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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노현지 May 30. 2024

<체실 비치에서>를 닮은 체실 비치에서

[런던 빼고 영국 여행] 영국, 도싯, 체실 비치


다시 가고 싶은 영국의 여행지들이 많지만, 제일 처음 여행했던 곳이자, 가장 극적이게 다가왔던 곳인 ‘체실 비치(Chesil Beach)’가 문득문득, 자주 생각 난다. 그래서 <런던 빼고 영국 여행>에서 첫 번째로 여행할 곳으로 잉글랜드 남부 해안에 위치한 ‘체실 비치’를 골랐다.




소설 <체실 비치에서>의 결말을 닮은 ‘체실 비치’


체실 비치로 향하기 전에 먼저 읽어야 할 소설이 있다. 바로 <체실 비치에서>. 참고로, 앞으로의 글에는 부득이하게 소설 <체실 비치에서>의 결말 스포가 포함되어 있다. 스포를 원치 않는 분들은 여기서 멈추길 권한다.


< 이언 매큐언의 소설 <체실 비치에서> 표지 아미지 >


<체실 비치에서>는 <속죄>로 유명한 이언 맥큐언의 소설이다. <체실 비체에서>의 내용을 간단히 정리한다면, 갓 성인이 된 젊은 두 남녀가 만나, 연애를 하고, 결혼을 하고, 그리고 성격 차이로 헤어지는 과정을 담은 소설이라고 요약할 수 있겠다. 어떻게 보면 우리의 생활에서도 쉽게 볼 수 있는, 너무 흔한 사랑 이야기처럼 보인다. 그러나 이 소설 속 두 남녀는 안타깝고, 또 충격적이게도 결혼식을 한 그날 밤, 결별을 맞이한다.


사랑을 받아들이고, 상대를 받아들이는 속도가 아주 달랐던 젊은 두 주인공은, 똑같이 성인이 되었지만 남자는 갓 성인이 되었기에 사랑에 있어 너무 열정적이었고, 여자는 어른이 된 여성, 특히 결혼한 여성으로서 육체적으로 남편을 받아들여야 하는 일에 대한 두려움이 지나치게 컸다.


소설은 이 두 주인공이 결혼 첫날 치르게 되는 첫날밤의 육체적 관계 문제를 중심으로, 인물의 속마음과 감정선의 변화를 치밀하게 묘사하며 두 사람의 갈등을 보여주고 있다. 그러나 그 갈등의 저변에는 단순한 육체적 문제를 넘어, 정신적이고 정서적인 속도의 불일치가 깔려 있다. 특히나 이 소설의 배경이 2차 세계대전을 겪은 후의 영국인데, 보수적인 전통적 가치와 새 시대의 변화가 혼돈되어 있던 시대적 배경이 두 사람의 가치관, 성향의 충돌을 더욱 설득력 있게 보여 준다.


‘세상에서 제일 지탄받는’ 스포일러가 되는 것을 무릅쓰고, 체실 비치를 여행하기에 앞서 소설 <체실 비치에서>의 결말을 얘기할 수밖에 없었던 이유는, 소설 속 두 사람의 결말과, 앞으로 볼 ‘체실 비치’의 풍경이 닮았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두 주인공이 서로를 향해 성급하고도 처절하게 등을 보이며 마지막을 선언했던 바로 그 ‘체실 비치’ 말이다.





끝없는 자갈이 만든 세상의 끝


체실 비치는 영국 잉글랜드 남부 도싯(Dorset)주에 있는 해안이다. 이 체실 비치가 다른 일반적인 해변과 다른 점은, 해변이 모래사장이 아니라 자갈로 이루어져 있다는 점이다. ‘체실(Chesil)’이란 해변의 이름 자체가, 자갈을 뜻하는 고대 영어에서 ‘ceosel’ 또는 ‘cisel’에서 파생되었다고 한다.



< 체실 비치의 자갈 >



물론 해변이 모래사장이 아니라, 조약돌로 이루어진 해변은 체실 비치 말고도 많다. 우리나라에도 ‘몽돌 해수욕장’으로 불리는 여러 자갈 해변이 있다. 그 중 어렸을 때 가족들과 거제도에 있는 몽돌 해수욕장에 간 적이 있었다. 바닷물에서 놀 때, 또 놀고 나서 가족들이 앉아있는 돗자리로 가기 위해 맨발로 자갈 위를 걸을 때면 발이 얼마나 아팠는지. (내가 어릴 때만해도 워터슈즈 같은 것은 상상도 할 수 없었다.) 호되게 발을 혹사시킨 후, 이후로는 자갈 해변으로 해수욕을 가지 않았다. 하하.


흔하다면 흔하고, 놀기에 불호에 가까운 자갈 해변이지만, 이 체실 비치는 그냥 조약돌로 이루어진 해변이라고 하기에 규모가 엄청나다. 체실 비치가 시작되는(혹은 끝나는) 지점 바로 옆의 섬, 포틀랜드 섬(The Isle of Portland)에서부터 서쪽으로 잉글랜드 남부 해안을 따라 29Km나 쭉 이어져 자갈 해변이 뻗어 있다.



< 잉글랜드 도싯주 남부 해안 체실 비치 지도 (출처 : 구글지도) >



게다가 이 자갈 해변과 육지 사이에 석호(Fleet Lagoon)가 발달되어 있어서 또한 흔치 않은 풍경을 보여 준다. 체실 비치의 석호는 영국에서 가장 큰 규모의 석호로, 야생 동/식물들의 서식지로써 중요한 역할을 하기에, 특별히 해양 보호 구역으로 지정되어 관리되고 있다고 한다.



< 체실 비치의 자갈 해변과 육지 사이에 형성된 석호 >



체실 비치의 또 다른 독특함은 길게 뻗은 자갈 해변의 위치에 따라 자갈의 크기가 달라진다는 점이다. 해변의 동쪽 끝인 포틀랜드 섬 쪽은 자갈의 크기가 크고, 서쪽으로 갈수록 자갈 크기가 작아진다고 한다. 그래서 요즘처럼 폰만 켜면 바로 위치를 확인할 수 있는 시절 이전의, 예전 뱃사람들은 갑작스레 파도나 물살에 밀려 예상치 못한 해안에 불시착을 해도 자갈 크기를 보고 그곳이 어디쯤인지 자신의 위치를 파악할 수 있었다는 말이 전해진다. 이런 얘길 들으면 직접 확인해 보고 욕망이 샘솟지만, 이 체실 비치 여행이 혼자만의 여행이 아니라, 9살/6살의 어린 아이들과 함께하는 가족 여행이었기에 자갈 크기를 비교해 볼 만큼 걷지는 못했다.

그러나 꼭 그렇게 오래 걸으며 자갈의 크기가 줄어드는 신기함을 확인하지 않아도, 해변을 처음 보는 그 순간, 첫인상만으로도 놀라움을 자아내고, 온 마음을 흔들어 버리는 것이 체실 비치였다.




체실 비치의 동쪽 끝(포틀랜드 섬 인근) 주차장에 차를 대고, 체실 비치와 육지 사이에 형성된 석호 위를 지나는 다리를 무심히 건너다가 고개를 들었다. 확 트인 공간. 바다는 보이지 않고, 갈색의 거친 땅만 보였다. 눈 앞에 펼쳐진 모든 것이 다 자갈이었다.


< 주차장에서 체실 비치로 가는 다리 >



해변으로 더 가까이 다가가 자갈 위에 섰다. 바다를 향해 언덕처럼 불룩 솟아 있는 자갈이 아득하게 멀었다. 그 너머에 무엇이 있는지 감추고 자갈 언덕은 어서 올라와 자신을 정복하라고, 정상에 우뚝 서라고 손짓했다. 마치 자갈의 사막 같은 공허함. 하늘과 맞닿은 자갈의 정상에 오르면 세상에 끝에 서게 될 것 같은 미지의 두근거림이 느껴졌다.


< 자갈 사막 같은 체실 비치 >



자갈 언덕 위에 올라서자, 아래로 넓은 바다가 철썩였다. 왼편으로는 체실 비치 시작점에 있는 포틀랜드 섬이 보이고, 오른편으로는 자갈길이 끝없이 뻗어 있다. 멀리 소실점까지 끝없이 이어진 자갈과 바다.


< 멀리 포틀랜드 섬이 보이는 체실 비치 >
< 반대방향을 향해 끝없이 이어진 자갈과 바다 >





그들은 헤어질 수밖에... ‘체실 비치’였으므로


자갈 언덕 정상에서 시야를 넓게 두고 서면, 바다와 석호 사이에 난 자갈 길 뷰가 보였다. 머리카락과 옷자락을 정신없이 흔드는 바다 바람 아래 서서 체실 비치를 바라보며, 나는 생각했다.


‘그들은 헤어질 수밖에 없었겠구나. 체실 비치였으므로...’


< 소설의 결말을 예감케 하는,  바다와 석호 사이의 자갈 길 >



이미 소설을 읽어서 결말을 알고 있는데도, 결말이 예감이 되는 기분이었다. 모래나 뻘처럼 서로 밀착되지 못하고, 성기게 놓인 거친 자갈과, 그 자갈을 가운데 둔 채 다시 연결되지 못할 바다와 석호. 이것들이 만드는 풍경이 마치 소설 속에서 서로 하나가 되지 못하는 주인공들의 모습 같았다. 거친 파도가 본능과 자유에 몸을 맡기고 달려드는 남자 주인공이라면, 숨 죽인 석호는 전통과 새로운 시대 속에서 자신 앞에 펼쳐진 낯선 어른의 세계를 두려워하는 여자 주인공이라 말할 수 있을까.



< 소설 책 표지 이미지와 같은 구도의 체실 비치 사진 >



소설과 풍경과 바다 바람에 휩싸여 자갈길 위에 선 나의 뒷모습을 남편이 사진에 담았다. 이 사진 한 장에 체실 비치의 모든 것이 담긴 것 같았다. 남편이 이 사진을 보여줄 때도 별 생각이 없었는데, 나중에 숙소로 돌아와 책을 다시 보니 책 표지 사진 또한 나의 사진과 거의 유사한 구도였다. - 방향이 반대다. 석호와 바다의 방향이 서로 반대.


의도치 않게 책과 유사한 구도의 사진을 찍어 올 만큼 인상적이고 눈을 사로잡는, 바다와 석호 사이의 자갈 길, 체실 비치. 책을 처음 시작할 때는 몰랐으나, 책의 마지막 페이지를 넘긴 후, 그리고 체실 비치를 실제로 눈에 담은 뒤에 다시 돌아보는 책 표지의 무게는 사뭇 달랐다. 체실 비치를 담은 이 한 장면이 책의 모든 것을 품고 있었다.    





자갈을 긁는 파도 소리


모래가 묻지 않는 자갈 위에 누웠다. 소설과 뒤섞인 체실 비치가 무거워, 마음을 조금 뉘어야 했다. (아이들과 남편도 각자 알아서들 열심히 자갈 해변을 즐기고 있으니 걱정마시길!)

자갈이 해변 위로 거칠게 밀려오는 파도 소리가 들렸다. 잔잔하지도, 운치 있지도 않았다. 거칠고 거친 파도. 파도가 자갈 사이를 집요하게 파고들며 자갈을 긁었다. 자갈을 긁는 파도 소리가 애끓는 마음의 소리처럼 들려왔다. 소설의 두 주인공이 서로 사랑함에도 – 두 사람이 서로를 사랑했다는 것만큼은 진실이라 생각한다- 그 마음을 온전히 서로에게 전하고, 또 상대의 사랑을 수용하지 못해서 성급하게 돌아서야 했던, 그 후 내내 아프게 자신의 속을 긁었을 상처받은 마음의 소리.



< 자갈을 긁으며 바다로 쓸려 가는 파도 >
< 자갈을 긁는 파도 소리 영상. 큰 바람 소리 주의 >




내게 바람이 있다면, 이 체실 비치에서 파도 소리를 들으며 종일 앉아 있으며 좋겠다 싶었지만, 여행자에겐 아직 갈 길이 남았고, 아이들의 인내도 바닥이 나 자리에서 일어섰다. 옷과 신발, 발에 묻은 모래를 털 필요도 없이 깔끔해서 또한 좋은 체실 비치였다.






젊은 두 남녀의 아픈 사랑이 남은 체실 비치를 떠나기 전, 체실 비치 바로 옆 포틀랜드 섬의 전망대에 올라, 그곳에서만 볼 수 있다는 체실 비치의 전경을 내려 다 보았다. 소문대로 체실 비치의 전체적인 모습을 한 눈에 담을 수 있는 아주 근사한 전망대였다.



< 포클랜드 섬에서 바라보는 체실 비치 >



체실 비치를 멀리서 바라보니, 자갈이 아니라 그저 다른 해변들과 다를 바 없는 해안처럼 보였다. 아주 먼 훗날, (소설의 끝부분에 나중의 두 사람의 이야기가 잠깐 나오지만, 그것보다도 더 먼 훗날) 긴 인생을 돌려 바라보는 체실 비치는 두 사람에게 어떻게 보일까? 그저 흘러간 숱한 사건 중 하나가 될까, 결코 멀리서 바라볼 수 없을 굵은 자갈 같은 아픔으로 남을까.



한 편의 소설이 펼쳐진 것 같았던 영국 잉글랜드 남부 해안,

<체실 비치에서>를 닮은 ‘체실 비치’ 여행, 마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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