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국은 도시 주변으로 농장이 상당히 많다. 아주 발달한 나라 같지만, 농업과 축업 또한 큰 비중을 차지하는 곳이 영국이다. 런던 등 대도시를 조금만 벗어나도 도로 양쪽으로 펼쳐진 들판과 좁은 지방 도로에 홀연히 나타나는 소떼들만 봐도 알 수 있다. 농산물 또한 전세계적으로 수입 농산물이 닿지 않는 곳이 없는 요즘에도, 영국 마트에 가면 ‘British’를 자랑스럽게 붙인 과채류나 육가공 제품들이 많다. 우리가 ‘국산’을 선호하는 것과 같은 이치다.
<도시 외곽에 펼쳐진 들판과 홀연히 도로를 막은 소떼, 그리고 'British'를 자랑하는 가공식품>
당연한 말이지만 대도시에서 멀어져 지방으로 갈수록 농장은 더 많다. 그중 일부 농장은 마치 우리나라의 키즈카페처럼 아이들을 위한 말 타기, 동물 먹이주기, 농작물 수확하기, 꼬마기차, 놀이터 등등 여러가지 활동을 마련해 놓고, 아이들에게 동물과 어울려 농장을 체험할 기회를 제공하는 곳도 있다. 많은 아이들이 그렇듯 우리 아이들도 동물을 좋아해서 한 번은 직접 가서 농장 체험을 해 봐야겠다 생각하고 있던 차에, 딸의 생일이 다가와 생일 기념으로 인근의 농장을 방문했다.
< 아이들을 위한 여러가지 활동을 제공하는 영국의 농장 >
때마침 10월이 생일인 딸아이의 생일 기념을 위해 방문한 농장은 화려했다. 농장을 반들반들 윤기나게 빛내는 주황색 빛깔들! 10월과 주황색 하면 무엇이 떠오르는가? 바로 할로윈 장식! 그러나 농장을 빛내는 주황색은 할로윈을 기념하기 위해 풍선이나 소품들로 꾸민 인공적 장식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었다. 농장의 밭 한 곳에 넓게 펼쳐진 진짜 주황색 호박들이 발산하는 자연의 빛깔이었다.
<할로윈을 위해 조성된 영국 농장의 호박 밭>
물론 그 농장의 밭이 호박씨를 심어 키운 진짜 호박 밭은 아니었다. 다른 곳에서 재배한 호박을 가져와 농장의 밭에 넓게 펼쳐 놓고, 농장을 찾은 사람들이 자기만의 호박을 두 손으로 직접(?) 수확(?)해 갈 수 있도록 조성해둔 것이었다. 밭에는 조그만 손수레까지 있어서 ‘농장’이라는 느낌이 한층 생생했다. 그 수레로 아이들도 직접 호박을 옮겨볼 수 있어 한층 즐거운 할로윈 호박 체험이었다(농장 한 편에, 사람들이 호박을 수확하고 나면 허전해질 호박 밭을 다시 채울 호박들이 가득가득 쌓여 있다).
대체로 잿빛인 영국답게 흐린 날이었음에도, 농장의 밭 한 면을 가득 채운 호박들이 생기 있게 존재감을 과시했다. 처음 가 본 농장이고, 처음 맞는 할로윈이기에 정말 조금도 예상하지 못한 농장의 10월 호박 밭 풍경은 너무 낯설고 신선하고 신기해서, 나에겐 영국에서의 할로윈 하면 이 호박 밭 풍경이 제일 먼저 떠오른다.
여기서 딴 호박을 이곳 사람들은 어떻게 이용할까? 농장까지 가지 않아도 이 시기 영국 마트에 가면 가득가득 진열돼 있는 호박들을 말이다.
할로윈의 유래는 여러가지가 있는 듯하지만, 가장 대표적인 것이 켈트족의 죽음의 신에게 제의를 지내는 풍습에서 왔다는 설인 것 같다. 제의를 지낼 때 죽은 혼들이 인간 세상으로 내려와 인간에게 해를 끼칠 수도 있으니, 살아 있는 사람들이 유령 분장을 하고 자기도 유령인 척하는 것이다.
대표적인 ‘유령인 척’ 하는 장식이 바로 이 호박! 호박도 종류가 다양하지만, 신데렐라의 마차가 되어준 바로 그 둥글고 납작한 호박!! 이 호박의 속을 다 긁어내고 칼로 호박에 눈·코·입을 만든 뒤, 그 안에 초를 넣어 불을 밝혀 집 앞에 세워 둔다. 잭오랜턴(Jack-O’-Lantern)이라고 불리는 조간된 호박은 밤에 보면 그 생김이 괴기스러워 보이는데, 그 호박이 자신들의 집에 들어오려고 하는 유령을 막아준다고 여겼던가 보다.
그러나 예전에 비해 점점 바빠지는 현대사회에 이렇게 정식 할로윈 호박 장식을 하는 것은 번거로워서, 요즘은 그냥 등불이 내장된 호박 장식품을 내 놓기도 하고 그냥 호박을 올려두기도 한다. 우리도 작은 호박을 하나 사서 현관문 기둥에 올려 두었다. 할로윈 조각을 할 줄도 모르고, 이 누런 호박을 먹지도 않는 우리가 굳이 호박을, 그것도 소심하게 작은 호박 하나를 사서 올려 둔 데는 이유가 있다. 이 집 앞의 호박 장식(호박 포함)에는 할로윈 행사를 앞두고 마을 공동체 간에 통용되는 암묵적 의미가 있었기 때문이다.
<호박을 조각한 잭오랜턴과 거미로 할로윈 장식을 한 집>
한국에서 할로윈을 기념해 본 적은 없지만, 영국에서는 온 마을과 도시가 할로윈을 위한 장식과 파티 현수막을 내 걸고 있으니 참가하지 않는 것이 이상한 일! 특히나 우리 아이들은 난생처음 맞이하는 할로윈이 다가오자 친구들과 할로윈에 어떤 코스튬을 입을지를 미리부터 얘기하며 할로윈 ‘Trick or Treat’을 고대하고 있었다. 마을의 집마다 문을 두드려 달콤함을 바구니 가득 모으는 할로윈 사탕 사냥을.
그런데 앞뒤 사정을 생각하지 않아도 되는 아이들과 달리 낯선 나라의 이방인 엄마(=나)는 할로윈을 앞두고 한 가지 고민에 빠졌다. 이 할로윈 ‘Trick or Treat’ 하려면 모르는 사람의 집을 두드려야 하는데, 정말 아무 집이나 두드려도 되는 것인지 걱정이 됐다. 문을 두드렸는데, 근엄한 영국 할아버지가 나와 ‘우린 그런 거 안 합니다.’ 하고 단호하게 말하면 어쩌나. 혹은 갓 태어난 아기를 간신히 재워 침대에 눕혔는데 우리가 고작 사탕 하나 얻자고 그 집 문을 두드려 할로윈 유령보다 더 무시무시한 ‘잠투정하는 아기’를 소환해버리면 어찌하나.
나의 걱정을 들은 영국 지인이 웃으면 팁을 알려주었다. 영국에서는 할로윈 ‘Tickle or Treat’을 하는 날 밤, 사탕을 마련해 동네의 꼬마 유령들을 기다리는 집은 할로윈 날 밤 집 앞에 호박(호박을 포함한 할로윈 장식들)을 놓아 둔다고 했다. 사정이 있어 혹은 할로윈을 기념하지 않아 참가하기를 원치 않는 집은 집 안의 불을 꺼 둔다고 한다. 그러니 할로윈 장식이 없거나, 불이 꺼진 집은 방문하지 않는 것이 할로윈을 즐기는 영국인들의 암묵적 룰이었다. 아, 집에 할로윈 장식은 해 두었지만 사정이 있거나 유령들을 직접 마주하는 것은 부담스러운 경우에는 집 앞에 사탕 바구니를 미리 내 놓는 옵션도 있다.
영국인 지인의 친절한 설명으로 이국의 할로윈 분위기를 어느 정도 파악했지만, 그래도 처음 경험하는 할로윈 Trick or Treat이 불안했던 나는 첫째 아이 친구 엄마에게 연락해 함께 동네를 배회하자고 했다. 안그래도 한 무리의 유령들이 동네 작은 공원 앞에서 오후 5시 반에 만나기로 하였다며 흔쾌히 ‘함께’를 수락해 주었다.
낮부터 촘촘히 땋았다가 푼 머리카락에 호그와트 마법 학교 망토를 두르고 헤르미온느로 변신한 첫째 아이와, 할로윈 호박처럼 진한 주황색 공룡수트를 입은 둘째 아이를 대동하고 집을 나섰다.
우리 집 앞 길에는 한 무리의 유령들이 우리보다 한 발 빠르게 할로윈 의식을 거행하고 있었다. 발빠른 유령들이 소심한 작은 호박이 올려진 우리집 문을 두드리는 것이 등 뒤로 느껴졌다. 우리집에는 남편이 사탕과 젤리, 초콜릿 등으로 가득찬 주머니를 들고 유령들을 기다리고 있었다. 부디 유령들을 극진히 대접해 유령의 짓궂은 장난을 당하는 일 없기를!
< 헤르미온느와 주황색 공룡으로 변신한 아이들 >
우리 아이들도 곧 친구들을 만나 한 무리의 무장 유령단이 되어 동네 사방을 돌아다녔다. 걱정한 것이 무색하게 많은 집들이 어린 유령들을 환영해주었고, 어떤 집은 유령을 맞이하는 어른들 또한 할로윈 분장을 하여 친밀감을 높였다. 처음에는 어색해서 내 곁에 붙어 있던 우리 아이들도(할로윈 Trick or Treat 내내 어른들이 함께 했다) 친구들을 따라 적극적인 사탕 사냥을 펼쳤다. 할로윈에 진짜 진심인 듯한 어느 집 앞에서는 섬뜩한 해골과 피로 쓴 듯한 붉은 글씨 때문에 쉽게 집 앞으로 발을 들이지 못하고 주춤거리기도 했다. 하지만 사탕의 힘은 위대했고, 부들부들 떨며 그 집 앞 바구니의 사탕을 한 움큼 쥔 후 뒤도 돌아보지 않고 뛰어나오는 어린 유령들은 용감했다.
< 영국 작은 마을의 할로윈 밤 풍경 >
한 시간이 넘게 안 돌아본 골목이 없게 동네를 휘젓고 나자 추위가 느껴졌다. 유령 사냥 단체도 이만 해체하기로 했다. 집으로 돌아와 아이들의 바구니를 보니 사탕과 젤리, 초콜릿이 2/3 가량 차 있었다. 실제 수확한 것을 생각하면 더 담겨 있어야 했으나, 신이 나서 까만 밤 공기 속을 뛰어다닌 아이들의 바구니에서는 자꾸만 사탕이 떨어졌고, 사탕이 바구니에 안착할 수 있는 적정선이 2/3 였던가 보다. 그것만으로도 엄청난 양의 할로윈 사탕은 사흘만에 둘째 아이에게 배탈을 선사했다.
< 꼬마 유령들의 달콤한 전리품 >
외국 애니메이션에서만 보던 할로윈 Trick or Treat이 아이들에겐 아주 많이 인상적이었나 보다. 다음 해(글을 쓰는 현재 기준으로는 지난 해인 2022년이었다) 10월 중순에 한국으로 돌아올 준비를 하며, 할로윈을 코 앞에 두고 영국을 떠나야 한다는 것에 매우 애석해했다. 한국으로 돌아가면 이렇게 신나는 할로윈을 더는 경험하기 힘들테니까….
그런데 놀랍게도! 겨우 일 년 사이 한국에 무슨 일이 있었는지, 아니면 내가 트렌드에 매우 뒤쳐져 있었던 것인지, 돌아간 10월의 한국 이곳저곳은 할로윈 장식이 가득했다. 번화가의 할로윈 장식이야 무엇으로든 사람들의 눈길과 흥미를 끌어야 하는 마케팅의 힘으로 이해할 수 있었지만, 서울의 끝자락에 있는 거주지 중심 동네의 작은 가게까지 주황색 할로윈 장식들을 내걸어 흔드는 모습은 영국의 낯선 할로윈 풍경보다 더욱 생경하게 느껴졌다. 언제부터 우리나라가 이렇게 할로윈을 즐겼던가. 아마도 코로나 때문에 몇 년간 억눌린 ‘유희’의 욕망이 코로나 종식 분위기와 함께 폭발한 것이 아닌가 나는 생각했다. 그리고 그 응집된 에너지는, 마치 내가 느낀 기묘한 생경함이 불안의 예감이기라도 했던 듯, 감히 상상도 하지 못했던 엄청난 비극으로 돌아왔다.
다시 할로윈이 돌아온다. 살아남은 우리는 아프게 떠난 이들을, 일 년 전 그날의 사고를 반드시 기억할 것이지만, 동시에 살아있는 날들을 즐길 수밖에 없다. 부디 올해의 할로윈은 모두 안전하게 보내기를, 안녕하기를 기도한다.
※ 이 글은 영국의 작은 도시 바스(Bath)에서 보낸 일 년을 담은 영국 생활 에세이 <낯선 계절이 알려준 것들>의 스핀오프(Spin-off)로, 책에 담지 못한 소소한 에피소드를 담은 글입니다. 더욱 가득차고 정갈한 영국의 작은 도시 생활 이야기가 알고 싶다면 <낯선 계절이 알려준 것들>을 읽어 보세요.
※ <낯선 계절이 알려준 것들>은 교보문고, 예스24, 알라딘, 영풍문고와 동네 서점 등 전국 오온프라인 서점에서 만날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