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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노현지 Nov 06. 2023

바스의 서점에서 '제인 오스틴'과 '김지영'을 만나다

영국 생활 에세이 <낯선 계절이 알려준 것들> 스핀오프 : 못다한 이야기


  영국 잉글랜드 남서부의 작은 도시 '바스(Bath)'에 도착한 초기 시기, 약 한 달간 머물던 에어비앤비 근처에 서점이 하나 있었다. 진한 파스텔톤의 하늘색 외관이 무척 이국적이고 아름다워, 집에서 나와 시티 센터로 향할 때마다, 또 시티 센터에서 일을 보고 집으로 돌아갈 때마다 발을 멈추지 않을 수 없는 곳이었다.

  이름이 ‘Topping & Company Booksellers’인 이 서점은 아날로그적인 느낌이 물씬 풍겼다. 이곳 말고도 바스 시티 센터에도 2개의 큰 서점이 더 있는데, 그 서점들의 일반적인 서점 인터리어에 비해 더 고풍스럽고 고유한 느낌을 머금은 분위기 때문에 지역 서점인가 했지만, 나중에 보니 영국 곳곳에 체인점이 있는 꽤 유명하고 큰 서점이었다. 그러나 나에게는 바스의 고풍스러운 분위기를 담은 서점, 바스에서 가장 아름다운 서점, 바스의 추억 같은 서점이었다.


< 영국 바스의 서점 'Topping & Company Booksellers' >



  밖에서 볼 때는 폭이 좁아 작은 서점 같지만, 안으로 들어서면 안쪽 깊숙한 곳까지 길게 이어지는 공간의 확장이 더욱 서점을 아득하고 특별하게 만들었다. 천장까지 닿은 높은 책장의 제일 위 칸 책들을 위한 나무 사다리 덕분에 서점은 더욱 운치 있게 보였다. 사다리를 타고 올라가 굳이 맨 위의 책을 꺼내 읽고 싶은 마음을 누르고, 서점 안쪽으로 걸음을 옮기며 빈 틈 없이 서점 내부를 가득 채운 책들을 구경했다. 삐걱삐걱 거리는 나무바닥 소리가 이 서점이 이 자리를 지킨지 꽤 오래되었을 것임을 알려주었다.


< 안쪽으로 깊숙하게 이어지는 지혜의 공간 >



  의자가 마련된 아동 도서 코너는 한층 더 아늑했다. 책을 사랑하는 첫째 아이는 들어서자마자 책을 한 권 골라 이미 자리를 잡았고, 책을 좋아하지 않는 둘째 녀석도 누나를 따라 책을 열심히 구경하며 읽고 싶은 책을 골랐다(둘째 녀석은 역시나 ‘읽고 싶을’ 뿐, 꼭 읽겠다는 건 아니어서 글밥이 거의 없는 체험용 책을 골랐다. 하하)


< 아동 도서 코너, 아이들이 앉아서 책을 읽을 수 있는 의자가 마련되어 있다>



  아이들이 책에 집중하는 동안 나도 나를 위한 책을 한 권 골랐다. 제인 오스틴의 <Pride and Prejudice(오만과 편견)>.

  사실 한글판 <오만과 편견>을 이미 소장하고 있었다. 바스에서 지내기로 결정된 이후, 바스라는 도시에 대해서 알아보다가 제인 오스틴이 바스와 인연이 깊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바스’는 제인 오스틴의 소설에 언급되기도 하고, 실제 제인 오스틴이 머물기도 했던 도시이다). 제인 오스틴의 소설을 원작으로 하는 영화 <오만과 편견>과 <센스 앤 센서빌러티>, 그리고 제인 오스틴의 삶을 상상한 영화 <비커밍 제인> 등을 통해 제인 오스틴의 소설을 알고는 있었으나, 정작 아직 제인 오스틴의 책을 제대로 읽지는 않았다는 것을 깨달았다. 바스에서 제인 오스틴의 책을 읽는다면 소설의 분위기를 한층 느낄 수 있을 것 같아, 한국에서 영국으로 보낼 짐에 <오만과 편견>을 한 권 사서 넣어두었다.

  그 한글판 <오만과 편견>이 한 달 후면 항공편으로 도착할 예정이었지만, 얼마 전 시티 센터에서 본 제인 오스틴 페스티벌(바스에서는 매년 9월이면 제인 오스틴을 기리는 축제가 열린다.)의 잔상이 너무 강렬해서, 읽기 쉽지 않을 것을 알았음에도 원서라도 사서 제인 오스틴의 문장 속으로 하루 빨리 들어가고 싶었다(예상대로 꽤 찬찬하고 긴 <Pride and Prejudice(오만과 편견)>의 시간이었다. 하하하).


< 매년 9월에 바스에서 열리는 '제인 오스틴 페스티벌'과 언제든 방문할 수 있는 '제인 오스틴 센터(우측 하단 사진)' >


< 제인 오스틴의 도시 '바스'에서 읽는 <Pride and Prejudice>, 오래 걸렸다. 하하. >



  여담인데, 바스의 서점에서 내가 <Pride and Prejudice(오만과 편견)>을 읽고 있는 것을 보고, 에어비앤비 주인 아주머니께선 깜짝 놀란 눈으로 나를 한 번 더 쳐다보았다. ‘그 옛날 소설을 (외국인인) 당신이 굳이 왜….?’ 하는 눈빛이 분명했다. 머리카락이 노랗고 눈이 파란 외국인이 우리나라에 와서 <구운몽> 혹은 <춘향전> 같은 고전 소설을 읽고 있는 것을 봤다고 생각하면 나라도 놀랍고 신기하게 바라볼 것 같기는 하다. 온 도시가 시끄럽게 축제를 여는 작가에, 여전히 세계적으로 사랑받는 소설이지만, 영국 안에서만 사는 어떤 영국인들에게는 <오만과 편견>도 그저 옛날 소설 중에 하나일 수 있지 않겠는가.



  한국의 고전 소설을 읽는 외국인을 본 적은 없지만, 영국에서 현재 한국 사회의 한 면을 담은 소설 <82년생 김지영>을 읽는 영국인들은 어딘가에 있을 것 같다.

  바스의 서점에서 아이들과 내가 고른 책을 계산하고 돌아서 나오는데, 서점 한 편에 외국 소설을 번역한 책들을 모아둔 코너가 보였다. 여러 나라의 책들 중 한 권이 유독 눈길을 잡았다. 표지는 낯설지만 분명 낯익은 제목. ‘KIM JIYOUNG, BORN 1982(82년생 김지영)’.


< 영국 바스의 서점에서 만난 반가운 한국 책 '82년생 김지영'>



  영국의 작은 지방 도시의 한 서점에서 만나는 영어로 적힌 한국의 책은 무척 반갑고, 묘하게 이질적이었다. 특히나 이 한국 사회의 가부장적 문제를 지적한 ‘82년생 김지영’의 인생을 영국인들은 과연 어떻게 읽을까? 물론 남성중심의 사회로 발전해 온 인류의 역사는 세계 어디서나 공통이지만, 조선시대 유교 사상의 영향으로 더욱 뿌리 깊게 박힌 가부장적 한국 사회 속 여성이 겪는 불합리한 문제들이 대륙의 반대쪽 끝 섬나라에서 얼마큼의 공감과 의아함를 불러일으킬지 궁금해졌다.

  서점의 나머지 코너를 마저 구경하며 발견한 이 나라의 ‘김지영’들이 알리는 여성의 이야기가 담긴 책에서, 어쩌면 번역된 글자를 따라 서로 역사와 풍습은 다르지만 같은 불편을 감당하며 사는 먼 곳의 ‘또 다른 나’의 안녕을 응원하는 연대가 흐르지 않을까 생각했다.


< 출산의 과정에서 '아이' 뒤로 밀려 등한시 되어 왔던 '여성(산모)'에 관한 책, <After Birth> >




 

  이후 이 서점 앞을 지날 때마다 방앗간을 그냥 지나치지 못하는 참새처럼 서점으로 빨려 들어가 종종 구입한 책들이 한 권, 두 권 쌓였다. 그리고 한 달 뒤 우리가 집을 구해 에어비앤비를 떠날 때쯤 서점 유리창에 현수막이 걸렸다. 곧 이 곳에서의 영업을 종료하고, 바스 시티 센터의 어딘가로 이전을 한다는 내용이었다.

  이사를 하는 것이지, 서점이 사라지는 것이 아닌 데도 섭섭함이 감춰지지 않았다. 비록 나는 이제 겨우 한 달 밖에 알고 지내지 못했지만, 오래된 서점의 한 시대가 막을 내리는 것은 퍽 애석한 일이었다. 그것이 더 나은 내일을 위한 잠깐의 멈춤이라고 하더라도.

  게다가 우리 가족의 첫 바스의 시간을 풍성하게 해 준 서점은 다른 곳이 아닌 바로 여기, 우리가 오가는 길에 자리한 서점이기 때문이었다. 다른 곳에서 새롭게 단장한 서점은 같은 서점이지만, 우리의 바스 정착기의 고군분투 중 작은 낭만이 되어준 시간은 서리지 않은 서점이 될 터였다. 이 다음에 이 서점이 문득 생각날 때 다시 찾을 곳이 사라진다는 사실은 ‘미래의 나’가 느낄 상실감까지 시간을 거슬러 끌고 와 허전한 마음을 배가했다.

  그래도 다행인 것은, 우리가 조금만 더 늦게 바스에 왔다면 이 서점을 알지도 못했을 텐데, 이렇게 아름다운 서점을 볼 수 있었다는 것, 그 서점의 마지막을 함께할 수 있다는 것이었다. 애초에 몰랐다면 섭섭함도 없었을 테니 어쩌면 모르는 것이 나았으려나? 그래도 모르는 것보단 섭섭함을 품는 지금이 더 나을 것 같은 특별함을 선사해 준 바스의 아름다운 서점의 마지막을 끝까지 지켜보았다.    




  몇 달 뒤, 서점은 새로운 곳에서 다시 문을 열었다. 새로운 서점은 입구부터 훨씬 웅장하고, 멋스러워졌다. 내부 공간은 더 넓어졌고, 가운데 공간이 1층과 2층이 한 층으로 뚫려 있어서 1층에서 2층 벽면 서가가 보이는 구조는 서점을 훨씬 광활하고 풍요롭게 만들었다. 지하 1층 공간까지 사용하게 된 서점은 그전보다 책을 3배는 많이 보관하고 있을 듯했다. 나무 느낌의 인테리어 덕분에 새로이 단장한 서점임에도 이전의 서점이 가지고 있던 고풍스러운 느낌은 여전히 가지고 있는 서점이 기대보다 훨씬 근사해서 섭섭하던 마음이 누그러들었다.


< 바스 시티 센터의 새 보금자리에서 한층 웅장해진 'Topping & Company Booksellers'와 어린이 버전 제인 오스틴 소설들>



  이곳에서 첫째 아이는 어린이 버전으로 ‘Retold’된 제인 오스틴의 <Pride and Prejudice(오만과 편견)>를 처음 접했다. 그리고 <Persuasion(설득)>, <Sense & Sensibility(센스 앤 센서빌러티)>, <Emma(엠마)>, <Northanger Abbey(노생거사원)>, <Mansfield Park(맨스필드 파크)> 등을 차례로 섭렵하며 '제인 오스틴 키즈'가 되었다.

  얼마 뒤, 영국 학교 수업시간에 우연히 과거 영국 역사에서 여성의 사회적 지위의 열악함(많은 열악함 중 특히 ‘남자’에게만 재산이 상속되던 관습. 이에 대한 부당함이 <오만과 편견>에서 여자 주인공 엘리자베스와 그 자매들의 상황을 빌어 잘 묘사되고 있다)에 대해 이야기할 때 선생님이 인용한 <오만과 편견>의 내용을 아무런 의문 없이 자연스럽게 이해할 수 있었다고 했다. 재산을 가질 수 없었던 과거 영국 여성 지위의 불공평함에 대해 교실의 많은 아이들이 격렬하게 분노하였다는 소식을 전한 아이는, 그때보다 나아진 현재에 태어난 자신은 행운아라며 가슴을 쓸어내리며 다행스러워했다. 그런 불합리한 시대에도 독립적으로 자신을 지켜간 제인 오스틴이 여전히 사랑받고 있고, 여전히 남아 있는 불합리함을 위해 ‘김지영’들이 대륙을 건너 서로를 읽고 응원하고 있으니 아마도 이 아이가 자라서 만날 사회는 조금 더 조화로운 모습이길 꿈꾸어 본다.


< 딸아이의 책장에 가지런히 꽂혀 있는 어린이용 '제인 오스틴' 소설들 >



  바스의 여러 서점 중에서도 어딘가 제인 오스틴의 우아함과 고풍스러움, 그리고 부드러운 듯하면서도 단호했던 그녀의 삶을 닮은 서점, Topping & Company Booksellers. (이것은 개인적인 생각입니다. 이 서점과 제인 오스틴의 상관 관계는 없습니다.^^)

  혹시 이 다음에 바스에 가게 된다면 ‘로만 바스(Roman Bath, 고대 로마 시대 공중 목욕탕 유적. 바스의 최고 명물)’와 ‘펌프 룸(Pump Room, 로만 바스와 붙어 있는 티 룸(Tea Room), 로만 바스의 광천수를 마셔 볼 수 있다)’, ‘바스 애비(Bath Abbey, 바스 시티 센터의 대표 성당)’와 ‘샐리 런 번(Sally Lunn Bun, 바스에서 가장 오래된 바스번(빵의 한 종류) 가게, 홍차와 곁들여 티 타임을 가질 수 있다)’ 등을 돌아본 뒤, 그 뒤편 광장 옆 길에 있는 이 아름다운 서점에도 한 번쯤 방문해 보면 더욱 다채로운 바스 여행이 될 것이라 생각한다.



< 바스 시티 센터에 새로 오픈한 서점 주변 광장 >



※ 이 글은 영국의 작은 도시 바스(Bath)에서 보낸 일 년을 담은 영국 생활 에세이 <낯선 계절이 알려준 것들>의 스핀오프(Spin-off)로, 책에 담지 못한 소소한 에피소드를 담은 글입니다. 더욱 가득차고 정제된 영국의 작은 도시 생활 이야기가 알고 싶다면 <낯선 계절이 알려준 것들>을 읽어 보세요.


※ <낯선 계절이 알려준 것들>은 교보문고, 예스24, 알라딘, 영풍문고와 동네 서점 등 전국 오온프라인 서점에서 만날 수 있습니다.


※ 가까운 동네 도서관의 희망도서로 신청해서 읽을 수도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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