겨울 에든버러(Edinburgh)의 하늘은 낮고, 짙고, 무거운 회색 빛이었다. 물을 가득 머금은 솜 같은 하늘을 기어코 울리고 말 기세로 높이 솟은 건물들이 에든버러 ‘올드 타운’의 중심 거리인 ‘로열 마일’을 따라 강직하게 서 있었다. 꼭 보고 싶었던 에든버러의 겨울 풍경, 그 첫인상은 무겁고 거칠었다.
< 무겁고 거칠었던 에든버러의 첫인상 >
여행은 날씨가 반이라, 날이 흐린 것은 기본이요 심심하면 비가 오는 겨울은 영국 여행을 하는데 좋은 계절이 아니다. 오죽하면 영국에서 만든 영국여행 책자에서도 11월~2월에는 추천하는 여행지가 없다고 할까. 특히나 다른 지역에 비해 더욱 춥고 지형이 험한 북쪽 지방의 스코틀랜드(Scotland)는 가급적 피해야 할 여행지였다.
< 스코틀랜드 남부 에든버러 위치 (출처 : 구글 지도) >
“그런데 나, 겨울 에든버러가 꼭 보고 싶어. 북쪽의 도시는 차갑고 시린 계절을 겪어야 그 도시의 진짜 얼굴을 볼 수 있을 거 같아.”
현실보다 낭만을 추구하는 나의 감상적인 소망에, 9월말부터 전기장판을 찾고 겨울이면 비염을 달고 살아 추위라면 질색하는 남편이 우리의 소중한 연말 연휴 중 며칠을 에든버러에서 보내는 것에 동의했다. 실현 가능성을 떠나 다들 한번쯤은 보고 싶다고 희망하는 ‘오로라’도 단호하게 거절하는 남편 입장에서는 따뜻한 유럽 남부 지역 여행이라는 대안을 포기한 굉장한 결심이었다.
무겁고 비장한 역사의 중심, 에든버러 로열 마일
축축하고 시린 영국의 겨울 안개를 뚫고 ‘에든버러 웨이벌리(Edinburgh Waverley)’ 기차 역에 내려서 처음 마주한 에든버러는, 까마득했다. (웨이벌리 기차역까지 오는 여정은 다음 편에서 ‘해리 포터’와 함께 경쾌하게 소개하겠다.) 먹구름이 잔뜩 낀 흐린 하늘과 닮은 어두운 색감의 건물들이 우리를 내려 다 보았다. 그 고압적인 시선에는 쉽게 속을 내어 주지 않을 것 같은 경계심이 느껴졌다. 나도 모르게 어딘가 위축되는 기분으로 ‘올드 타운(Old Town)’의 ‘로열 마일(Royal Mile)’에 있다는 숙소를 찾아 경사진 길을 걸어 올랐다. 방금 내린 기찻길 너머로 멀리 솟아 있는 ‘저편의’ 에든버러가 보였다.
< 에든버러 웨이벌리 기차역과 옆 앞의 높은 건물들 >
< 구도심 '올드 타운'의 '로열 마일'로 올라가는 길 >
에든버러의 기차역은 에든버러가 처음 생겨난 구도심 ‘올드 타운’과 18세기에 계획적으로 만든 ‘뉴 타운(New Town)’의 가운데 자리 잡고 있다. 에든버러는 그 기차역을 중심으로 양쪽으로 펼쳐진 오르막 지형에 건물들이 켜켜이 쌓여 있는, 전체적으로 ‘V’자 계곡 형세를 띄고 있는 도시이다. 때문에 처음 기차에서 내렸을 때 도시의 모든 전망이 올려다 보였고, 때문에 기차역에서 내렸을 때 ‘고압적인 시선’을 느꼈겠구나 싶었다.
그러나 고지대인 로열 마일에 다 올라서도 '아득하고 압도되는' 기분은 사라지지 않았다.
< 기차역을 중심으로 나눠진 에든버러의 올드 타운(Old Town)과 뉴 타운(New Town) (출처 : 구글) >
< 에든버러 중심 저지대에서 보는 고지대의 로열마일 >
천천히 로열 마일을 따라 그 길 끝의 ‘에든버러 성(Edinburgh Castle)’을 향해 걸었다. 에든버러에서 가장 유명한 길인 이 ‘로열 마일’은 왕이 머물던(지금도 왕이 방문하는 현역 궁전임) ‘홀리루드(Holyrood) 궁전’과 ‘에든버러 성’을 잇는 길이자, 에든버러의 오랜 역사를 간직하고 있는 올드 타운의 메인 도로이다. 에든버러 성입구에서 홀리루드 궁전 앞까지의 거리가 약 1마일(1.6km)인데, 왕이 지나다녔던 1마일의 거리, 그래서 이 길이 ‘로열 마일’이라고 이름 지어졌다고 한다. 이런 에든버러의 긴 역사를 품고 있는 탓에 보통의 여행객들은 이 로열 마일을 중심으로 에든버러를 여행하게 된다.
< '에든버러 성'과 '홀리루드 궁전' 사이 길이 로열 마일이다. (출처 : 구글 지도) >
로열 마일 양쪽에 성벽처럼 웅장하게 솟은 건물을 보기 위해 높이 쳐든 고개를 연신 이리저리 돌리며 감탄을 하다가 깨달았다.
“와, 에딘버러는 바스(Bath) 보다 건물이 진짜 높고, 크다.”
< 에든버러의 높고, 크고 어두운 건물들 >
내가 살고 있는 도시인 '바스(Bath)'를 포함한 잉글랜드 남부 지역의 건물은 대체로 낮다. 2층 혹은 단층 주택이 대부분이고, 길을 따라 길게 늘어선 테라스형 아파트나 빌딩들도 낮은 편이다. 건물의 색감도 에든버러의 건물들 보다 훨씬 연하고 밝다. 모양 역시 조금 더 유려한 느낌.
< 내가 사는 도시 바스(Bath)의 밝고 유려한 건물들 >
반면, 에든버러의 건물들은 앞서 깨달은 대로 높고, 크다. 처음엔 흔히들 자신 보다, 또 기존에 알고 있던 것보다 크고 웅장한 존재 앞에서 내뱉는 감탄인 ‘멋스럽다’라는 말로 나 역시 에든버러를 예찬했다. 그러나 오래된 에든버러의 길을 걸을 수록, 내 어깨에 건물을 짊어 지고 다니는 것도 아니건만, 무거웠다. 높고 큰 것을 넘어서, 거칠고 억셌다. 때론 성난 얼굴 같기도 한 그들은 갑옷과 방패로 무장하고 길 양편을 막고 서 있는 병사와도 같은 모습이었다. 웅장하다는 말로는 부족한 에든버러의 건물에는 어딘가 비장함이 있었다. 아마도 에든버러에 도착한 이후 줄곧 내가 위축되고 압도되는 느낌에 휩싸이는 것 또한 이 ‘무거운 비장함’ 때문이리라.
< 거칠고 무거운 에든버러의 모습들 >
여행 중에 영국 지인과 에든버러에 대해 얘기할 기회가 있었다. 처음 방문한 에든버러가 어떠하냐고 묻는 그녀의 질문에 나는 역시나 가장 인상적이었던 첫인상, 바스를 포함해 이전에 방문한 영국의 다른 지역과는 달랐던, 건물이 높고 큰 것 이상의 에든버러의 무거움과 비장함에 대해 얘기했다. 그녀는 빙긋이 웃으며 내게 ‘잘 보았고, 잘 느꼈다’고 말해 주었다. 그리고 에든버러가 그렇게 느껴지는 이유는 그곳이 오랫동안 ‘지켜야만 하는 도시’였기 때문이라는 설명을 덧붙였다.
스코틀랜드의 남쪽에 위치한 에든버러는 역사적으로 잉글랜드 북부와 맞닿아 지속적으로 국경 수비를 위한 전쟁을 치렀다. 호시탐탐 끊임없이 쳐들어오는 적들의 침략으로부터 가족과 친구, 이웃, 그리고 에든버러 뒤편에 있는 수많은 도시들을 지키기 위해서 국경의 도시는 더 높고 크고 강해야 했다. 매섭게 경계하고 처절하게 막아내야 하는 그곳에선 건물조차 성벽의 역할을 해야 했다. 그들의 운명 같은 강인함과 뜨거운 의지가 담긴 에든버러의 건물은 그래서 높고, 거칠고, 무거웠다.
< '지켜야만 했던 도시'의 대표 건축물 '에든버러 성' >
에든버러의 무거움 위로 꽃 같이 어여쁜 ‘우리 동네’ 바스(Bath)가 겹쳐졌다. 잉글랜드 남쪽의 온화한 날씨를 찾아오는 귀족들의 휴양지이자, 이렇게 모여든 귀족들 사이에 자녀들의 혼담이 오가곤 했다는 도시, 바스(Bath). 그 도시의 역사를 닮아 바스의 건물에는 고풍스럽고 섬세한 아름다움이 있다. 바스의 시티센터를 다닐 때마다, ‘우아하다(Elegant)’는 단어가 이렇게 잘 어울리는 도시가 또 있을까, 하고 감탄했던 순간들이 생각났다. 바스가 ‘바스’만의 우아한 아름다움을 간직할 수 있었던 것은 여기 에든버러가 그러하듯, 스코틀랜드와 맞닿은 잉글랜드 북부 국경의 도시들이 거칠고 억세게 몸집을 쌓아 올려 ‘버티고’, ‘지켜낸’ 덕분일 것이다.
다시 에든버러의 오래된 길, 로열 마일로 나섰다. 목숨이 위협받던 험난한 시대를 살았던 사람들, 그들의 억척스러운 강인함 뒤로 소중한 것들을 잃을지 모른다는 두려움과 그렇기에 절대 내려놓을 수 없었을 고단함을 생각했다. 아직도 누군가를, 무엇인가를 ‘지킨다’는 의미를 온전히 이해하기엔 턱없이 부족하지만, 두 아이를 낳은 이후 삶에 대한 나의 태도가 달라진 것을 느낄 때가 있다. 예전엔 가끔 ‘이대로 멈추면 좋겠다’ 바라기도 했던 마음이 이제는 ‘멈추는 날이 올 까봐 두려운’ 마음으로 바뀌었다. 그 삶이 즐겁든 고단하든, ‘지켜야만 하는’ 삶에는 감히 내려 놓을 수 없는 무게가 있다.
나의 사사로운 마음이 국민과 나라를 수비했던 한 도시의 마음과 비교가 될까마는, 아마도 도시를 수비했던 개개의 병사들의 마음 하나하나는 나와 비슷하지 않았을까? 그래서인지 바스 같은 후방의 도시들 역시, 아니 세상의 모든 도시들이 각자의 위치에서 겪는 나름의 아픔과 슬픔, 또 기쁨, 그 위로 피워낸 아름다움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알면서도, 그 순간만큼은 ‘지켜야만 했던’ 도시들의 비장한 아름다움에 가슴이 저릿했다.
< 강인함 뒤에 고단함이 묻어나는 에든버러의 비장한 아름다움 >
다행스럽게도, 현재의 에든버러는 운명의 무게를 내려놓고 세계 각지에서 온 여행자들을 구경하며 즐거운 하루하루를 보내고 있다. 더 이상 적군의 침략을 수비하지 않아도 되는 평화의 시대. 영광스러운 오래된 도시(Old Town)의 역사를 품은 로열 마일에는 이제는 누가 봐도 관광지임을 알려주는 수많은 기념품 샵, 스코틀랜드의 특산물인 체크무늬 울 캐시미어 가게, 그리고 또 다른 스코틀랜드의 상징인 위스키 샵 등이 자리하며 여행자들에게 스코틀랜드를 소개하고 있다. 또한 세인트 자일스 대성당과 스코틀랜드 출신의 정치경제학자인 아담 스미스, 영국 철학자 데이비드 흄의 동상 등도 빼 놓을 수 없는 볼거리로 여행객들을 맞이하고 있다.
< 여행자들을 기다리는 로열 마일의 볼거리들 >
‘삶’을 향한 좁은 길, Close
‘지켜야만 하는 운명’은 에든버러에 또 다른 이색적인 모습을 남겼다. 로열 마일 양쪽의 높은 건물 아래 쪽에는 ‘Close’라고 불리는 수많은 골목들이 있다. 건물과 건물 사이에 난 좁은 통로이다.
< 로열 마일 건물 틈새로 보이는 좁은 골목 'Close' >
이 클로즈는 로열 마일과 그 뒷편 거리를 이어주는데, 로열 마일에 왕이 지날 때면 일반 백성들은 이 좁은 골목길로 몸을 피했다고도 하고(우리나라의 피맛골 같은 느낌일까), 적이 침략했을 때 이 골목길 뒤로 숨어 문을 잠그고 은신하며 방어를 했다고도 한다.
이 도시의 무거운 운명에 대해 깊게 생각한 탓인지, 나는 후자의 용도에 더 마음이 쓰였다. 언제든 쳐들어올 수 있는 적의 공격에 대비하여 성벽 역할을 한 에든버러의 높은 건물 뒤편에 펼쳐진 은신처이자, 진짜 ‘삶’의 공간. 그래서인지 로열 마일 뒤편의 거리에는 마켓 스트리트(Market Street), 그래스마켓(Grassmarket), 론마켓(Lawnmarket)처럼 ‘마켓(Market)’이란 이름이 붙은 거리가 많다.
지금은 사유지라 문이 닫혀 있는 골목들도 여럿 있지만, 여전히 많은 골목들이 ‘로열 마일’을 찾는 여행객들을 ‘로열 마일’ 아래 쪽에 위치한, 과거 에든버러인들의 진짜 생활이 있던 길들로 이어주고 있다.
골목 너머를 가만히 바라보았다. 언제든 적들의 공격이 있을 수 있다는 긴장감이 감도는 도시였지만, 골목들 뒤에서 펼쳐진 삶에는 그들만의 즐거움이 있지 않았을까? 어쩌면 불안하고 고단했기에 작은 것에도 훨씬 기뻐하고 반짝였을 삶. 골목 뒤편의 오래전 은밀하고 비밀스런 삶을 상상하며, 그들의 삶과 삶 사이를 이어주었을 골목들의 이름을 찬찬히 정성스럽게 눈에 담았다.
악기마저 도시의 운명을 닮은, 백파이프 연주
숙소로 돌아가는 길, 축축하고 시린 에든버러의 밤 공기를 강렬하게 찢는 소리가 울렸다. 소리를 따라 고개를 돌리자 스코틀랜드 전통 의상을 입은 한 남자가 높고 무거운 에든버러의 길 위에 서서 백파이프(Bagpipe)를 연주하고 있었다. TV를 통해 많이 접했지만 이렇게 생생한 소리로는 처음 듣는 백파이프 연주가 신기해서 가던 길을 잠시 멈추었다.
< 에든버러 밤을 흔들던 백파이프 연주 >
백파이프 안으로 바람을 불어넣는 꽉 다문 연주자의 입술이 에든버러의 높은 벽처럼 굳세 보였다. 힘껏 밀어낸 숨이 백파이프를 타고 높은 건물 사이로 울려 퍼졌다. 날아오른 백파이프 소리는 에든버러의 무거운 공기를 빨아들인 듯 끈끈하고 묵직하게 길 위로 내려 앉았다. 어쩌면 스코틀랜드를 상징하는 악기마저 운명을 닮았을까, 혹은 이 도시와 닮아 상징이 되었을까.
< 로열 마일에 울려퍼지던 백파이프 연주 소리 >
백파이프 소리가 울려 퍼지는 하늘 위로, 높이 솟아 있지만 무겁게 내리누르는 에든버러의 시린 겨울 밤. 겨울은 에든버러의 비장한 아름다움을 느끼기에 더할 나위 없는 계절이었다.
< 이제는 평온할 에든버러의 밤 전경 >
[런던 빼고 영국 여행] 영국, 스코틀랜드, 에든버러(Edinburgh)
무겁고 비장한 운명의 흔적, 에든버러 '로열 마일(Royal Mile)' _ 마침
※ 이 글은 에든버러 여행 직후 브런치에 발행했던 에든버러 여행기를 수정하여 다시 올린 글입니다.'런던 빼고 영국 여행' 매거진을 통해 영국 여행 기록을 일원화 하기 위한 재발행이니, 이미 읽으셨던 구독자분들이 계시다면 양해 부탁 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