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런던 빼고 영국 여행] 잉글랜드 안윅 캐슬(Alnwick Castle)
<해리 포터(Harry Potter)>의 흔적을 찾아 영국의 이곳저곳을 참 많이도 찾아다녔다. 지금까지 여행기를 쓴 곳들 중에는 호그와트 대연회장의 모델이 된 ‘옥스포드 대학’, 호그와트 복도 씬나 수업 장면 등을 촬영한 ‘라콕 마을’과 ‘글로스터 대성당’, ‘9와 3/4 승강장’이 있을 런던 ‘킹스크로스역’, 그리고 영화를 촬영한 것은 아니지만 조앤 롤링이 살면서 해리 포터를 집필하여 도시 곳곳에서 <해리 포터>의 감성을 느낄 수 있는 ‘에든버러’ 등이 있고, 아직 여행기로 남기지는 않았으나 너무 유명한 ‘호그와트 익스프레스 철길’인 ‘글랜피넌(Glenfinnan) 고가’에도 다녀왔다.
이외에도 소소해서 다 다루지 않은 곳들까지 포함하면 훨씬 많은데, 나처럼 굳이 찾아다니지 않더라도 곳곳에서 해리 포터의 흔적을 어렵지 않게 만날 수 있는 영국은 나라 전반이 <해리 포터>의 무대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많은 <해리 포터>의 장소들 중에는 영화적으로 큰 의미가 있는 곳도 있고, 풍경 자체로 장관이었던 곳, <해리 포터>를 덜어내고도 볼거리가 많은 곳 등등 각 장소가 전하는 나름의 감상은 조금씩 달랐다. 그렇다면 그 중 가장 즐거웠던 곳은 어디였을까? 나는 주저 없이 ‘안윅 캐슬(Alnwick Castle)’을 꼽을 것이다.
안윅 캐슬(Alnwick Castle, 영어 발음으로는 ‘아닉’이지만 한글 표기법으로는 ‘안윅’이다)은 잉글랜드의 가장 북쪽에 있는 주(州)인 노섬벌랜드(Northumberland)에 있는 중세 시대 성으로, 11세기 말경에 스코틀랜드와의 전투를 대비한 북방 지역 방어를 위해 지어졌다. 14세기 초부터 이 성의 주인이었던 퍼시(Percy) 가문의 사람들이 아직도 살고 있는 안윅 캐슬은 성의 보존 상태가 뛰어나고 성의 규모도 상당하여 영국의 고택 중에서 방문객이 열 번째로 많은 성이라고 한다.
이렇게 영국의 역사와 문화적으로 중요한 고성인 안윅 캐슬이지만, 유라시아 대륙 반대편에서 온 내가 이 성을 찾은 이유는 오로지 <해리 포터> 때문이었다.
안윅 캐슬은 <해리 포터> 영화를 촬영할 때 호그와트를 구현하기 위해 참고했던 성이라고 한다. 조앤 롤링이 에든버러 성을 보면서 호그와트를 상상했다면, 그 성을 실사로 만들어내야 하는 영화 팀은 이 안윅 캐슬을 참고하여 훨씬 웅장한 성을 만들어낸 것이라 보면 될 것 같다. 또한 성 곳곳에서 호그와트의 내/외부 장면을 촬영하기도 했다.
그러나 이 안윅 캐슬에는 단순한 영화 촬영지 이상의 무엇이 있다. 우리가 요크(York)를 떠나 스코틀랜드(Scotland)로 향하는 길에 굳이 안윅 캐슬에 들른 이유도 바로 이것 때문인데, 내게 ‘<해리 포터> 흔적 따라가기’ 여정에서 가장 큰 즐거움을 선사한, 보통의 짧은 여행에서는 시간상의 제약으로 쉽게 갈 수 없는 북부 잉글랜드의 안윅 캐슬에서 펼쳐지는 마법 같은 시간을 이 글을 통해 함께 나누고자 한다.
안윅 캐슬에 방문한 날은 감사하게도 하늘이 무척 파랗고 맑은 날이었다. 거대한 성문을 지나서 성안으로 들어가니 사람들이 꽤 많았다. 그때가 5월말 영국 학교의 중간 방학(Half-term)을 낀 연휴 기간이었다.
중세 시대의 분위기가 고스란히 담긴 성 안에는 여러가지 체험 프로그램들이 진행되고 있었다. 중세 시대 의상 입어보기, 전통 놀이 등 주로 아이들 대상의 활동이었지만 체험을 위해 곳곳에 비치된 소품들을 보는 것만으로도 오래된 성에 생동감이 더해져 기분이 상기되었다. 우리나라의 한옥마을 체험이나 민속촌이 떠올라, 한국이나 영국이나 전통의 공간을 즐기는 방법은 다 비슷하다는 인류학적 보편성의 깨달음으로 미소도 지었다.
성의 또 다른 공간에서는 중세의 의적 로빈 후드(Robin Hood)처럼 활을 쏘아볼 수 있는 궁술 체험이 진행되고 있었다. 활의 무게 때문에 아이들은 체험하기 어려운, 어른들을 위한 체험 프로그램이라 할 수 있는데 그래서인지 유료였다. 하하.
남편이 대표로 나섰다. 남편도 활쏘기가 처음이었다. 진행요원의 설명을 들은 뒤 아이들의 응원을 배경음악 삼아 중세의 고성 초록 잔디 위에 서서 남편이 과녁을 향해 활 시위를 당겼다.
‘팡----------’, 여러 발의 화살이 공기를 가르고 나아갔다.
몇 번의 시행착오 후, 노란색 원 안에 화살 쏘기 성공! 그러나 결과를 떠나 안윅 캐슬의 근사한 풍경 속에서 활시위를 당겨본 것 자체가 이미 만점짜리 경험이었다.
성벽의 타워 내부 일부 공간은 방문객에게 개방되어 있었다.
타워 내부는 간결하고 투박했다. 끊임없는 전쟁의 시대에 지어진 성답게 당시의 무기들이 전시되어 있었는데, 상대적으로 평화의 시대를 살고 있는 내게 큰 인상을 남기지는 못했다. 감사한 일이다.
무거운 이야기가 담긴 어두운 공간에도 창문을 통해 햇살이 스며들었다. 창문마다 아래에 돌의자가 있었다. 병사들은 매일 이곳에 앉아 외부의 동태를 살폈을까? 적군이 찾아오지 않는 날에는 창문 밖으로 보이는 풍경이 가끔 안식이 되었을까?
타워에서 나와 성벽 위에 서면 방금 창문으로 본 풍경을 직관할 수 있다. 병사에게 잠시의 안식을 주지 않을까 상상을 해 볼 만큼 성 뒤편의 들판이 무척 아름다웠다. 영국 시대극 영화의 인트로에 쓰일 것 같은 전형적인 영국의 유려하고 평화로운 들판. 이곳에서 서로를 죽이고, 죽는 전쟁이 있었다는 것이 조금도 믿어지지 않았다.
안윅 캐슬의 이곳 저곳을 구경하다보니 드디어 때가 되었다. 두둥~!!
안윅 캐슬에 도착하자마자 안내데스크로 달려가서 예약했던 수업을 받을 시간. 무슨 수업인고하니, 이름하여 ‘Broomstick Training, 마법 빗자루 수업'이다.
역사적인 의미와 즐거운 체험, 아름다운 풍경을 고루 갖춘 안윅 캐슬이지만, 이곳을 찾는 사람들에게 가장 큰 생생한 즐거움을 주는 것은, 성 안에서 운영하고 있는 ‘마법 빗자루 수업’일 것이다.
마법 빗자루 수업은 호그와트 마법 학교의 정식 과목이다. <해리 포터와 마법사의 돌>에서 1학년 학생들이 후치(Hooch) 교수님께 처음으로 마법 빗자루 수업을 받는 장면이 나온다. 해리 포터는 단번에 성공하고, 론은 갑자기 튀어 오른 빗자루 손잡이에 이마를 맞고, 헤르미온느는 반응 없는 빗자루를 향해 짜증을 삭히는 야무진 입술로 ‘Up’, ‘Up’을 반복해서 명령하던 그 장면. 바로 그 장면을 이 안윅 캐슬의 잔디에서 촬영했다.
그리고 바로 이 잔디 위에서 실제 ‘마법 빗자루 수업(Broomstick Training)’이 진행되고 있다.
보라, 영화의 배경과 같은 공간에서 수업을 위해 잔디 위에 가지런하게 놓인 빗자루들을!
참고로 마법 빗자루 수업은 1~2시간 간격으로 있고, 처음 성에 입장할 때 내는 입장료 외에는 별도의 비용은 없다. 대신 인기가 많으니 성에 도착하자마자 안내데스크에 가서 시간표를 확인하고 예약을 해 두는 것을 추천한다.
나는 아이들만 참여하는 수업인 줄 알고 두 아이만 신청했는데, 실제 수업 받는 학생 구성을 보니 어른들도 꽤 많았다. 마법 만학도의 신청도 편견 없이 받아주는 친절한 수업일 줄이야. 잔디밭 한 편에서 수업을 참관하며 수업을 신청하지 않은 것을 내내 아쉬워했다. 혹시 나중에 이 수업을 들으러 갈 어른이들이 있다면 주저하지 말고 꼭 수업을 받길!
수업 시간이 다가오자 <해리 포터> 영화 속 후치 교수님 같은 분위기의 선생님과 또 다른 한 명의선생님이 등장했다. 선생님들의 등장에 마법 빗자루를 타려는 사람들이 모여들었다. 부지런히 수강신청을 완료한 우리 아이들도 동참했다.
선생님들은 정말 열과 성을 다해 수업을 진행했다. 큰 목소리와 단호한 말투, 적극적인 몸짓으로 수업의 몰입도를 높였다. 미처 이 잔디밭 위의 '마법'을 받아들이지 못하고 아직 ‘현실’에서 뻘쭘하게 서 있는 학생들을 쉼 없이 독려하자 그들도 곧 정신이 혼미해져 수업에 집중할 수 있었다.
수업은 빗자루를 잡는 기초부터 진행되었다. 두 줄로 길게 서로 마주보고 선 학생들이 선생님을 따라 몸풀기 동작과 마법 주문을 연습한 뒤에, 하늘을 찌를 듯한 기압소리로 바닥에 놓인 빗자루를 향해 ‘Grab it now’를 외치며 아무도 눈치채지 못할 만큼 재빠르게 바닥의 빗자루를 집어 들면 성공! 하하하. 선생님들의 진지하고 유머러스한 연기 덕분에 수업에 참여한 학생들도, 주변에서 수업을 참관하던 관객들도 모두 함박웃음으로 마법 빗자루 잡기 성공을 받아들였다.
빗자루를 집었으니, 이젠 빗자루를 타고 날기!
빗자루를 타고 반대편으로 이동하는 것까지 가뿐하게 성공해버린 학생들을 향해 다시 한번 환호와 웃음이 터졌다.
어느 정도 기초 수업이 완성된 후에는 오늘 받은 수업에 대한 테스트가 진행됐다. 어떻게 테스트를 진행할지 토론하는 선생님들의 모습마저 과장되게 진지해 웃음을 부른다.
마침내 합의에 이른 테스트 방법. 멀리 있는 성벽을 향해 누가 빠르게 빗자루를 타고 날아 갔다가 돌아오는지 시합을 하기로 했다. 시작 구호를 기다리는 순간, 그리고 성벽을 향해 다함께 달려가는 순간의 학생들의 모습이 즐겁고도 진지했다.
무사히 테스트를 마친 학생들은 수업이 끝난 뒤 각자 연습했던 빗자루를 가지고 개인적으로 더 연습을 하거나 기념 사진을 찍을 수 있었다.
마법 빗자루 수업 덕분에 이제 우리 아이들은 빗자루를 가뿐하게 들어 올리고, 빗자루를 타고 날 수도 있다. 어쩐 일이지 옆에서 수업 참관만 했는데 머글인 나와 남편까지 빗자루를 들어 올리고, 타고 날 수 있는 것은, 역시 마법의 장소이기 때문일까! 하하.
우리 말고도 잔디밭 곳곳에서 다들 빗자루를 하나씩 들고 이렇게 사진을 찍는다고 깡총깡총 뛰고 있는 모습이 진풍경이었다.
누군가는 이 말도 안되게 어이없는 수업에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지도 모르나, 현장에 있는 모든 이들이 나름 진지했고, 체험 수업 내내 웃음이 만개했던 시간. 어디서 이런 즐겁고 진귀한 집단적인 경험을 또 할 수 있을까. 해리 포터의 나라, 영국이라 가능한 모습이 아닐까 생각해 본다.
안윅 캐슬을 나서는 성문 근처, 여행에서 빠질 수 없는 기념품샵에 들렀다. 그리고 마법 빗자루 수업의 분위기에 흠뻑 빠진 나는 아이들에게 그만 빗자루를 기념품으로 사주고 말았다. 이 빗자루는 바스의 우리 집 2층에서 정원까지 야무지게 우리 아이들과 집에 놀러 온 아이들의 친구들을 날라주다가, 한국으로 돌아오기 전 나무솔이 다 빠져 장렬하게 전사했다.
방문했던 당시에도, 또 지난 추억을 돌이켜 글을 쓰는 지금도 무척 즐겁고 특별한 기억으로 남아있는 잉글랜드 북부 안윅 캐슬과 마법 빗자루 수업. 해리 포터의 팬이라면, 혹은 해리 포터를 좋아하는 아이와의 영국 여행이라면, 더하여 운이 좋아 여행 기간을 넉넉히 가지고 영국으로 향했다면, 안윅 캐슬에 한 번 들러 보길. 즐거운 하루가 기다리고 있을 것이다.
[런던 빼고 영국 여행] 북부 잉글랜드, 안윅 캐슬(Alnwick Castle)
영화보다 즐거운 ‘마법 빗자루 수업’, 안윅 캐슬 _ 마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