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유한한 영국생활자의 틈만 나면 떠나는 여행기, 시작

<유한한 영국생활자의 틈만 나면 떠나는 여행기>

by 노현지

우리 가족은 지난 해(2021년) 7월 영국에 와서, 잉글랜드(England) 남서부 지역에 위치한 ‘바스(Bath)’라는 작은 도시에서 8개월째 살고 있다(자세한 사정과 생활 이야기는 필자의 다른 매거진 <해피바스데이(Happy Bath Day)>를 참고해주시길).


영국에 오는 데에만 10시간이 넘게 걸리는 먼 나라 한국에서 회사 눈치를 보며 없는 시간을 쪼개고 쪼개 영국으로 오는 한국사람들에겐 런던을 보는 것만으로도 시간이 부족할 것이기에 지방 소도시 ‘바스(Bath)’는 한국에서 그리 유명한 곳이 아니지만, 유럽에서는 로마시대의 목욕 문화 유적인 ‘로만 바스(Roman Bath, 우리가 알고 있는 ‘Bath’ 단어가 이 도시에서 유래되었다고 한다.)’와 초승달 모양의 아름다운 건축물, ‘로열 크레센트(Royal Crescent)’, 영화 <레미제라블(Les Miserables)>에 나온 ‘풀테니(Pulteney) 다리’, 그리고 위대한 소설가 ‘제인 오스틴(Jane Austen)’이 지냈던 도시 등으로 꽤 유명한 곳이다.

특히 영국 귀족들이 별장을 지어 일년 중 상당기간을 지내기도 했다는 이 도시는 그래서 아주 아름답고 우아하고 고풍스럽다. 영국 내에서도 살기 좋은 도시, 여행가고 싶은 도시로 손에 꼽히는 이런 곳에 사는 것 자체가 여행이고 꿈처럼 느껴지기에 당분간은 굳이 다른 곳을 여행할 필요도 없이 바스에서만 지내도 충분히 행복할 것 같다.


20210809_183535.jpg
20210810_143529.jpg
20210810_183310.jpg
20210911_111456.jpg
20210804_122422.jpg
20210824_171004.jpg
20210819_195956.jpg


그러나 우리에게 주어진 영국에서의 시간은 14개월뿐이었다(남편의 학업기간이다). 우리처럼 1년 남짓 영국에서 지내다가 우리가 영국에 올 때쯤 한국으로 돌아간 남편의 지인이 영국 생활에 대한 딱 하나의 조언을 남기고 떠났다. 바스에서 만난 유일한 한국인 가족 역시 올해 1월말 먼저 한국으로 돌아가며 당부의 말을 남겼다. 공통된 요지는 이렇다.


"시간이 없다. 쉬지 말고 움직일지어다."

처음에는 한 귀로 듣고 반은 마음에 저장, 반은 반대 귀로 흘렸다. 당시의 우리는 새 생활에 적응도 해야 했고, 이것저것 챙길 것이 많아 여행을 생각할 여유가 없었다. 기껏해야 바스 인근 지역을 당일이나 1박 2일 일정으로 돌아볼 뿐이었다. 주변의 다른 나라로 여행가기에도 코로나 사태 때문에 여의치 않아 일단 다음으로 미뤘다. 그리고 그때는 영국에 있는 것만으로도 너무 좋아 다른 나라로 여행 가고 싶다는 생각이 크게 들지 않았다.




점점 시간이 흘러 할로윈이 오고, 크리스마스가 지나고, 해가 바뀌자 불현듯 우리에게 남은 시간이 정말 얼마 없다는 것을 깨달았다.

어디든 예약을 한번 해 볼까 하고 유럽 지도를 펼쳤다. 그러자 이럴 수가! 아이슬란드, 포르투갈, 스페인, 이탈리아, 스웨덴, 덴마크, 핀란드, 노르웨이, 독일, 오스트리아 등등 기회만 있다면 한번쯤 꼭 가보고 싶다고 생각했던 나라의 이름들이 매직아이처럼 앞다투어 눈앞에 어른거렸다. 그간 여유가 없다, 아이들이 어리다, 코로나 시국이다 등등의 이유로 깊이 처박아 두었던 여행의 욕망이 깨어났다.


Screenshot_20220304-094545_Maps.jpg <이미지 출처 : 구글맵>


한번 깨어난 욕망은 머릿속에서 빠르게 계산기를 두드렸다. 유럽 땅에 살고 있는 지금 이 황금 같은 기회를 놓치면 나중에 한국에서 유럽으로 올 때 감당해야할 4인 가족 비행기 값과 열 시간이 넘을 비행시간(아이 둘이 양쪽에 앉아 있는 것을 잊지 말자.), 억지로 일정을 짜내야 하는 여행 기간 마련의 어려움 등 한국으로 돌아간 후 다시 여행을 온다면 겪어야 할 현실적인 어려움들이 마구 몰려 들었다. 아, 선배들의 말씀이 옳다. 움직여야 한다. 떠나야 한다.




그러나 이곳의 여행 같은 생활도 생활은 생활인지라 마음 먹는다고 언제든 떠날 수 있는 것은 아니었다. 가장 큰 고려 요소는 아이들의 학교 일정이었다. 한국 보다 개인적 사정과 자유에 관대할 것 같은 영국의 학교는 예상 외로 학생들의 출석을 아주 중요시 했다.


한국은 일년에 열흘 정도는 ‘현장체험학습’이라는 명목으로 사전 계획서와 사후 보고서를 체출하면 출석으로 인정되는 결석이 가능하다. 보통 그 현장체험학습을 이용해 아이들과 가족여행을 많이 다닌다. 그러나 우리 아이들이 다니는 영국 학교에는 그런 것이 일절 없다. 물론 아이가 아프면 학교에 얘기를 하고 결석을 할 수 있지만 그 외에는 꼭 참석해야 하는 결혼식, 장례식 등 부득이한 사정이 아니면 결석을 하지 않도록 강하게 권고한다(학교 입학시 학생을 성실히 학교에 보낼 것에 대한 보호자 서약서를 제출해야 하는 수준이며, 어제는 학교 교장 선생님의 이름으로 학부모들에게 다시 한번 이를 안내하는 전체 공지 메일이 왔다.).


게다가 영국 달력에는 우리 나라처럼 주말과 이어져 중간 중간 짧은 연휴를 만들어 주는 단비같은 공휴일이 없다. 정확히는 없다기 보다 대체로 이런 날들이 뒤에 설명할 학교방학과 이어져 있어 학기 중에 가볍게 2박 3일 정도의 짧은 여행을 위한 시간을 낼 수가 없다. 프랑스, 독일, 스페인 등에 비하면 영국이 작다고 하지만 아이들과 함께 1박 2일로 여행하기엔 잉글랜드 중북부 지방으로 가는 것도 부담스럽다(왕복 8~10시간이 걸리는 이동 시간에 이젠 커서 낮잠도 잘 안자는 아이들이 1분 마다 ‘언제 도착해? 다 왔어? 아직도 멀었어? 얼마나 남았어?’을 쉼없이 묻는다고 상상해 보시라.)

그럼 언제 여행을 가느냐. 대부분 학교 방학 때 여행을 다닌다. 다행히 영국 학교 학사일정에는 1~2주간의 짧은 방학이 자주 있다.


9월부터 새 학년이 시작되는 영국 학교는 크게 3학기제로 운영된다. 1학기가 9월~12월, 2학기가 1월~4월, 3학기가 5~7월. 1학기와 2학기 끝 무렵에는 각각 크리스마스 연휴와 부활절 연휴가 있어 2주씩 방학을 한다. 3학기 끝에는 다음 새 학년이 시작되는 9월이 오기 전까지 한달이 넘는 긴 방학이 있다.

그런데 이러면 중간중간 짧은 연휴도 없이 아이들 학교 생활이 너무 빡빡할 것 같다. 고작 3번의 방학을 ‘자주’라고 말할 수도 없지. 그래서 여기에 추가로 각 학기마다 중간에 ‘하프텀(Half Term)’이라고 부르는 짧은 방학이 있다. 각각 10월 말, 2월 말, 5월 말에 1주일씩.


이 정도면 여행 다니기에 충분하지 않느냐 말할 수 있겠다. 그리고 사실 일 수 있다. 다만 모두들 같은 시기에 움직이니 모든 것이 비쌀 것은 당연지사. 그 정도는 받아들인다고 해도 아이들 학교 일정이 부모의 일정과 맞지 않으면 꼼짝 없이 집에 있을 수 밖에 없다. 우리가 바로 일정이 맞지 않아 귀한 1학기 하프텀을 집에서 뒹굴며 날린 그 사람들이다(그렇다고 잦은 방학마다 영국 아이들이 집에서 방치될 걱정은 하지 않아도 될 듯하다. 우리는 남편의 학교 학사 일정상 아쉽게 하프텀을 흘려 보냈지만, 주변을 보니 대부분의 부모들은 아이들 학교 일정에 맞춰 휴가를 쓰거나 휴일을 맞아 함께 시간을 보내는 분위기다.).

‘단비 같은 연휴가 없다, 학교의 출석 관리가 빡빡하다’ 등의 불평을 했지만 사실 한 번에 긴 방학이 몰려 있지 않고(심지어 가장 더울 때와 가장 추울 때), 각 계절 마다 1~2주씩 나뉘어 흩어져 있으니 여기서 오래 산다면 매년 시기별로 여행하기 적당한 곳으로 여유 있게 여행할 수 있을 것이다. 아이들을 보호하는 어른의 책임을 중요시 하는 사회 분위기이니 우리 나라처럼 아이들이 학교를 안 가는 날에 회사 눈치를 보며 내 몫의 휴가를 구걸할 필요도 없겠다. 그렇게 살면 정말 너무 좋겠다.


그러나 앞서 말했다시피 우리는 ‘유한한’ 영국 생활자다. 유럽으로 여행 오기가 쉽지 않은 먼 곳의 사람들이며, 그렇기에 아직 가보지 못한 가보고 싶은 나라가 열 손가락으로 부족했다. 하여 우리는 여기 사람들이 몇 년에 걸쳐 쉬엄쉬엄 다닐 곳들을 남은 기간 동안에 최대한 많이 여행하기로 했다. 해외 국내(영국) 가리지 않고, 방학이고 주말이고 학교가 쉬는 날들을 가득 채워 틈만 나면 떠나볼 작정이다.




한국의 아파트와는 완전히 다른 영국 우리집, 2층짜리 주택(Semi-detached House)의 하얀 주방 식탁에 앉아, 안개가 문 앞까지 밀려왔다가 금세 파란 하늘을 보여주고 그러다 불시에 비를 뿌리는 역동적인 하늘과 겨울에도 시들지 않는 집 뒤편 작은 정원의 초록 잔디를 폴딩 도어 유리문 너머로 바라보며 여행 계획(스페인, 이탈리아, 아이슬란드까지는 비행기표 예매를 완료했다)을 짜다가 남편에게 물었다.


“여기서 지내다가 돌아가면 우리도 그전과 같진 않겠지, 뭐든 달라지겠지?! 그때 우리에게 뭐가 남을까?”

“가난이 남겠지.”


그렇다. 이렇게 틈만 나면 떠날 궁리를 하니 우리는 곧 가산을 탕진할 것이다. 한국으로 돌아가면 당분간 손가락만 빨아야 할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나중 일은 그때 생각하자. 지금은 오직 ‘유한한 영국생활자’ 이기에 할 수 있는 ‘틈만 나면 떠나는 여행’을 허투루 흘려 보내는 날 없이 최대한의 효율성으로 최고의 추억을 만들어 보련다.


20211003_172116.jpg


keywor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