑 지내는 게 맞다고 생각하니?"


나는 당시 독일에 있었고, 남자친구는 스위스에 있었다. 차로 4시간 정도 걸리는 거리였으니까, 가깝다고 할 수 있지만, 한 달에 한번 정도로 만날 정도로 그렇게 가까운 거리라고 볼 수도 없었다. 나는 독일에서 내 자리를 굳건히 하고 있었다. 당시 남자친구를 사랑하긴 했지만, 나는 엄마로부터, 오빠로부터 떨어져서 나를 온전히 다시 재건하는 과정이 필요했다. 낮에는 독일어 학원을 다니고, 저녁에는 주재원 자녀를 대상으로 영어를 가르쳤다. 일 년 뒤에는 대학원에 들어가려고 열심이었다. 외국 생활이 쉽지 않았지만, 보람이 있었다. 시리아 반전으로 급격히 늘어난 시리아를 포함 중동 지역 출신 이민자에 대한 반감이 늘어가고, 전반적인 외국인 혐오, 제노포비아가 독일 사회 전반에 퍼지고 있던 시기였고, 길거리를 돌아다니는 것조차 편하지 않은 생활이었지만, 마음 깊은 한 구석이 편안했다. 아무도 나를 모르는 곳에 온 것이 그렇게 자유로울 수가 없었다. 하지만 엄마의 관심은 오로지 남자친구가 엄마가 컨트롤할 수 없는 곳에서 나와 함께 있을 수 있다는 것이었다. 내 나이, 27살이었다. 처음 사귄 남자친구였고, 솔직히 한국을 벗어나기 위함도 있었다. 그가 외국인이었기 때문에, 남자라면 혐오하던 내가 조금은 마음을 열었던 것인지도 모른다. 당시 나는 벼랑 끝에 서서 발 하나를 들어 중심을 잃으면 죽는 것이지, 그럼 그렇게 되는 거지 뭐, 하고 있던 시기였기 때문에 그 누구라도 나에겐 소중한 인연이 되었는지도 모른다. 비구니가 되고자 절로 들어가던 한 여자가 옆 자리에 앉은 남자와 사랑에 빠져 가정을 꾸린 것과 같이 나는 정말 간절하게 누군가 내 이름을 안 불러주나 하고 있었으니까. 처음 사귀어 본 이 남자친구는 나에겐 다른 생물 같았다. 나를 이렇게 사랑스럽게 볼 일인가 싶을 정도로 나를 예뻐했다. 그는 나랑 결혼하고 싶어 했다. 그렇게 되면, 줄곧 자신의 아이들은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여성을 엄마로 두게 되겠지라며 줄곧 유치하고 느끼한 말들을 했는데, 석회동굴 지하수의 한 방울 한 방울처럼, 1년을 듣다 보니 손톱만큼이 툭 떨어져 나가고 또 툭 떨어져 나가고. 나도 정상적으로 누군가와 연애하고 사랑하고 결혼해서 아이를 낳을 수 있는 건가 싶었다. 


한 달에 한번 만나요? 만나면 불타겠네! 크크큭


이맘때 한국 회사 (E 모 회사) 프랑크푸르트 지점에 면접을 보러 간 적이 있다. 남자 두 명이서 일하고 있었다. 한 명은 4-50세 사이, 다른 하나는 3-40 나이대였다. 밑에 일할 직원을 뽑고 있었는데, 영어를 잘하는 사람을 찾고 있었다. 내가 들어가자 나이가 많은 남자는 놀라는 눈치였다. 남자일 거라 생각했단다. 나가야 하나 하는데, 일단 앉으라 해서 면접이 시작됐다. 한참 진행되는데, 나이가 많은 남자는 내가 남자가 아니란 사실이 짐짓 싫은지 내가 하는 말마다 비꼰다. 선을 넘을 듯 말 듯 지랄을 지랄을 하다가 나도 참다가 참다가 한 방을 날렸다. 


"남자친구 있어요?" 

"네." 

"남자친구랑 만나면 뭐해요?"

"... 근교에 놀러 가요." 

"근교 어디요?"

"저번 주에는 하이델베르크에 가봤어요."

"남자친구가 여기 있어요?"

"아뇨. 남자친구와는 장거리연애를 하고 있어요."

"왜요?"

"스위스인이라서요. 스위스에 거주하고 있어요. 그래서 한 달에 한번 정도 만나요."

"한 달에 한번 만나요? 만나면 불타겠네! 크크큭"

"..."


이 나이 많은 남자는 옆의 나이가 좀 적은 동료의 심리적 동의를 얻으려고 쳐다보며 웃는다. 웃기를 강요한다. 너도 웃기지? 그렇지? 나만 여기서 나쁜 놈 만들지 마. 하지만, 나이가 적은 남자의 얼굴은 정색해 있었다. 고마웠다. 나이가 많은 남자는 아내와 자식을 한국에 두고 온 것을 홀가분해하고 있었고, 나이가 적은 남자는 결혼한 지 얼마 안 돼 한국에 두고 온 와이프를 그리워하고 있었다. 아내가 와서 편히 지낼 수 있게 집의 가구를 이미 마련하고, 주말을 무료하게 보내고 있다고 했다. 곧, 독일로 오게 될 아내를 얘기할 때 즐거워 보였다.  이틀 뒤, 나이 적은 남자가 이메일로 면접 탈락의 결과를 보내왔다. 이 사무적인 이메일이 왠지 모르게 "여기 안 오는 게 나아요. 내 얼굴 봤지요? 나는 내 사랑하는 아내가 오기만을 기다리고 있어요. 더 이상 견딜 수가 없거든요. 우리 힘을 내요."로 읽혔다. 




너는 외국으로 나가야 한대. 그래야 네 꿈을 펼칠 수 있대. 


나는 스물하나에 호주로 유학을 나갔다. 지금도 그렇지만 엄마는 신점을 많이 봤는데, 나는 사주에 "큰 물"이 필요하고, 그게 요즘으로 치면, 바다를 건너 외국으로 가는 것이란다. 외국으로 건너가게 되면 내 운이 트이게 되며, 내 꿈을 장대하게 펼칠 수 있다는 것이었다. 중학생일 때, 무용을 그만뒀을 때, 한번 기회가 있었다. 예술학교를 자퇴하고 인문계 중학교로 전학 신청하기 위해 가는 길에 엄마가 미국에 계신 이모에게 가서 지내며 학교를 다니지 않겠냐고 물었다. 돈을 아끼기 위해 자식이 없는 이모의 "수양딸"로 입양을 하면 될 것 같다고 했다. 추후에 엄마는 내가 언제 그런 말을 했냐고 했지만, 그것 때문에 나는 미국에 가고 싶지 않다고 했다. 미국에서 공부하기 위해 호적까지 바꾸기 싫었기 때문이다. 한국 무용을 하는 것은 엄마의 꿈이었다. 엄마의 막연한 꿈. 나를 통해서 이루고자 했던 엄마의 꿈은 하루아침에 산산조각이 났다. 나는 더 이상 남들 앞에서 기쁨조가 되기 싫었다. 어린 마음에 무용단에서 장관급 모임 디너 만찬에 불려 가거나 미군 부대에 만찬 무대에서 재롱을 떠는 것이 싫었다. 그래서 예술 중학교에 진한 것도 싫었고, 평범하고 싶었다. 어릴 때부터 공연 연습 때문에 다니던 사립 초등학교를 전학가 공립 초등학교로 가는 것도 싫었다. 사립 초등학교는 선생님들이 로테이션을 돌지 않고, 아이들이 그대로 학년을 올라가서 유대감이 강하다. 공립 초등학교는 그렇지 않았고, 어린 나는 그게 싫었다. 그 공립 초등학교마저도 공연 때문에 결석하는 일이 생겼고, 그 다음날 학교에 가면 아이들이 왜 결석했냐며 이것저것을 물어봤다. 이것 조차 싫었다. 혹자는 내가 혜택 받은 어린 시절을 보냈다고 할지도 모르겠다. 당시 무용단 단장님도 우리들에게 늘 "너희는 혜택 받은 아이들이야."라고 얘기했고 그런 이야기를 들을 때면 으쓱해지곤 했다. 나는 엄마한테 말도 하지 않고, 담임 선생님께 자퇴하겠다고 말했다. 나는 최선을 다했다고 생각했다. 예술 중학교 생활 내내 반장이었으며, 학과 성적, 무용 성적 다 상위권을 유지했다. 선배들과의 관계도 좋았다. 지금도 그런지 모르지만, 나는 당시 예쁨 받기 위해 개그콘서트의 희극 코너를 몇 개씩 외우고 다녔다. 장기자랑을 시키면 언제 어디서든지 할 수 있도록. 골든 차일드가 아니었던 나는 가정 내에서나 밖에서 사랑받기 위해 온몸을 불사르고 있었다. 그러다가 문득 나와 가장 친한 친구가 내 뒤에서 내 욕을 하고 다녔다는 것을 알았다. 그건 정말 큰 충격이었다. 머리 위에 먹구름을 가득 얹고서 생활했다. 모든 게 완벽해야 했던 당시의 나는 내가 친구들의 따돌림을 받았다는 것이 수치스러웠다. 그러던 중 엄마가 그 사실을 알게 됐다. 


"너 왕따 당하니?"

"..."


엄마가 내 일기를 본 모양이었다. 쥐구멍이 있다면 쏙 들어가 숨고 싶을 정도로 수치스러웠다. 엄마가 원망스러웠다. 나는 절벽 끝에 서 있었는데, 차갑게도 물었다. 내가 한 친구들 비밀 이야기를 엄마들 모임에서 엄마들한테 하는 바람에 친구들이 다시 누가 그런 얘기를 엄마한테 했어! 하면서 나를 의심하는 것들을 견뎌왔는데. 엄마는 나한테 어떤 도움이 되었다고, 그렇게 차갑게 얘기하는 거야. 



"엄마, 남자친구가 나보고 결혼하자고 하네."

"너는 어떻게 생각하는데."

"... 지금 당장은 아니지만, 괜찮지 않을까 싶어."

"뭐라고?!"


엄마는 내가 스위스인 남자친구와 결혼하는 것을 결사반대했다. 오빠까지 동원해서 독일에 있던 내게 전화 공세를 했다. 아침이고 밤이고, 전화해서, "너는 그 남자랑 결혼하면 금방 이혼한대." "그 남자가 바람둥이래." 등등의 이야기를 했다. 나는 당시 독일에서 되는 일이 없고, 취직이 안 돼서 월세를 내기가 힘들어 스위스로 가서 한 달 정도 지내면서 직장을 구해보려고 하던 중이었다. 남자친구가 적극적으로 돕겠다고 했다. 독일에서 너덜너덜해진 심신에 남자친구의 제안은 따뜻했고, 나는 한 달 넘게 고민하다가 그러마 했다. 엄마의 생각을 물으려고 전화했을 때, 엄마는 야구 투수가 공을 던지기 전 몸을 웅크리고 힘을 최대한 모으는 것처럼, 숨을 고르고 내게 고함쳤다. 


"동거하겠다는 거야?!"

"..."


나는 결국 한국으로 돌아왔다. 그리고 오빠에게 입에 담지 못할 상스러운 욕을 들었다. 그리고 남자친구와 전화로 헤어지게 됐다. 



몇 년이 지나 엄마에게 왜 나를 그토록 반대했냐고 물었다. 생채기가 다 아물었을 시점이었다. 엄마는 "그래도 네가 딸인데 가까이에 살았으면 해서."라고 했다. 그리고 신점 얘기도 했다. 내가 이혼한 지 1년 내외로 이혼하게 될 거라는. 이혼하게 되면 어떡하냐고, 네가 한국으로 들어올 텐데 그걸 어떻게 보겠냐고 했다. 


오빠는 엄마가 반대하던 여자와 결혼을 했다. 결혼 후 역시나 엄마가 반대하던 이유 때문에 힘들어하며 산다. 당시 내 남자친구는 나쁘지 않은 조건을 가지고 있었다. 부잣집이라던지 그런 것은 아니었지만, 부양할 부모도 없었고, 대학 나와 번듯한 직장도 있었다. 나는 유학을 하긴 했지만, 긴 방황으로 제대로 된 진로를 잡지 못한 상황이었다. 부잣집도 아니었다. 유학 중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사업을 물려받게 된 어머니는 당장 급한 대로 가지고 있는 부동산을 모두 팔아 내 유학비에 올인하셨다. 오빠는 그게 또 늘 불만이었다. 그 유학을 내가 했었으면 하고. 그래도 나는 엄마가 바라는 그 "부잣집"을 만날 자신이 없다. 나는 누군가의 허수아비고, 자식이고, 특히, "딸"이다. 딸내미. 누구네 딸내미, 우리 딸내미. 한 없는 애정이 느껴지다가도 종속을 표현하는 양날의 칼 같은 말. 부드럽게 쓱 옆구리를 스쳐 쳐다보면, 날카롭게 생채기를 내어 이내 피가 철철 흐르고, 앞으로 고꾸라지게 만드는, 무시무시한 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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