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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노현지 Jun 20. 2024

무계획 도싯 여행의 마지막, 샌드뱅크스 해변

[런던 빼고 영국 여행] 잉글랜드 도싯, 샌드뱅크스 해변


지금까지 체실 비치와 쥐라식 코스트 해안 절벽, 그리고 룰워스 코브까지, 알찬 영국 잉글랜드 남부 도싯 지방의 볼거리들을 소개했지만, 사실 나는 도싯의 해안이 쥐라식 코스트에 해당하는지도, 도싯이 이렇게 볼거리가 많은 여행지인지도 모르고 그곳을 찾았다.

우리 가족이 도싯으로 향한 이유는 아주 단순했다.




우리를 도싯으로 부른 것은 아쿠아리움이었지만...


우리가 영국에 처음 도착한 7월 중순부터 남편과 나는 살 집을 구하고, 차를 마련하는 등 앞으로의 14개월을 위한 정착 준비를 하는 데 모든 에너지를 쏟아붓고 있었다. 그로 인해 두 아이들(당시 만6세, 만 8세) 또한 엄마와 아빠를 따라 여러 숙소를 전전하며, 영어책(영국 학교 대비용)과 테블릿 화면으로 답답한 여름방학을 보내야 했다.


< 왜 인지 자발적으로 이불 샌드위치가 된 아이들 >  



집을 구하기 전까지 한 달 가량 장기 투숙을 했던 에어비앤비로 들어가기 전 며칠 동안은 바스(Bath)의 호텔에서 지냈는데, 보통의 관광지 호텔이 그렇듯 그 호텔 로비에도 바스와 주변 지역에 관한 관광 소책자가 진열되어 있었다. 여행자들을 유혹하기 위해 저마다 큼지막하고 빽빽하고 화려한 표지로 치장한 소책자들이 좁은 책장에서 한 데 엉켜 있으니 오히려 가독성이 떨어져 읽고 싶은 마음이 사라졌다. 그러나 그것은 정차 준비로 여유가 없는 어른의 마음일 뿐이었는지, 아이들은 어지러운 소책자들 속에서 귀신같이 원하는 것을 찾아냈다. 아쿠아리움과 동물원 안내 책자!


< 안내 책자를 찍은 사진이 없어 아쿠아리움 입구 안내 지도로 대신한다. >



그 중 아쿠아리움이 바로 ‘도싯’에 있었고, 귀여운 바다 동물들의 그림과 사진으로 중무장한 아쿠아리움 ‘씨라이프(Sea Life)’ 안내 책자에 홀린 아이들의 성화에 못 이겨, 우리는 거의 무계획의 상태로 8월의 어느 주말 2박 3일의 일정으로 도싯으로 향했다. (참고로, 동물원은 브리스톨에 있었고, 바스에서 30분이면 갈 수 있는 거리라서, 따로 하루 시간을 내어 다녀왔다. 언젠가 브리스톨의 귀여운 동물원도 소개할 수 있길!)  



무작정 떠난 여행이었지만, 이전 세 편의 글에서 언급한 대로 오래된 지구의 역사를 품은 잉글랜드 남부 해협에서 우리는 기대 이상으로 즐거운 시간을 보냈다.


다만 애석하게도, 아이들이 오매불망 기대했고, 우리를 도싯으로 인도한 ‘씨 라이프’는 예상외로 기대에 못 미쳤다. 이 ‘씨 라이프’는 영국 내에서 여러 군데 있는 꽤 유명한 아쿠아리움인 듯했지만, 우리나라의 으리으리한 코엑스 아쿠아리움이나 롯데월드 아쿠아리움 등에 비하면 너무도 기본에 충실한 수족관이었다. 혹시 아이들과의 영국 여행에서 아쿠아리움에 가 볼까 생각했다면, (굳이 영국까지 가서 수족관에 갈 사람들은 거의 없을 것 같지만, ^^;;) 그 시간을 다른 곳에 할애하길 권한다. 그래도 엄마와 아빠가 정착 준비로 바쁜 동안 숙소에 박혀서 고생한 아이들은 행복하게 구경했으니, 그것만으로 충분했다고 생각한다.


< 영국 아쿠아리움 '씨 라이프'의 이모저모 >




대신, 씨 라이프 이상으로 아이들이 무척 즐겁게 보낸 또 하나의 장소가 있었다. 남편에게 쥐라식 코스트 해안 절벽의 미력적인 펍 ‘Square & Compass’를 추천해 주었던 지인이 펍과 함께 알려준 도싯의 근사한 해변, ‘풀 하버(Poole Harbour)’의 ‘샌드 뱅크스(Sand Banks) 해변이다.




유럽 최대의 천연 항구 ‘풀 하버(Poole Harbour)’의 한쪽 날개, 샌드뱅크스(Sandbanks) 해변


풀 하버(Poole Harbour)는 ‘풀(Poole)’이라는 마을 해안가에 있는 항구로 영국의 대표적인 천연 항구이자, 유럽에서 가장 큰 천연 항구로 꼽힌다고 한다. 쥐라식 코스트의 동쪽 끝인 스터드랜드만의 오른쪽 해변과 샌드뱅크스(Sandbanks) 해변이 악수를 할 듯 말듯 가까이 붙어, 별도의 인공 방파제가 필요 없는 천연 항구를 만들었다.


< 풀 하버(Poole Harbour)와 샌드뱅크스(Sandbanks) 해변 위치 (출처 : 구글 지도) >
< 샌드뱅크스 해변 도착 >



해안가의 모래가 곱고, 깨끗해서 큰 사랑을 받는다는 샌드뱅크스의 8월 해변에는 해수욕을 나온 사람들이 많았다. 8월임에도 서늘한 날씨 탓에(우리는 바람막이용 긴 팔을 입어야 할 정도였다) 해수욕을 할 생각 자체를 하지 않아 따로 수영복을 챙겨가지 않았는데, 예상 밖에 많은 아이들이 수영복을 입고 신나게 해수욕을 즐기고 있었다. 명성처럼 ‘백사장’이라는 말에 꼭 맞는 근사한 모래사장을 가진 샌드 뱅크스 해변은 바다의 수심도 얕아 아이들이 놀기에 적당해 보였다.



< 8월의 샌드뱅크스 해변과 해수욕을 즐기는 영국인들 >



수영복을 입은 다른 아이들이 거침없이 물로 뛰어드는 것을 부럽게 바라보던 아이들의 바지를 걷어 올려 주었다. 바람이 많이 부니 옷이 젖지 않게 조심하라고 주의를 줬지만, 고삐 풀린 망아지는 제어가 되지 않듯 발끝에 찰랑이는 바닷물 맛을 본 아이들은 슬금슬금 한 발씩 바다를 향해 깊이 들어갔다. 곧 바지를 적시고, 티셔츠를 적시고, 머리카락을 적셨다.


< 점점 바다를 향해 깊어지는 아이들 >



그 모습을 지켜보던 나 역시 여기서 더 조심하는 것이 무슨 의미가 있냐 싶어, 곧 ‘에라 모르겠다, 바닷물로 돌격’을 외쳤다. 아이들을 이렇게 좋은 바닷가에 데려와서 옷을 적시지 말고 놀라는 것은 애초에 어불성설이었다.




아이들은 내가 통제할 수 없는 거리까지 바다를 향해 들어가 버렸고, 모래사장에 남아 눈으로 아이들을 쫓으며 나도 신발을 벗고 바닷물에 발을 담가 보았다. 물이 엄청나게 차가웠다. 영국에서는 가장 남쪽에 있는 해안이지만, 그래도 위도가 높은 영국 바다의 수온은 어쩔 수 없이 차가웠다.



다행히 활발히 움직이는 아이들에겐 그 정도로 차갑게 느껴지지 않는지, 첫째 아이는 옆의 영국 아이를 따라 가슴 깊이까지 들어가 버렸다. 첫째 보다 어리고 겁이 많은 둘째는 누나를 따라 들어가다가 허리 위쪽까지 젖은 티셔츠에서 불현듯 추위를 느끼고선, 두 손을 들고 물 밖으로 나왔다. 그렇다고 노는 것을 그만 둘 순 없지! 이어지는 모래놀이로 둘째 아이는 순식간에 모래범벅이 되었다. 샌드 뱅크스 해변의 모래는 무척 곱고 잘 뭉쳐져 모래놀이를 하기에 제격이었다.



< 샌드뱅크스 모래로 아빠의 발을 파묻고 있는 둘째 아이 >




멀리 시선을 들자, 오른쪽 바다 너머로 스터드랜드만의 한 쪽 끝자락이 보였다. 내가 서 있는 샌드 뱅크스와 닿을 듯 말 듯 짝을 이뤄, 이 천연 항구 ‘풀 하버’를 이룬 땅 말이다. 솔직하게 말해, 바다 건너편에 보이는 땅이 쥐라식 코스트의 시작점이라는 것은 나중에 안 사실이었다. 미리 알고 갔다면 더욱 의미 있게 바다를 음미할 수 있었겠지만, 그렇지 못했더라도 두 개의 지형이 부드러운 곡선으로 감싸는 먼 바다의 풍경이 잔잔하면서도 광활하게 다가왔다.


< 바다 너머 보이는 땅이 스터드랜드 만의 해안선이다. >
< 먼 시야로 바라보는 풀 하버의 바다 >



즐거운 바다놀이 후 해변을 떠나는 길에 돌아본 해안가 동네 또한 꽤 인상적이었다. 유럽에서 손에 꼽히는 근사한 천연 항구를 내려 다 보기 위해서인지, 해안에서 육지 쪽으로 움푹 들어간 항구 위쪽 마을에는 정갈하고 윤택한 느낌의 주택들이 해안가를 바라보며 앉아 있있다. (보이는 것만큼 가격도 비싼 집들이라고 한다.) 집 앞을 장식하는 야자수 느낌의 정원수와(영국에서도 야자수가 살 수 있다니!) 정박지에 둥둥 떠 있는 요트에서는 괌이나 하와이 같은 휴양지가 연상되었다. 이런 이국적인 모습에서 이곳이 얼마나 인기 있는 휴양지인지 가늠할 수 있었다.


< 풀 해안 인근 동네의 고급 주택가 >




무계획의 여행이 주는 기쁨


도싯을 떠나며 우리는 꼭 다시, 이번 여행보다 길게 시간을 내어 도싯을 방문하자고 약속했다. 당면할 도싯의 가치를 몰랐듯, 이후의 우리에게 펼쳐질 새롭고 근사한 장소들이 얼마나 많을지, 그래서 같은 곳을 두 번 방문한다는 것이 일 년짜리 유한한 영국 생활자에게 얼마나 어려운 일일지 그때는 몰랐다.


결국 다시 찾지 못한 도싯. 그러나 기대가 없었기에 더욱 크게 다가오는 여행의 기쁨을 제대로 알려준 무계획의 도싯, 잉글랜드 남부 해협 여행은 이후의 어떤 여행보다 인상적이고 낭만적인 풍경으로 내 안에 남았다.


< 무계획 도싯 여행이 선사한 멋진 순간들 >



사는 것은 언제나 계획대로 되지 않는다. 예상 보다 길고 험난했던 우리의 영국 정착 준비 기간이 그랬다. (영국 생활기는 에세이 <낯선 계절이 알려준 것들>에 알차게 담아 두었으니, 궁금하신 분들은 한번 읽어 보시길!) 그렇게 정신없는 중에 아쿠아리움을 보기 위해 떠난 도싯 여행은 딱 한 가지 기대했던 아쿠아리움만 빼고 모두 좋았다. 한 달이 되도록 살 집을 구하지 못해 에어비앤비 한 켠에서 매일 배를 까뒤집고 있는 커다란 캐리어 속 옷가지처럼 엉망진창으로 엉킨 마음 속에도 샌드 뱅크스 해변의 고운 모래 입자의 부드러움과 체실 비치의 사무치는 파도 소리, 해안 절벽 끝의 펍이 주는 위안을 느낄 여유는 있었다.  


계획이 틀어진 순간, 또 어떤 계획도 세울 수 없는 순간이 올 때, 나는 도싯의 탁 트인 해안가를 떠올려 보려 한다. 그 순간의 불확실성이 꼭 나쁘게 기록되지만은 않으리라는 무계획의 가치가 잉글랜드 남부 해협의 강한 바다 바람처럼 내 안의 불안을 몰아내어 주길 바라며. 영국에서의 우리의 처음 여행, 무계획의 도싯 여행이 그러했던 것처럼.




[런던 빼고 영국 여행] 잉글랜드 도싯, 샌드뱅크스 해변

무계획 도싯 여행의 마지막, 샌드뱅크스 해변. 마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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