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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늑대 May 06. 2020

혼자 광고회사 차려본 썰

#2. "카피스럽게 써주세요"에 담긴 애환

혼자 북치고 장구쳐서 열심히 카피까지 써서 광고주께 들고 갔는데 '좀 더 카피스럽게 써주세요' 같은 말을 들으면 정말 환장할 노릇이긴 하다. 카피를 썼는데 카피를 카피처럼 써달라니. 동음이의어의 나열이나 웃긴말 해시태그 퍼레이드를 카피라고 생각하는 세태가 천상계의 주님들께도 많이 반영이 되어서 '좋은 카피라이팅'의 허용범위가 매우 넓어진 건 사실이고, 그런 카피가 소비자들에게 분명 잘 워킹하고도 있으니 결국 내가 써온 카피는 제대로 보지도 않으시고, 새로운 걸 달라고 말씀하신 주님의 말씀을 아무리 내 회사라고 할 지언정 '걍 돈 덜 받고 말지' 하고 그냥 무시할 수는 없게 된다. '보지 않고 믿는 자 진복자로다'고 전하신 주님의 복음대로 이거저거 써보려 해도, 손이 잘 떨어지지 않는 내 경우의 이유는, 제대로 광고를 배우시고 전설적인 광고를 만들어오셨던 옛 분들의 신념과는 좀 결이 다른데, 솔직히 말해서 나는 그냥 그런 피드백이 너무 구리고 짜증나는데다가 내 취향도 아니라 안 쓰고 싶은 것 뿐이다. 역시 실력도 후진 놈이 쪼만 살았다고, 그냥 내 취향과 그걸 소개하는 내 얼굴이 화끈거리지 않는 게 가장 중요해서 쓰지 않는다니...회사의 명운을 참 쉽게도 점칠 수 있다.


여기에 몇 마디 변명(울분)을 뱉어보자면, 먼저 광고하는 사람도 사람인데, 브랜드를 향해 표현하고픈 '사랑해' 라는 감정을 '당신을 사랑합니다'내지는  '나, 너를 사랑하나봐', '언젠간 한번쯤은 돌아봐주겠죠' 정도로 쓸 순 있어도...  'ㄴr 너를 JOA하나BOA..."라고 쓸 수는 없다. 그냥 없다. 우리가 바라본 타겟들은 저게 뭔 소린지 읽지도 못할텐데 ....그런 내 취향을 에둘러 개똥같이 잡은 모호한 나만의 타겟팅전략으로 변명하는 게 첫번째 이유.


'카피스럽게'가 잘 안 써지는 두 번째 중요한 이유는, 기획서의 흐름에서 벗어나는 걸 애초에 물리적으로 쓸 수가 없기 때문이다. 뭐 아주 세상에 없던 대단한 전략 전문가가 납셔서, 전략을 벗어난만큼의 '카피적 허용'을 용납하지 못하는 그런 멋있는 이유가 아니라, 그냥 애초에 혼자 북치고 장구치고 했던 시간이 길어서, 북은 자진모리 치고- 장구는 휘모리 치고- 하는 걸 잘 못하게 되어버렸기 때문이다. 혼자 시작한 회사라면 쉽게 겪는 전략-크리에이티브 연결 과정에서의 구조적인 문제이다. 내가 자진모리 쳤는데, 누가 휘모리 변주로 받아주면 얼쑤- 하고 신날 수도 있겠지 (솔직히 번잡하기만 할 거라고 생각하지만 백번 양보해서). 다만, 그런 가능성까지 모두 담아내기 위해선 필수적으로 어느 정도 규모를 갖춘 조직이 필요하다. 안 가본 생각의 길도 대신 가주는 사람도 있고, 그냥 기막히게 점프를 잘 뛰는 사람이 있을 수도 있고, 오히려 전략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 사람이 몇 마디 던지는 것도 잘 살려보다가 가능성을 발견하기도 하고- 그런 경우라면 정말 '카피스럽게 써주세요' 같은 생각 덜 하고 준 피드백에도 엄청난 감동을 안겨주는 추가 제안을 만들어줄 수도 있지만 그러지 않은 경우에는 프로젝트를 리드하는 '그 혼자'가 갑자기 딴생각을 하거나, 갑자기 시상이 확 발동해서 좋은 걸 후루룩 써내야 한다. 혹은, 스스로 열심히 잡은 전략과 제작의 가이드라인은 조금은 내려놓고, 더 이거저거 허용해서 아무거나 좀 써봐야만 한다 (이 경우, 자괴감이 좀 있다). 이런 조직을 꾸리는 게 한때의 꿈이기도 했지만, 이런저런 이유로 아예 '없는 경우의 수'가 되어버렸으므로, 슬프게도 애초에 배제하고 생각하고 있다.


이런 피드백을 받는 경우에 나는 보통 (1) 원래 잡았던 카피라이팅 가이드라인을 공유하여, 내 카피를 다시 좋아보이게 만들거나 (2) 전략을 정확히 표현하는 게 더 중요하다고 역설하거나 (3) 요즘은 이렇게 팩트 중심으로 간결하게 설명하는 게 대세다- 라고 설득하며 어떻게 해서든 그 2차적 수정을 피하려고 한다. 물론, 그냥 알겠습니다- 하고 새로 써주는 게 여러 사람 편하게 만들어주는 건 사실이지만, 분명 고민하고 준 건데 제대로 봐주지 않는 행태에 대한 짜증의 표현이기도 하고, 어차피 새로 써봤자 엄청나게 대단한 게 나오지 않을 거라는 나태함에 구태여 다시 광고주를 설득하는 것도 있고, 반대로 정말 훌륭한 제안을 주어야 하는 게 나의 숙명이자 훌륭하지 못하면 바로 도태되는 걸 경험해봤던 작은 광고회사의 특성상 '카피스럽게'라는 말에 '카피스럽지 못한' 무언가로 대응할까봐 두려운 겁쟁이 같은 반사작용이 튀어나오는 것도 크다. 


물론, 위에선 엄청 대단하게 기획의 프라이드를 살린 척 말하지만, 실상은 모든 경우에 언제나 그냥 '말만 저렇게 미팅 자리에서 좀 하고' 다음날 바로 새 카피를 써서 많이도 '공급' 했다. 오히려 전략을 나조차도 잊어버리고, 그냥 맘가는대로~ 어제 인터넷에서 본대로~ 모바일게임 채팅창에서 본대로~ 신나게 일필휘지로 써준 카피라이팅에 매우매우 흡족해했던 광고주가 내가 만난 광고주의 대부분이라는 사실에 무척이나 우울해하기도 했다. 이 업은 망했어! 하고 한때는 소주도 많이 마셨다. 지금은, 별로 우울해하지 않는다. 애초에 내 실력이 구려서 그랬다고 생각하는 소크라테스급 경지는 이미 예전에 도달했고, 광고주 말이 맞을 수 있어-라고 이해하는 황희급 경지도 조금은 보이는 것 같다. 더 나아가 요새는 내 정신건강을 위해 팔자에도 없는 '근거 없는 자신감'을 억지로 학습해서 더해 넣었기에 별로 우울하거나 광고업에 대해 회의를 품는 것 같은 사치스러운 감상은 하지도 않는다. 그거 할 시간에 몇 개 더 적지 뭐- 하고 만다. 솔직히, 내 워딩의 말맛이 그닥 못 봐줄 만큼 나쁜 편도 아니고, 여기저기 '우리 카피라이터 있어요'하고 뻥튀기하거나, '기획이 카피를 써야 진짜입니다' 같은 사짜 같은 소리를 해가며 카피나 네이밍만으로 푼돈을 챙기는 프로젝트도 월세를 내기 위해 자주자주 해왔으므로, 광고주가 무엇을 원하는지는 대강 배변훈련 실수하면 도망가는 개마냥 눈치밥으로 알게 되어서 그런 것도 있다.


다만, 너무 괘씸한 광고주가 있으면 오히려 카피로 혼내주기도 한다. 일부러 전략적으로 확~ 째버린 기 센 카피를 높은 사람이 있는데서 제안해버려서, 고위층은 싱글벙글 / 실무자는 미치겠네- 하는 소리가 나오게 만드는 거다. 그런 고수들이나 할 수 있는 경지를 내가 어떻게 하냐고? 당연히 못하지 내 주제에. 그만큼의 인사이트가 있을리도 만무하고 그만큼의 인력을 보유한 채 시작한 것도 아니므로, 광고주 고위층의 SNS를 염탐해서 취향을 엄청 파악한다. 뭘 '공유하기' 눌렀는지, 어떤 모바일게임을 하는지, 무슨 이벤트에 참여하는지, 정치색은 어떤지, 그런 걸 잘 알아 어떻게든 담아내 내게 의뢰한 모 대행사 내지는 주선자가 난처하지 않고, 좋은 기획 외주를 데려온 것에 으스댈 수 있도록 산업스파이 같은 짓을 자주 한다. 염탐꾼 주제에 얼른 이 정도 전략엔 따라오셔야 좋다고 일부러 광고주를 매질하는 '전략 전문가 같은' 행세를 하며 우리 기획서에 태클을 건 것에 대해 두고두고 후회하게 만든다. 물론, 나만 알고 나만 즐거워하는 승리다. 정작 광고주는 늘 좋은 결과를 가지게 되었다. 후회하기는 커녕, 자기가 조져서 윗분이 좋아하신 결과물이 나왔으니 망고땡이다. 앞으로 더 조짐을 당하겠지- 싶다.


뭐, 원래 못난 놈이 자기 잘못은 제대로 볼 줄 모른다고, 가장 큰 문제는 나 따위가 여전히 내가 '정답'을 가져갔다고 속으론 생각한다는 점일 것이다. 겉으로는 어이쿠 예예 하며 카피를 열심히 고치고, 다시 칭찬받음에 안도의 한숨을 내쉬는 내 초라한 모습을 통해 이것이 문제의 본질임을 확신할 수 있었다. 뭐, 나 따위가 이런 썰을 브런치에 푼다고, 광고주들께서 '어이쿠....솔직히 시간 좀 남은 김에 워딩 옵션좀 더 보려고 준 피드백에 이런 고민씩이나?! 이런이런 주의해야겠는걸?!' 같은 마음을 가지실 리는 전혀 없다. 그냥, 여러 명 있는 조직이면 승질도 내고, 제작팀 탓도 하고, 씨디 탓, 일정 탓, 디렉션 탓, 어제 먹은 저녁 탓 기타 등등 해가며 이래저래 풀어라도 보겠지만, 혼자하면 일의 스트레스를 일로만 풀어야 한다. 가끔은 관계로도 풀어보고 싶은데 말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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