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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미소 Oct 19. 2020

오랜만에 면접을 봤다.

집에 와서 맥주 두 캔 땄다는 건 안 거짓말

정말 오랜만에 면접을 봤다. 


한동안 눈 앞에 할 수 있는 일들만 해오다가 정말 큰 용기를 냈다. 푼 돈 벌어서 살지 말고, 제대로 사회에 속해서 사람 구실하며 살자는 생각에 이력서를 내고 하는 일들을 강행했다. 이것도 너무 하기 싫어 새벽에 자기 최면을 걸며 했다. 예컨대, "이 원서 안 내면 못 자, 진짜" 스스로에게 말해가면서. 누가 보면 정신이 나갔나 했겠지만. 또, 며칠 전 점을 본 것도 한 몫했다. 내 얼굴에 "취업, 취업, 취업" 이라고 적혀있단다. 30살이 넘도록 점 같은 거 안 믿는다 하며 살았지만, 절박하면 어쩔 수가 없다.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그렇게 자기위안을 하면서 들은 이야기는, 나는 올해 "큰 데"에 취직이 된다는 거다. 


무작정 여러군데 낸 곳 중 한 곳에서 연락이 왔다. 


"월급이 적은데 괜찮겠어요?" 했다. 200이 좀 안되는 월급이지만, 그래도 경력을 쌓을 수 있겠거니 했다. 그래서 그리 말하니, "그렇게 면접에서 말씀하시면 안돼요." 한다. 다들 돈 벌자고 일하는건데, 왜 그렇게 "고오급"스럽게 거짓말들을 해야하나 싶었다. 


면접 당일이 되고, 회사에 30분 일찍 도착해 서성였다. 건물 주변엔 담배 피며 고개를 숙여 인사하는 직장인 "아저씨"들이 보인다. 마치 벌서는 양 사회적 거리를 두어 1미터씩 떨어져서 각자 사색을 하는 듯 담배를 피고 있다. 조금은 멋낸다고 구두를 신은 나는 그래도 너무 당당하게 또각거리진 않고 걸어갔다. 어릴 때 부터 습관이지만, 지쳐서 그늘에 앉아계시는 어르신들 앞으로 너무 당당하게 걸어가지 않는 것이 내 나름대로의 예의였다. 내 나름의 인류애의 표현이고, 우리라는 틀 안의 근심이 다름을 존중하는 것에 대한 표현이다. 


로비에 도착하고 시계를 보니 면접 시작 20분 전이다. "안녕하세요, 00담당자님, 본사 로비에 도착했습니다." 문자를 보냈다. 5분 문자가 와서 "어디 계세요?" 문자가 왔다. 코로나로 건물 안에 들어가지는 못하고 로비에 있는 커피숍 미팅룸에서 면접이 진행됐다. 


문을 들어서니, 두 분이 앉아있다. 사회적 거리를 두어 좀 멀찍이 앉을까 하다가 여성 면접관 앞에 앉았다. 멀찍이 떨어지기도 방이 그리 큰 편은 아니었다. 


"마스크 벗어주세요." "아, 네." 면접자는 마스크를 벗게 하는 모양이다. 


"몇년생이시죠?"


"1988년생입니다." 


"여기는 1999년생이라 되어 있는데?"


헤드헌터가 임의로 작성한 회사 이력서에 정말 잘못 표기가 되어있다. 


"그럼 여기 자기소개서는 본인이 작성한 것이 맞나요?"


보니, 내가 작성한 것이 맞아 맞다고 하니 그제서야 본격적으로 면접이 시작되었다. 


"호주 대학은 3년제를 나온건가요?"


"3년제이긴 했지만, 한국의 4년제와 같습니다. 영국의 학사제도를 따르는 국가들은 대학들이 기본적으로 3년제입니다. 교양 수업이 없어서 그렇다고 알고 있습니다." 


"그런데, 4년만에 졸업한 것이 맞나요?"


아. 얘기해야 하나. 대학 졸업하고 10년 만에 그동안 무수한 면접 중 이걸 물어보는 면접관은 처음이다. 


"아, 네, 맞습니다. 1년 휴학했습니다. 아버지가 돌아가셔서요." 


"아...." 여성 면접관이 짧은 탄식 소리를 냈다. 


갑자기 주마등처럼 당시 호주에서 아버지 부고를 듣고 다리에 힘이 풀려 주저앉았던 기억이 떠오르고, 사무치는 그리움으로 베갯잇을 안고 잠 못 자고 울던 20년 초반의 내 모습이 스쳐간다. 집안이 잘 사는 것이 아니었지만, 아버지는 내 꿈을 힘 닿는 데까지 지원해주고 싶어하셨고, 암이 재발하셨을때도 내 공부에 방해가 될까 말씀해주시지 않았다. 돈 아낀다고 일주일 한번 하던 국제 전화에서 아버지 목소리가 계속 작아져서 "아빠, 잘 안들려! 크게 말해!" 라고 말했었고, 나중에 어머니로부터 아버지가 평소에는 병고로 기력이 없어 전혀 목소리를 내지 못했음을 알게 됐다. 딸과 전화에서 혹시 아픈 것을 들킬까 온 힘을 내어 목소리를 내서 전화를 받았다는 것도. 그리고, 2011년, 나는 한밤중 오빠로부터 "아빠에게 하고 싶은 말이 있으면 지금이 마지막 기회야."란 청천벽력같은 전화를 받았다. 


울컥했지만, 티를 안내려고 몸을 좀 움직였다. 


남성 면접관이 이력서를 훑더니, "아 그래서, 이 때 일을 그만두었구나." 라고 한다. 그러더니 "그동안 정말 열심히 살았네요." 라고 말하며 나를 쳐다보고 싱긋 웃었다. 


그동안 정말 열심히 살았네요. 


그 말이 묵직하게 강타를 때렸다. 살면서 처음으로 들어본 말이다. 극심한 우울증으로 모든 걸 포기하고 싶은 마음을 꾹꾹 참고 스스로를 다그쳐가며 보내온 지난 10년에 대해 한순간 모든 보상을 받은 기분이었다. 날 선 마음이 착 가라앉는 느낌이 들었다. 가슴이 먹먹한 걸 참고, 면접을 마쳤다. "다음주까지 면접이 예정되어 있어서, 면접이 끝나면 연락을 줄게요." 




집에 돌아와 맥주 한 캔을 따고 들이키는데 그제서야 울컥 눈물이 난다. 그래, 나 정말 열심히 살았지. 누가 알아주길 바란 건 아니었고, 다만 먼저 돌아가신 아버지에게 자랑스런 딸이 되고 싶어서, 아버지가 돌아가셔서 내가 슬퍼서 모든 걸 포기했다고 그렇게 말하고 싶지 않아서 눈 앞에서 희미한 점등같이 빛나던 생의 끝을 부여잡았던 나의 생을 투명하게 들여다 본 것 같았던 면접관의 말이 계속 남았다. 말의 힘이 대단하구나 새삼 느꼈다. 내가 보내온 날들의 10분의 1도 모를테지만, 그 타인이 너무 고맙다. 같이 일하게 될지 아닐지 모르지만, 내가 꾹꾹 참고 보내온 날들을, 누군가 인정하고, 이해하는 것을 느끼는 순간 정말 마법같이 이 세상은 어쩌면 살만한 것일지 모르는 것이란 생각의 전환이 순간에 일어나는 것이다. 어쩌면 우리가 필요한 건 오고가는 고운 말 한마디 인지 모르겠다. 문득, 한 서양 철학자 (아직 플라토가 그랬다 아니다 분분하다)의 "Be kind, for everyone you meet is fighting a hard battle." 문구가 떠올랐다. 한국어로 번역하자면 "모두에게 친절하세요. 당신이 만나는 모두가 각자 힘든 전투를 겪고 있으니까요." 정도가 되겠다. 오늘도 각자의 전투에서 열심히 싸우고 있는 당신, 건승하시길 진심으로 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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