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영국에서 일년을 머무는 동안 살았던 바스(Bath)에서 위쪽으로 올라가면, 과거 영국의 모습을 그대로 간직하고 있어 많은 사람들의 발길을 모으는 여행지가 있다. 바로 ‘코츠월드(Cotswold)’다.
시간이 멈춘 곳, 코츠월드
코츠월드(Cotswolds)는 영국 잉글랜드 남서부에 위치한 지역으로, 글로스터주(Gloucestershire)와 옥스포드주(Oxfordshire), 소머셋주(Somerset) 등 인근 몇 개의 행정구역에 걸쳐 있다. 현대화되지 않은 자연 풍경이 아름답고 곳곳에 오랜 역사를 가진 마을이 많은 것으로 유명한데, 이 특별한 자연경관과 마을들에 대한 보존 가치가 인정되어 영국 내 ‘AONB(우수 자연미관 지역)’으로 지정, 국립공원에 버금가는 보호를 받고 있다.
< 잉글랜드 남서부에 위치한 코츠월드 지도 (출처 : 위키피디아) >
신석기 시대나 고대 로마 시대의 정착 흔적부터 시작해 양모 산업에 기반한 중세 시대 번영의 영광까지 긴 역사를 품고 있는 코츠월드는, 중세 이후 개발의 물결에서는 빗겨 앉았다. 그 결과 도시의 호화로운 모습이 아닌, 전통적인 영국의 시골 풍경을 잘 보존하고 있는데, 지금도 코츠월드에 가면 중세 시대의 교회나 성, 그리고 전통적인 코츠월드 석조 가옥이 여전히 많이 남아 있어 코츠월드만의 독특한 분위기를 전하고 있다. 이런 훼손되지 않은 자연과 전원이 주는 여유와 감성을 그리워하는 도시 생활자들의 잦은 방문으로 인해 코츠월드는 영국의 대표적인 여행지가 되어, 영국 여행 책자(Lonely Planet’s Best of GREAT BRITAIN)에서도 주요 명소로 소개되고 있다.
< 영국 여행 책자에서 주요 영국 여행지로 소개되는 코츠월드 >
영국에서 가장 큰 국립공원인 '레이크 디스트릭트(Lake District) 국립공원'과 '요크셔 데일스(Yorkshire Dales) 국립공원'에 이어 영국에서 세 번째로 큰 보호 지역으로 꼽히는 코츠월드는 넓기도 넓고, 그만큼 유명한 마을(버튼 온 더 워터(Bourton-on-the-Water), 비버리(Bibury), 브로드웨이(Broadway) 등등)이 많아 어느 곳을 방문했느냐에 따라 느끼는 바가 조금씩 다를 것 같다.
이 여러 마을들 중, 나는 가족들과 함께 바스에서 가까운 위치에 있는 ‘캐슬 쿰(Castle Combe)’이란 마을에 다녀왔다. 물론 캐슬 쿰 한 곳을 방문하고 코츠월드를 다 보았다 말할 수는 없을 것이다. 그저 이어서 소개할 캐슬 쿰의 이곳저곳의 사진들을 보며 코츠월드가 어떤 느낌의 곳인지 그 분위기만 전해줄 수 있기를 바란다.
< 코츠월드 내 여러 마을 지도와 '캐슬 쿰'의 위치 (출처 : 구글 이미지) >
슴슴한 듯 고즈넉하고, 투박한 듯 다정한 ‘캐슬 쿰’
캐슬 쿰은 코츠월드의 남쪽에 위치한 작은 마을이다. 캐슬 쿰의 역사는 앞서 말한 코츠월드의 전체적인 역사와 크게 다르지 않다. 로마 시대부터 사람이 살았던 흔적이 있는 이곳은 중세 시대 양모 산업으로 번영했던 곳이다. 그 당시에는 교회도 크고 으리으리하게 짓고, 멋진 저택도 많았던 마을. 그러나 지금은 한적한 영국의 전통적인 시골 풍경을 간직하고 있는 전원의 마을.
코츠월드를 구글에서 검색하면 잘 나오는 구도의 사진이 있는데, 얕은 개울이 흐르고 작은 돌다리가 지나는 마을 전경이다. 위키피디아에서도 코츠월드의 대표 사진으로 등록된 이 사진 속 마을이 캐슬 쿰이다. 돌다리 아래로 흐르는 개울, 그리고 쭉 이어진 석조 건물의 풍경이 아름다워서 많은 사람들이 캐슬 쿰을 방문한다고 한다.
< 코츠월드의 대표 사진으로 쓰이는 캐슬 쿰의 돌다리 뷰(View) (출처 : 구글) >
실제로 바스 주변의 또 다른 작은 마을에 놀러 갔다가 들어간 공예기념품 가게 주인 아저씨와 이런 저런 대화를 나누는 중에(영국인들은 이렇게 처음보는 사람에게도 참 말을 잘 건다), 바스에 산다면 근처에 있는 코츠월드의 캐슬 쿰에 꼭 가 보라는 권유를 받았다. 이미 다녀왔다는 우리의 대답에 ‘이 사람들 뭘 좀 아네’ 하는 만족스러운 표정으로 주인 아저씨는 캐슬 쿰의 특별한 건물과 그곳의 가치 등에 대해 ‘뭐라뭐라뭐라’ 흥분하여 더 많은 말씀을 하셨지만, 이후의 말은 솔직히 잘 못 알아들었다. 하하하. 그러나 대충 흘려들어도 근사한 곳이라는 것만은 분명했던 캐슬 쿰.
캐슬 쿰의 주차장은 마을에서 좀 멀리 떨어져 있다. 주차장에 차를 대고 여름 나무가 무성하게 우거진 길을 20분쯤 걸으면 캐슬 쿰 초입에 도착한다. 걷는 내내 바람을 타고 풍겨오는 초록 내음과 마을로 들어서기 전부터 모습을 드러내는 멋진 석조 건물에 지겨운 줄도 몰랐다.
< 주차장에서 캐슬 쿰으로 들어가는 길 >
마을은 조용하고 한적했다. 마을 입구에는 사각 기둥 같기도 하고 탑 같기도 한 상징물이 지붕을 이고 세워져 있다. 그 주변으로 펍과 음식점이 몇 개 있는 탓인지, 캐슬 쿰으로 여행온 것으로 보이는 여러 사람들이 그 상징물 주변에 앉아 쉬고 있었다.
< 캐슬 쿰 마을 초입 >
상징물을 지나 왼쪽 방향으로 쭉 이어진 길을 따라 걸어 들어가면 유명한 사진 스팟인 개울가의 돌다리도 보이고, 더 많은 석조 건물들과 저택, 교회 등을 볼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점심을 먹지 못한 우리는 마을을 구경하기 전에 배를 좀 채우고 싶었다.
< 마을 안으로 이어진 길 >
바로 앞에 보이는 펍으로 들어갔다. 어둑하고 고풍스러운 내부 인테리어가 꽤 마음에 드는 펍이었는데, 자리를 잡자마자 다시 나와야했다. 오후 2시가 넘은 시각, 부엌이 마감되고 우리가 살 수 있는 것은 맥주와 음료뿐이었다. 다른 가게도 마찬가지였다.
자, 여기서 팁(Tip)이 나간다. 캐슬 쿰에 가고자 한다면 펍이나 식당의 영업 시간은 미리 알아보고 가도록 하자. 또한 워낙 가게가 몇 개 없다 보니 자리잡기가 쉽지 않을 수 있음을 생각해서 미리 밥을 해결하고 오거나, 먹을 것을 따로 챙겨오는 것도 좋을 것 같다. 이곳에는 식사를 대체할 먹을 거리를 살 수 있는 작은 슈퍼 같은 것도 보이지 않았기 때문이다.
< 그윽한 멋이 있었지만 우리에게 내어줄 음식은 없었던 캐슬 쿰 초입의 펍 내부 >
고픈 배는 잠시 접어 두고 마을 구경에 나섰다. 식당에 앉아 쉬면서 뭐라도 먹을 줄 알았는데 계속 걸어야 한다는 말에 아이들의 얼굴이 퉁퉁 부었다. (주차장에서 마을까지 걷는 20분은 아이들에겐 아무런 힐링도 되지 못한 긴 시간이었다.)
< 고픈 배를 참으며 시작한 마을 구경 >
그러나 아름다운 것을 보면 기분이 좋아지는 것은 어른이나 아이나 똑 같았다. 동화 속 그림 같은 마을길을 걸어가면서 예쁜 집과 돌벽, 군데군데 핀 꽃 등에 마음이 풀렸다. 아직도 말이 다니는지, 도로 위에 뭉텅이로 떨어진 말똥과 그 냄새는 웃음을 불렀다. 아직 한창 ‘똥’에 웃을 나이였다.
그렇다. 캐슬 쿰에는 말똥인지 소똥인지, 아무튼 소위 말하는 거름냄새가 종종 불어왔다. 문득 처음 ‘코츠월드’라는 말을 들었던 순간이 생각났다.
‘코츠월드’라는 말을 처음 들은 것은 영화 <로맨틱 홀리데이>에서 미국인 아만다가 실연의 상처를 피해 영국에서 잠시 조용히 지낼 곳을 찾는 장면이었다. 한적한 영국 마을의 집을 안내하는 인터넷 사이트에서 ‘코츠월드’를 검색하자 외양간 혹은 헛간 같은 완전 허름한 집이 나왔다. ‘어후, 아무리 조용해도 이런 집은 안 되지’ 라는 표정으로 다른 곳을 더 검색한 아만다는 결국 ‘서리(Surrey)’라는 마을에서 머문다.
이 장면에서 알 수 있듯 ‘코츠월드’는 영국내에서 정말 ‘찐시골’의 느낌인가 보다. 그리고 그 찐시골의 냄새가 바람을 타고 솔솔 불어와 과거에 머문 이 마을을 우리가 사는 도시의 생활과 더욱 동떨어지게 만들었다. (내내 그런 냄새가 나는 것은 아니니 걱정하지 마시길!)
< 캐슬 쿰의 석조 가옥들과 마을 이곳저곳 >
우리처럼 캐슬 쿰을 구경하러 온 사람들을 따라 마을 안으로 계속 들어가다 보니 개울이 나왔다. 유명하다는 그 개울인가 보다. 개울 주변으로 돌로 만든 집들이 담담하게 서 있었다. 초입부터 이어진 석조 건물의 풍경이 초록의 나무와 어우러져 슴슴한 듯 고즈넉하게 아름다웠다.
< 캐슬 쿰의 '핫스팟'인 돌다리 위에서 >
이 개울가가 명소는 명소인지 주변에 사람들이 많아 자주 보이는 구도의 사진은 찍지 못했다. 대신 개울의 돌난간에 아이들을 들어올려 앉혀주자 점심을 못 먹은 아쉬움이 완전히 사라지고 얼굴에 함박웃음이 피었다.
아이들과 여행을 할수록, 흐트러진 기분을 계속 쌓아두지 않고, 순간순간의 기분에 집중해서 금세 훌훌 털고 ‘지금’을 즐기는 아이들의 단순한 세상이 더 잘 보였다. 놓친 점심을 어떻게 해결할지, 다음은 뭘 할지 등의 고민을 어른이 대신 짊어지니 가능한 일이겠지만, 그런 단순함이 부러웠다.
< 돌다리 난간 위에 걸터 앉는 것만으로도 큰 행복을 느끼는 아이들 >
어쩌면 요즘의 사람들이 코츠월드와 캐슬 쿰 등 자연 속의 마을을 찾는 이유도 이런 단순함과 단조로움에 있는 것이 아닐까. 지나치게 발전해 버린 우리의 삶은 너무 복잡하다. 할 수 있는 것이 많아진 만큼 선택 범위도 넓어지고, 고려해야 할 것도 많아졌다. 작은 물건 하나 사는 것부터 시작해서 아이들을 어떻게 키우고 어디서 살아야 하느냐까지, 나는 언제부턴가 넘쳐나는 정보와 선택 후보가 많아진 생활을 자유보다는 괴로움으로 느끼고 있었다. 가끔은 제발 누가 무조건 이걸 하라고 정해줬으면 하고 바란 적도 있을 만큼.
선택지가 별로 없어 점심 식사를 포기하기 쉬웠던 작은 시골 마을에는 슈퍼 대신, 마을 초입의 작은 집 앞에 ‘할머니 상점’이 있었다. 진짜 이름이 할머니 상점은 아니고, 그 집에 사는 할머니께서 그 지역에서 만든 아이스크림을 판매했다. 유명 관광지라 편의점이 들어올 수도 있었을 텐데 그것 대신 이런 방법으로 마을 사람들의 경제를 지원하는 것 같다. 할머니 상점 옆에는 마찬가지로 집에서 만든 빵과 커피를 판매하는 작은 테이크아웃 카페도 있었다. 여전히 사람들이 살고 있는 마을에 북적북적 외지인들이 쉼없이 드나들어 불편한 것이 한둘이 아닐 텐데, 소소하지만 이렇게 서로 도움이 될 수 있으니 얼마나 좋은가.
< 캐슬 쿰의 주민들이 소박하게 운영하는 아이스크림 가게와 카페 >
무엇보다 문 앞에 툭 놓아둔 미니 테이블과 식탁보, 바람에 날아가지 못하게 집어 둔 빨래집게 등에서 풍기는 소박함이 이 캐슬 쿰이라는 마을의 풍경처럼 사랑스러웠다. 무슨 맛 아이스크림을 먹을지 고민하는 우리 아이들을 다정하게 바라보는 백발의 할머니의 미소에 얼마나 기분이 좋았는지, 그 미소에 미소로 답한 뒤 근처 돌층계에 앉아 먹은 아이스크림 맛이 얼마나 맛있었는지는 말해 무엇할까.
< 다정한 미소가 따뜻한 캐슬 쿰의 할머니 상점 >
투박한 듯 고즈넉하고 고풍스러운 분위기를 자아내는 코츠월드의 캐슬 쿰은 미래를 향해 흐르는 시간의 섭리와 누구보다 더 빠르게, 먼저 앞으로 달려나가려는 현대의 세태를 완전히 거슬러 수세기 전의 어느 때에 멈춰 있는 공간이었다. ‘멈춰 있는 시간’이라고 말할 수도 있을 것 같다. 마을 풍경을 둘러보는 것 외에는 특별히 할 것은 없는 이곳을 심심하게 여길 이들도 있겠지만, 여행 기간이 넉넉하다면 몇 시간이라도 잠시 들러, 이런 자연과 전원이 주는 여유와 감성을 그리워하는 영국인들의 향수를 느껴보는 것도 좋을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