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런던 빼고 영국 여행] 스코틀랜드 하이랜드, 글렌피넌 고가교
잉글랜드 북부 ‘안윅 캐슬’에서 ‘마법 빗자루 수업’을 마친 후, 우리는 서둘러 스코틀랜드(Scotland)를 향해 북쪽으로 달렸다. 스코틀랜드, 그 중에서도 북부의 하이랜드(High Lands) 지역으로 가는 길의 풍경이 무척 인상적이었지만, 그 이야기는 다음 편으로 미룰 예정이다. 마법사들을 태우고 호그와트 마법학교로 달리는 ‘호그와트 급행열차(Hogwarts Express)’는 무척 빠르고, 열차가 내뿜는 하얀 연기는 금세 사라지기 때문이다. 우리의 다음 행선지이자, 스코틀랜드에서의 첫 목적지는 영화 <해리 포터>에서 높은 고가 위 철길을 맹렬히 달리는 호그와트 급행열차를 웅장하게 담아낸 장면이 촬영된 ‘글렌피넌 고가교(Glenfinnan Viaduct)’였다.
산악 지형이나 복잡한 지형에 아치 또는 교각 형태로 만든 긴 다리로, 주로 도로나 철로로 이용되는 고가교(Viaduct)는 도로 건설 기술이 발달하면서 이제는 산악 지형뿐 아니라 도심 곳곳에서도 볼 수 있는 흔한 구조물이다. 강변북로에도, 팔당댐 근처에도, KTX가 지나는 철길에도 고가도로 혹은 교량이 있다.
산악 지형이 많은 스코틀랜드에도 고가교가 여러 개 있는데, 특히 유명한 고가교가 우리가 찾은 글렌피넌 고가교다. 스코틀랜드 하이랜드 지역의 글렌피넌 마을 근처에 있어 ‘글렌피넌 고가교’라 불리는 이 고가교는 100여년 전인 1900년 전후에 건설된 것으로, 그전까지 영국 또는 유럽에서 건축에 주로 사용했던 재료인 석조 대신 콘크리트를 사용한 초기 대규모 구조물로 당시 기준으로 매우 혁신적인 고가교였다고 한다.
이 혁신적인 고가교를 영화 <해리 포터와 비밀의 방>에서 해리와 론도 매우 혁신적인 방법으로 달렸다. 도입부에 집요정 ‘도비(Dobby)’의 방해로 해리와 론은 킹스크로스역에서 호그와트행 열차를 타지 못한다. 이에 그들은 론 아빠의 마법 자동차를 타고 날아서 호그와트 마법학교로 향한다.
기차가 아닌 방법으로는 초행길인 둘은 호그와트 급행열차가 달리는 철길 위를 따라 날며 호그와트로 향하는 길을 찾았는데, 역시 달리는 것보다는 나는 것이 빠른지, 예상치 못하게 자동차 뒤편에서 자신들을 향해 맹렬하게 달려오는 호그와트 익스프레스에 해리와 론은 ‘뭉크의 절규’를 연상시키는 표정으로 허겁지겁 기차를 피한다.
이 위험천만하고 스릴 넘치는 장면을 촬영한 곳이 ‘글렌피넌 고가교’다. 스토리의 재미 이상으로 산악 지형을 관통하며 호그와트 익스프레스가 달리는 근사한 풍경에 마음을 빼앗긴 많은 사람들이 이 글랜피넌 고가교를 찾는다고 한다. 유명세 덕분에 이제는 스코틀랜드 여행의 필수 코스로 자리잡았는데, 에든버러에서 글랜피넌까지 가는 패키지 투어 프로그램이 있다고 하니, 우리처럼 자동차로 스코틀랜드를 자유여행할 시간적 여유가 없는 여행자들은 패키지 투어를 이용해도 좋을 것 같다.
긴 글렌피넌 고가교의 어디를 찾아 가야 멋진 철길 풍경을 한 눈에 담을 수 있을까? 뷰포인트가 몇 군데 있는데, 그중 가장 많은 사람들이 찾는 곳이 글렌피넌 고가교 방문자센터 뒤편의 언덕이었다. 아마도 여러 장소들 중 이곳에 방문자센터가 마련되어 있다는 것은, 그럴 가치가 있는 곳이라는 뜻일 것이다. 우리도 수많은 사람들의 발길을 따라 글렌피넌 고가교 방문자센터로 향했다.
글렌피넌 고가교 방문자센터는 영국의 문화유산 지킴이 ‘내셔널 트러스트(National Trust)’에서 운영하는 곳으로, 방문자들을 위한 주차 공간(유료, 내셔널 트러스트 멤버십이 있으면 무료)이 마련되어 있고, ‘무료 화장실’ 이용이 가능했으며, 기념품과 간단한 스낵과 음료를 살 수 있었다. 그리고 방문자센터 벽에서 얻을 수 있는 아주 중요한 팁! 기차가 철길을 지나가는 시간을 알 수 있다. 물론 인터넷으로도 기차 정보를 얻을 수 있고, 기차 시간을 놓치지 않기 위해 우리도 미리 시간을 확인하고 방문했지만, 공식 방문자센터에서 알려주는 열차 시간표는 그 나름의 신뢰와 운치가 있었다.
초록의 풀이 가득한 들판 옆으로 얕은 계곡물이 흐르는 길을 따라 방문자센터 뒤편 고가교를 향해 걸었다. 고가교를 잘 내려다볼 수 있는 곳으로 가려면 어디로 가야하는지 길을 몰라도 아무 걱정이 없다. 나와 같은 마음을 가진 한 부대의 사람들이 줄에 줄을 지어 ‘어느 곳’을 향해 걸어가고 있을지니, 그 틈에 나도 슬쩍 발을 맞추기만 하면 된다.
그러나 너무 많은 사람이 몰릴 때까지 기다리면, 즉 기차가 지나가는 시간에 너무 딱 맞춰서 방문하면 전망 좋은 자리를 확보하기 어려울 수 있으니 조금 여유 있게 가는 것이 좋다. 서두른 여행자도 충분히 길동무를 만날 수 있을 정도로 인기 많은 글렌피넌 고가교이다.
우리가 글렌피넌 고가교를 찾은 날은 ‘날씨의 신’도 고가교를 보기 위해 잠시 글렌피넌에 내려왔던 것 같다.
기본적으로 맑은 파란 하늘을 볼 수 있는 날이긴 했으나, 그럼에도 갑자기 구름이 몰려들고, 비를 뿌리는 것이 영국의 날씨였기에 안심은 금물이었다. 그날도 하늘에 (아주 진한 먹구름은 아니지만) 꽤 두껍고 넓은 구름이 떠 있었다. 구름이 뜨거운 해를 가려주어 고가교 전망 포인트까지 걷고, 또 기차가 올 때까지 기다리는 동안 눈부심을 피할 수는 있었다. 그러나 구름의 그늘이 풍경을 어둡게 만든 것도 사실이었다.
아직 사람들이 많이 오지 않은 뷰포인트에서 마음에 드는 위치를 선점하고 핸드폰 카메라로 찍은 고가교 사진이 구름그늘 때문에 아쉽다 생각할 때쯤, 내 생각에 동의한 날씨의 신이 명령한 듯 구름이 옆으로 비켰다. 태양의 조명이 가득 내리쬐는 글렌피넌 고가교의 풍경은 그야말로 아름다운 풍경이자 영화같은 장면이었다. 철교 주변으로 여러 개의 산봉우리들이 이루는 물결도 장관이었다. 감탄을 하며 찍고 찍고 계속 찍은 사진은 지금 봐도 정말 아름답고, 이 풍경을 직접 내 눈으로 보았다는 것에 때때로 가슴이 벅차오른다.
언덕 위에 더 많은 사람들이 모였다. ‘호그와트 급행열차’가 지나갈 시간이 가까워졌다는 뜻이다. (혹시 오해하는 사람이 있을까 하여 부연설명하자면, 진짜 호그와트 익스프레스는 아니다. 일반 증기기관차다. 하하.)
글렌피넌 고가교에서 호그와트 익스프레스가 달리는 장면을 눈에 담을 단 한번의 기회! 남편은 영상을, 나는 사진을 촬영하기로 업무분장까지 마쳤다. 저 멀리 선처럼 보이는 철길 위로 ‘미약하게’ 등장해 우리를 향해 점차 ‘창대하게’ 달려올 기차를 상상하니 가슴이 두근거리기까지 했다. (기차 하나 보는 걸로 너무 유난한 것 아닌가 하겠지만, 직접 가서 보면 설렘과 기대가 폭발한다.)
기차의 등장을 기다리며 반대편 언덕을 보고 또 바라보았다. 그때 저편 언덕 위에 무엇인가 움직이는 것이 보였다. 가만히 집중해서 보니 사람들이었다.
‘왜 저들은 (사람이 더 많은) ‘여기’로 안 오고 ‘저기’로 갔을까? 그리고 ‘저기’로 가는 길은 어디로 나 있었을까? ‘저기’가 ‘여기’ 보다 더 좋은 뷰포인트인가?’
많은 궁금증이 일었으나, 다른 선택을 하기에는 이미 늦었다. 그리고 우리의 깨달음도 늦었다.
당연한 소리지만 기차는 양방향으로 달리는 교통수단! 우리는 왜 당연히 기차가 멀리서 우리가 있는 곳을 향해 달려올 것이라고 생각했을까? 곧 다가올 기차가 우리를 향해 달려올지, ‘저기’를 향해 달려갈지 알 수 없었다. 어느 방향으로 달리는 게 뭐가 그리 중요하냐고 말하지 말라. ‘호그와트 급행열차’를 연상시키는 기차 하나를 보겠다고 스코틀랜드의 산 속까지 간 우리였다. 그러니 ‘호그와트 급행열차’는 우리를 향해 달려와 주어야 했다.
또 한 가지 난감함은 기차가 어느 방향에서 오는지를 알 수 없다는 것. 방향을 알아야 미리 준비하고 있다가 기차 등장 첫 순간부터 놓치지 않고 눈과 카메라에 담을 수 있는데, 50퍼센트의 확률로 놓칠 수밖에 없는 것이 사뭇 아쉬웠다. (다시 한번 말하지만, 그 기차 하나를 보러 간 것이기에, 그때의 우리는 이런 사소한 것에도 무게를 둘 수밖에 없었다.)
기차가 등장할 시간이 1분도 채 남지 않았다. 기차가 어느 방향에서 등장할지 그때까지도 알 수 없었고, 두근거림은 더 심해졌다.
마침내 기차 등장. 기차는 우리가 있는 언덕 오른편 뒤쪽에서 등장해 ‘저기’를 향해 달려갔다. 사람이 더 많이 모인 ‘여기’로 오지 않은 그들이 맞았다. 우리의 염려대로, 등장 씬(Scene)도 놓쳤다.
방문자센터에 오면 한 무리의 사람들이 자연스럽게 길을 인도해주지만, 혹시라도 영화처럼 달려오는 ‘호그와트 급행열차’의 정면이 보고 싶다면, 조금 더 세심하게 무리의 방향을 살펴 따라가는 것도 좋겠다. 이상은 글렌피넌 고가교를 방문하기로 한 뒤 실제 언덕에 오를 때까지 기차의 방향에 대해서는 한번도 고민하지 않아 눈앞에서 정점을 놓친 경험자의 당부다.
빠르게 우리 곁을 지나쳐 아련하게 뒷모습을 흘리고 떠나는 기차를 눈으로 쫓으며, 살짝 아쉬움이 섞인 웃음을 터트렸다. 그러나 오해하지 말길. 그럼에도 불구하고 초록의 들판을 가로지르며 높은 철교 위를 달리는 증기기관차를 눈앞에서 바라보는 순간은 영화처럼 근사했고, 예상치 못한 반전 시나리오 탓에 더욱 극적이었다.
기차가 시야에서 사라질 때까지 배웅을 하고 돌아나오는 길. 가까이 서서 올려다본 아치형 다리의 글렌피넌 고가교는 실물 크기가 바로 전해져 더욱 웅장했다.
다시 글렌피넌 고가교 방문자센터로 왔다. 돌아내려온 뒤에야 우리가 갔던 길 외에 방문자센터의 다른 방향의 뒤쪽편에서 전망대로 가는 길이 있음을 알았다. 조금은 허탈하고, ‘웃픈’ 순간이었다. (감사한 마음으로 함께 고가교까지 걷고, 함께 열차의 뒤꽁무니를 바라본 동지들에겐 미안한 말이지만) ‘아무나 따라가지 말자’는 어린 날의 교훈도 다시 한번 생각해 봤던 순간이기도 했다. 하하.
아쉬운 마음 때문인지 바로 발길이 떨어지지 않아 방문자센터에서 도로 건너 편으로 언뜻 보이는 동상을 따라 길을 건넜다.
도로 반대편에서 언뜻 보았던 것은 ‘글렌피넌 기념비(Glenfinnan Monument)’의 일부인 ‘하이랜더(Highlander) 동상’이었다. ‘하이랜더’는 스코틀랜드 북부 지역(하이랜드)에 사는 사람을 뜻하는 말이라고 한다. 특정한 역사적 사건과 관련하여 세워진 기념비이긴 하나, ‘하이랜더 동상’에는 침략과 독립의 역사가 이어졌던 척박한 이곳에서 삶을 이어간 스코틀랜드 북부 사람의 정신을 상징하는 의미가 담겨있다고 했다. 동상 아래 새겨진 긴 설명에도 불구하고 그들의 역사를 잘 모르는 이방인에게 역사적인 의미가 깊게 와 닿지는 않았으나, 유명한 위인이 아니라 이곳에서 삶을 영위하고 나라를 지키기 위해 목숨을 바친 ‘아무개’ 하이랜더를 기리는 동상이라는 것이, 평범한 사람의 생을 존중하는 마음 같아 뭉클하게 다가왔다.
동상 옆으로는 저 멀리까지 뻗은 호수가 있었다. 스코틀랜드에서 4번째로 긴 호수라는 로크 실(Loch Shiel).
글렌피넌 고가교 위에서 조명을 조절하던 하늘의 구름이 여기 로크 실에 내려앉아 쉬고 있었다. 아름답다는 말외에는 할말이 없는 고요함이었다.
뒤쪽으로 고개를 돌리면 많은 여행객들로 부산했던 글렌피넌 고가교 전망대와 달리, 호수처럼 고요한 얼굴을 한 글렌피넌의 산이 보였다. 기차 하나를 보겠다고 스코틀랜드 북부 산속까지 찾아와, ‘호그와트 급행열차’의 얼굴을 놓쳤다고 실망했던 것이 미안해지는 풍경. '해덕'으로서 '단 하나의 목표'를 가지고 찾아온 글렌피넌 고가교 여행은 스코틀랜드의 산과 호수를 품고 있는 글렌피넌에서 기차 말고도 아름다운 것들을 가득 담은 아름다운 여행이었다.
[런던 빼고 영국 여행] 스코틀랜드 하이랜드, 글렌피넌 고가교
‘호그와트 익스프레스’가 달리는 글렌피넌 고가교 _ 마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