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 횡령으로 시작한 해적판 광고회사
처음엔 사업이 잘 안 되어서(지금은?) 많은 창업가들의 썰을 강변공원에서 몰래 봄나물 캐듯 주워담으러 다녔다. 어차피 삶의 무게와 자괴감의 압박에 이미 허리가 휘어서 하늘을 우러러 한 점 부끄럼만 가득했던 시기였으므로, 그냥 진짜 땅만 보고 다니면서 누군가 흘린 썰은 그냥 일단 다 주워담았다는 뜻이다.
가만히 들어보면, 내가 막연히 독립을 결심하고 철없이 광고주 내지는 알지도 못하고 회사의 프로세스나 업태를 욕하던 시절에 품었던 생각, 그에 대한 작용-반작용은 다들 엇비슷했다. (1) "회사가 매우 짜증나고 갑갑하고 줄 돈 안 주는 것 같아 억울하니 --> 내가 직접 하겠다"는 억압 내지는 분노의 마인드로 시작, (2) 그래도 너무 맨땅에 헤딩은 그러니... 소프트랜딩을 위해 월급을 회사의 월 자본금으로 사용하며 회사를 운영 (3) "흥! 이 회사가 나한테 해준게 뭐 있다고!" 같은 분노 섞인 변명(?)과 함께 회사의 각종 자산을 횡령에 가까운 수준으로 전용하며 부족한 운영 자산을 채우는 것- 이 바로 그거다.
물리적으로 '내가 진짜 사업하려고 마음 먹었구나'를 정확히 피부로 느낄 수 있는 첫 시작은 웃기게도 '횡령'에서 비롯된다. 회사의 무료 폰트 / 오피스 툴 / 제작팀 내지는 경영지원팀에게 잘 보여 얻을 수 있는 어도비 몰래 가입 찬스 / 막내라서 어차피 매일 가지고 출퇴근해야하는 외부미팅용 노트북 / 맘껏 어깨넘어 모방할 수 있는 선배들의 훌륭한 스윙 폼, 경쟁PT 방점을 위한 퍼팅 폼 / 회사 서버에 저장된 방대한 량의 고급 문서와 제작물 등등 조직에 속해있기에 큰 의심 받지 않고 접근할 수 있고, 심지어 어물쩍 훔칠 수도 있는 소스들을 많이도 가정으로 옮겨두는 일(횡령)부터 시작하는 게 그렇다. 창업 멘토링 비슷한 걸 여기저기서 훔쳐 듣던 시절을 돌이켜보면 누군가는 회사 법인카드로 접대하고 커피도 사가면서 사업을 시작했다는 구질구질하기도 한 범행 자백을 되게 대단한 의지의 한국인인듯 으스대는 것도 많이 봤는데, 세상이 뭐 나한테 사업하라고 등떠밀었던 것도 아닌데 고작 지가 지 쪼대로 사업을 시작한다는 이유로 모든 사실이 미화되지는 않는다. 게다가 좀 거창하게 봐서는, 몇 개월 내지는 몇 년만 있으면 똑같은 대표 대 대표로 동종업계에서 파트너로, 혹은 PT장에서 다이다이로 만날 수도 있을 사람인데, 굉장히 부끄럽고 (심지어 저쪽은 이미 부자라서 애초에 생각도 하지 않았던 푼돈임ㅋ) 나 혼자 괜히 양심에 찔려 나중에 신세질 일을 만드느니 애초에 그런 짓은 좀 하지말자고 정해서, 그런 류의 구질구질한 이야기는 그냥 흘려들었다. 물론, 나보다 잘 나가는 강연자를 보고 배아파서 유치하게 질투한 게 더 크다.
다만, 나는 좀 더 구질구질하고 구차해서 그 누구도 신경쓰지 않는 횡령을 용케도, 습관적으로 저질렀는데, 회사 MT에 다녀오고 남은 두루마리 휴지나 소주, 일회용 그릇, 보드게임판, 물티슈 등을 한 보따리 집에 짊어지고 가거나, 경쟁PT 문서를 담아 포장까지 예쁘게 한 광고주 전달용 USB(500mb)를 광고주가 받지 않는 경우에 내 주머니에 쓱싹하거나 하는 구차한 짓이 바로 그렇다. 나중에 진짜 궁하지도 않은데 회사 화장지나 생수를 챙겨가는 내 꼴을 보고 '이 새끼 손목 잘라버려야 하나? 애초에 도벽이 있나?' 같은 고민을 진지하게 했던 적도 있다. 무튼, 버리는 파티션, 망가진 이케아 스툴, 자석의 힘빨이 떨어진 화이트보드 등등 한달에 한 번 회사 대청소가 있을 때마다 쉽게 낭비되는 물건들로 '내 자택 사무실'은 점점 구색을 갖추어 가곤 했다.
그렇게 자택 사무실을 '인스타에 사진 찍어 올릴 정도로' 적당히 구성하고 나면 괜히 드는 고민이 정작 직원이 한 스무명 되기 전에는 하나도 필요 없는 '업무 프로세스와 지향점'에 대한 고민이다. 이 때를 떠올리면 실소를 금할 수 없는데, 지금 아래 글을 쓰려니 또 웃겨서 잠시 손으로 웃겠다.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남들은 어떤지 몰라도, 탐욕의 아이콘과 같은 나는 이 시점에 '아..이러다 20명이 되면 어떡하지?' 라거나 '나는 내 전략기획이 여전히 헤드가 되는 조직이고싶어!' 같은 개떡 같은 공상과학소설을 머릿속으로 자주 망상하며 드로가5니 와이든앤케네디니 사치앤사치니 하는 훌륭한 회사들의 업무 프로세스와 철학, 한국 광고회사들의 철학을 비교하며 '내 생각이 훨씬 나은 거 같은데? 이러다 진짜 깐느 가는거 아냐? 수상 소감 뭐라고 하지? AC/DC 노래 제목을 인용할까?' 같은 졸라게도 우스운 생각을 '경영 업무랍시고' 시간까지 별도로 분리해서 매일 가졌다. 차라리 그 시간에 기획서나 한 줄 더 쓸걸- 같은 고민은 그때도 했고, 지금도 하고 있다. 무튼, 2년을 바득바득 굴러 겨우 5명 이내의 조직을 만든 지금, 사실 드는 고민 자체는 똑같다. 결이 달라진거지. '아 20명이 되면 어떡하지? (줄 돈이 그때도 없을텐데)', '나는 내 전략기획이 헤드가 되는 조직이고 싶어!(대체 언제까지? 미치겠다 진짜 죽고싶다, 나 말고 누구 대체자 없어? 밑천 다드러나네!) 처럼.
정말 재미있고 낯부끄러운 쌩얼은 지금부터다. 그렇게 횡령으로, 장시간 꾸준히, 부끄러운 방법으로 개인 사무공간과 업무 제반을 마련하고, 돈도 살짝 번 후 가장 먼저 했던 짓은 '맥북 바꾸기'와 '업무를 할 수 있는 카페 찾기', 그리고 '존나게 멋들어져 보이는 명함 만들기'였다. 한 번 더 손으로 웃고 지나가겠다.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몇 년간 꾸준히 PPT 대필해가면서 만든 인내라던지 사업철학의 기반이라던지 하는 것들이 완전독립을 하는 순간 와르르 무너지고, 겉치레에 다시 집중하게 된다는 사실이 매우 재미있고 나라는 사람의 밑바닥을 여실히 보여주는 것 같았다. 맥북을 바꾸게 되는 계기도 매우 웃긴 게 '아- 유튜브 편집할 일이 많을 수 있으니까' 라거나 '나, 아트에 소질있는 것 같아- 아트 디렉터도 할 수 있게 더 좋은 기종이 필요하겠어' 같은 과대망상 때문이다. 실제 그런 일은 내게 오지 않고, 이걸로 돈을 벌어먹을 수 없다는 건 PPT대필따리를 '사업이랍시고' 하면서도 이미 많이 경험해본 영역이다. 하지만 나라는 인간은 그렇게 현명하지는 않았다. 그 맥북으로 온갖 크래프트지, 두꺼운 인쇄, 명암, 보이지도 않는 쪼끄만 글씨, 괜히 파격적으로 보이려고 쓴 괴상한 레이아웃 등등을 점철해 명함까지 직접 만들면서 '광고회사가 가오가 있지...' 라는 생각까지 가버리게 되었을 때가 가장 엉망이다. 물론, 그때는 그게 엉망이라고 생각하지 않고 '정답'이라고 믿은 채로 그런 모습으로 많이도 영업을 다녔다. 그게 고작 2년 전의 일이고, 지금은 안 그러고 있나- 하고 곰곰히 리뷰해보면 또 뭐 크게 다른 것 같지도 않고 그렇다.
아무튼, 이 모든 개떡같은 고찰과 간지내기 이쁜이 작업을 잘 만들어 둔 개인 사무실에선 안하고 꼭 카페에 가서 하게 된다. 개떡같은 이유는 누구라도 있더라. 내 경우엔 '사람의 움직임을 봐야해...무슨 메뉴가 팔리는 지 봐야해...' 같은 대학생이 만든 가짜 트렌드 리포트 같은 얘기였다. 왜 한 백 명 설문지 돌려놓고 인사이트 발견했다고 대서특필하는 그런 거. 물론, 카페에서 업무하는 게, 방구석에서 횡령으로 세운 사무공간에 휩싸여 24/7 잠도 안 자고 일하는 것 보다얀 실제로 도움이 되기도 하고(카페 문 닫을 땐 어쨌든 집엔 가야하니까), 실제 내 경우에는 당시 F&B 브랜드를 만들거나 컨설팅하거나 리테일을 짓고 프랜차이즈로 만드는 류의 일에 가장 몰입해 있었으므로, 꼭 필요하다고 변명하며 일부러 그런 업무형태를 유지하기도 했다. 그냥, 하도 기획서와 걱정과 피해망상과 성공할거라는 과대망상에 묶여 살아서 바람이라도 쐬고 싶었다고 해두자. 다만, 이 짓도 쉽지는 않다. 누가 내꺼 훔쳐가진 않는지- 훔쳐 보진 않는지- 같은 불안함부터 카페 직원과의 눈치, 콘센트와 가까운 자리를 선점하지 못하면 떠나야한다는 점, 전화 소음에 방해 받지 않도록 라운지가 따로 있는 카페를 골라야 한다는 점, 흡연에 용이해야 한다는 점, 문 여닫는 소리가 크게 나지 않고 화장실이 안에 붙어있어야 한다는 점 등등...의외로 고민할 게 되게 많았다. 이 때 우연히 얻은 인사이트의 힌트들을 가지고 여기저기 잘도 지으러 다녔다. 카페도 자주 옮겨다니며 나만의 단골을 만들어서, 지금도 좋은 관계(-라고 쓰고 무료주차장+무료빵+무료회의실이라고 읽는다)를 유지하는 곳도 있다. 이런 게 정서적으로나 경험적으로 좋은 부분도 물론 있겠지만, 솔직히 말해서 이런 짓거리는 민폐다. 같이 일하는 사람 여러명 앉혀놓고 이 얘기 저 얘기 하며 카페를 내 안방처럼 쓰다보면 나중엔 분명 너무 민망해서 어디 회사를 하고 있다는 말도 못하는 순간이 온다. 그나마 광고업계는 다행인줄 알아야 한다. 유명 연예인 이름 언급하며 '걔 모델비가 어쩌고~', '감독이 어쩌고~', '요즘 트렌드가 어쩌고~' 같은 얘기가 회의 석상에서 오고가니까 그나마 카페에 어울리고 사람들이 한 두 번은 참아줄 수 있는 거니까. 제조업이나 IT였으면 영락 없이 삼진아웃이다. 물론, 이 짓도 나중엔 너무너무 부끄러워져서, 내 정체를 묻는 어느 모 카페에는 일부러 아침에 내가 쓴 개허접같은 책을 한 권 들고 가서 '제가 작가인데...이 카페를 배경으로 책을 쓰고 있는데...요새 시상이 안 떠올라서 오래 앉아있습니다..괜찮으시지요?' 같은 양해를 구하며 '작가'라는 이름에 담긴 고뇌를 악용해 공짜 커피도 한 두잔씩 리필 받고 그랬다. 부끄러워서 두번 못 간다. 물론 자리에 앉아서 20분간 광고주에게 구구절절 매체가 어쩌니 저쩌니 떠들다가 어차피 머지 않아 다 들킬 일이다.
'카페에서 창업', '차고에서 창업' 같은 건 단서가 붙어야 옳은 낭만이 된다. (자기 부동산 소유인) 차고에서 창업-이나 (지인이 소유한) 카페에서 창업- 같은걸로 말이다. 사실 의외로 사치인 것 같지만 가장 필요한 건 '사무공간'이라는 걸 이런 짓거리를 반복한 후에 몸소 깨닫게 되었다는 건 소득 중 하나이다. 나 혹은 회사 직원을 위해서가 아니라, 내가 사업한다는 '민폐'를 남의 업장의 부담으로 전가시키지 않기 위해서도 필수이다. 세상은 나에게 사업하라고 등 떠민 적이 없다는 걸, 사업한다는 사람들은 '적당히'라는 걸 알아야 한다는 사실을 깨닫고 피해의식이나 괴상한 낭만에서 벗어나게 되기 까지는 어느 정도의 시간이 분명 걸린다. 나중에는 돈이 궁해서 진짜 전기세가 아까워 에어컨을 쐬고자 카페에 가기도 했지만, 그런 생활은 몇 개월 가지 않았고, 이후부터는 컨설팅했던 F&B업장에 기생해서 사무실을 내거나, 다 떨어진 재개발 구역의 꼬치집을 사무실로 쓰거나- 하기도 했다. 지금은 위워크에 남의 돈으로 들어가서 또 기생하고 있다. 기생을 하면서도, 솔직히 게을러서 몇 번 출근도 안 하면서 사무공간을 유지하는 이유는 대외적인 면이라기 보다는, 사무공간에 들어가는 행위 때문에 업무와 현실을 분리할 수 있기 때문이다. 아- 물론, 나를 위한 얘기는 아니고 직원들을 위한 이야기이다. 대표는 그런 거 없다.
아무튼, 횡령으로 시작해 여기저기 민폐를 끼치며 꾸준히 버틴 황건적 같은 회사가 사무실 - 집기 - 업무 제반 환경 - 직원을 갖추는 데에도 이런 좌충우돌이 있다는 썰을 풀어보았다. 물론, 안 이런 사람들이 더 많다. 나는 현명하지 않아서 이런 걸 겪고 나서야 알았다. 다음 편에서는 이렇게 고되게 사무실이라는 걸 가져놓고도 또다른 사무실/스튜디오/작업장을 원하게 되는 '사무실 결핍증'과 그렇게까지 해서 또 얻은 사무실에도 안 가는 '사무실 싫어증'에 대해 역설하도록 하겠다. 쓰다보니 너무 엉망인 거 같아서 지난 편에 한 말을 주워담고 다시 끝맺음 해보도록 하겠다. 모쪼록, 본인이 현명하지 않다고 생각한다면 절대 혼자 광고회사 하지 말고 꼭 현명한 사람이랑 같이 하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