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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미소 Oct 29. 2020

나를 인간으로 보고는 있는거야?

엄마는 나를 싫어했고, 싫어해왔고, 지금도 싫어하며, 앞으로도 싫어하겠지

나는 서른 셋이다. 곧 서른 넷이된다. 


엄마와는 오랜 기간 짝사랑의 그것과 같은 관계를 유지해왔다. 난 무얼해도 엄마의 마음에 들 수 없었다. 근데 난 계속해서 엄마의 사랑을 갈구해왔다. 엄마가 계속해서 내쳤지만, 나는 그게 다 나를 위한 것이라 생각했다. 


2011년 유일한 내 편, 아빠가 돌아가셨다. 이 세상에서 나조차 믿지 않던 나를, 유일하게 믿어준 아빠. 나는 마음이 무너지는 것이란 이런 건가 싶을 만큼 마음이 아팠다. 공황 장애라는 것이 왔고, 햇살이 밝은 날엔 밖에 나가지 못했다. 그 햇살 아래 있으면, 자꾸 땅으로 고꾸라질 것 같아서. 밝은 빛이 나를 소멸시킬 것 같은 기분 때문에 무서워 나가지를 못했다. 


당시 호주에서 유학을 하고 있었던 나는, 내가 살던 2층 기숙사 방 창문을 멍하니 쳐다보곤 했다. 어디를 굳이 굳이 찾아가 몸을 던질 마음의 힘도 없던 나는 늘 그 자리에서 2층 창문 너머로 몸을 던지는 생각을 수없이 했다. 


죽지는 않겠지. 하지만, 죽으면 어떨까. 아빠를 볼 면목이 없겠지?

 오빠는 늘 엄마의 골든차일드였다. 무얼 해도 오케이였다. 나를 욕을 하고 때려도, 침대에 데려가 더듬는 몹쓸 짓을 해도, 커서도 주먹으로 때려 경찰이 오고, 눈탱이 밤탱이가 되어도 늘 오케이. 엄마에게 나는 너무 만만해서 머리 몇 대쯤은 때려도 되고, 뺨은 무시로 때려도 아무렇지 않은, 태어나서부터 본인의 꿈인 "무용수"를 이뤄주지 않을 거면 무쓸모한, 버러지같은 존재였다. 결혼하고 싶은 남자가 생겨 데려왔을 때도, 신점을 보니, 이 남자와 결혼하면 1년 뒤에 이혼하게 될 것이기 때문에 보지도 않고, 결혼을 반대해도, 그와 몸을 섞은 것이 분명하기 때문에 "창녀"라 불러도, 나는 그를 버리고 엄마를 택했다. 오빠도 득달같이 나에게 "몸을 대준 년"등 독사 같이 혀를 놀리며 나를 생채기 냈지만, 그도 다 엄마에겐 오케이였다. 나는 그 이후로 우울증을 얻어 5년여 동안 아르바이트나 간간이 하며 지내왔다. 


이 우울한 얘기를 털어놓으면, 친구들이나 지인들은 놀란다. 밝아보여 상상도 하지 못했다고. 그래서 더이상은 이야기를 하지 않는다. 내 마음의 짐은 나만 지는 것이 맞겠다는 생각에. 


대학원에 들어와 재기를 소망하면서 이제 곧 마지막 학기에 수업은 한달 여를 남겨두고 있는 시점에, 어제 엄마가 불현듯 너무 많은 나의 물건에 대해 불만을 토로한다. 나는 시험으로 밤을 새고, 내 온 정신이 아닌데, 물건을 정리하란다. 그러면서 내 물건을 다 거실 한복판으로 내어놓기 시작한다. 방금 까지만도 괜찮다가 왜 꼭 지금 정리를 해야하는 걸까. 내일 하면 안되는 걸까. 그러다 불현듯 깨달았다. 엄마는 이 집에 내 흔적이 싫은 것 같다고. 


여러번 해외에 거주할 기회가 있었고, 독립하겠다고 여러번 얘기도 해왔지만 번번이 엄마는 승낙해주지 않았다. 최근에 와서야, 결혼할 남자도 없고, 능력도 없어 보이는 내가 붙잡지 않아도 갈 곳이 없는 것을 알자 자꾸 나가라고 한다. 겨우 딱지가 앉을라치면 엄마는 딱지를 잡아 뗀다. 피가 나고 따꼼따꼼할라치면, 어느새 칼을 들고 와 스윽 베어버린다. 피가 나는 것을 손으로 붙잡고, 고래고래 소리를 질러본다. 사람 하나 없는 산 중의 메아리일 뿐이지만. 



엄마가 좋아하는 점집에 한번은 따라간 적이 있다. 여자가 드세게 자꾸 오빠에게 승질을 내니, 나를 정신 병원에 쳐 넣으려다 대신 기회를 주는 식으로 점집에 데려간 것이다. 몇 년 전 일이라, 생각나는 것은 많지 않지만, 점 보는 분이 나와 엄마를 번갈아 보다, 날 보며, "너는 이 집에서 왕따야. 네가 내 딸이었으면, 너를 내가 이해하고 보듬어줄텐데. 엄마야, 얘한테 너무 그러지마." 이 말을 듣늗데, 처음 느껴보는 기분에 펑펑 울었던 기억이 난다. 암 진단을 받으시고, 학교를 당분간 쉬기 되셨던, 중학교 국어 담임 선생님이 떠올랐다. 나는 글쓰기를 좋아해서 당시에도 글짓기 대회가 있으면 늘 참가했었고, 매번 1, 2등 상을 타곤 했다. 다른 과목은 젬병이어도 국어만큼은 좋아하고 점수도 곧잘 받고는 했는데, 그래서인지 난 그 국어 선생님을 좋아했었다. 백일장 글짓기 대회가 있었고, 나는 아버지와 겨울산 등산한 것에 대해 썼었는데, 아버지의 투박한 손이 내 손을 따뜻하게 녹이고 정상으로 이끌던 것에 대해 썼었던 기억이 난다. 조회 시간에, 내가 전교에서 2등한 것을 말씀하시고는 쉬는 시간에 조용히 나를 복도로 부르셔서 가보았다. 무슨 일인가..


윤영아, 네가 너를 사랑하지 않으면, 아무도 너를 사랑할 수가 없어. 자신을 사랑해주어야 해. 


밝은 기운의 선생님이 맑은 눈을 나에게 맞추고, 한자 한자 힘을 주어 말씀하셨다. 한없이 온화한 미소를 지으시면서, 단호한 어투로 내 손을 잡고서. 중학교 3학년의 나는, 선생님이 대체 이런 말을 어떤 것에 기원해서 하시는가 의아했다. 내 글에서 자아가 없는 것을 느끼신건가. 나는 아버지의 사랑에 대해 썼는데. 그 글 어디에서 이런 생각이 드셨던 걸까. 나에 대해 정확하게 아실 수 있으셨던 걸까. 


나는 나를 사랑하지 못했다.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나를 사랑하는 사람이 아무도 없는 이 세상에서 나는 늘 탈출 계획을 세웠다. 그 계획은 멋져야 했다. 그래야 실행에 옮길 수가 있다고 생각했다. 007까지는 아니어도, 굿윌 헌팅의 윌처럼 큰 결심을 하고 자신을 속박하고, 괴롭히기보다, 행복을 선택하는. 그런 극적임이 내 계획엔 필요했다. 연기처럼 흔적도 없이 사라지고 싶었다. 가족으로 나의 시체가 인도되지 않게, 온전하게 사라지는 길을 찾고 있었다. 하지만, 그 끝이 불행이 아니었으면 했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행복한 죽음"이라는 것은 없는 것이다. 죽은은 다 우울하고, 비참한 말로다. 



엄마는 결국 내 물건을 다 내어놓고, 치우라고 했다. 나는 지난 밤 한숨도 못 잤고, 정말 피곤했다. 나의 기분은 전혀 헤아리지 않고, 자신의 요구를 행할 것을 강요하는 모습이 폭력적으로 보였다. 나는 이행하지 않으면 그만이었는데, 그동안은 다 그 요구를 들어왔던 것이 주마등처럼 눈 앞을 스쳤다. 


엄마는 나를 인간으로 보고는 있어? 나를 키우는 개만도 못하게 보지. 나도 사람이야. 나도 사람이라고. 


무엇을 해도, 어떤 말을 해도 나는 엄마를 만족시킬 수 없다. 엄마는 내 존재를 부가적이고 부속적인 존재로 본다. 온전하게 독립적으로 존재하지 않는. 나보다 더 큰 존재 옆에 있어야 나는 존재할 수 있는 것처럼. 안 그러면 나뭇잎처럼 바스락거리며 흩어질 것 처럼. 나는 너무도 무의미하다. 내 생각과 내 가치관은 공기 중 냄새분자처럼 쉽게 이러지러 날아가고 만다. 엄마에게 나는 그렇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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