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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최작가 Nov 19. 2021

인간실격2.

그 누구도 나쁘지 않았다. 다만 슬플 뿐.

저녁7시.

어둑어둑하지만 상점 불빛들이 적당히 있는, 시끄럽지도 조용하지도 않은 거리를 돌아다니고 싶었다. 철저하게 '집안 전용 꾸밈새'를 하고 있었기에 차마 그대로 나갈 수는 없었다. 당장 뛰쳐나가고 싶은 마음을 누르며 초간단 버전으로 외출준비를 했다. 밤공기가 쌀쌀할 것 같아 패딩에 눈이 갔지만 왠지 코트를 입어줘야 할 것 같아 좋아하는 체크무늬 롱코트를 걸치고 밖으로 나갔다. 인간실격 OST를 들으며 뚜렷한 목적지 없이 걷기 시작했다. 방향은 도보로 10~15분 정도 걸리는 중심상가단지 쪽으로 잡았다. 그래야 적당히 불빛도 있고 적당히 번화할테니까.


위드코로나가 시행되었다더니 실감이 났다. 카페마다, 술집마다, 식당마다 사람들이 꽉꽉 들어차 있었다. 생각 이상이었다. 그 동안 저녁약속이 아예 없었던 것은 아닌데 그때는 왜 몰랐을까? 누군가를 만나기 위해서가 아니라 거리를 돌아다니기 위해 거리를 돌아다니다보니 사람들이 더욱 눈에 잘 들어오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그들은 둘이거나 넷이거나 여러명이었다. 한 곳에 모여 웃고 이야기하고 술을 마셨다. 상점 밖에서 흡연을 하는 사람들도 보였다. 방금 보고 나온 드라마 때문인지 다들 조금씩은 쓸쓸해보였다.


드라마 '인간실격'

인간실격은 나의 마음을 한껏 흔들어 놓고 16화를 마지막으로 끝이 났다. 끝까지 마음을 파고들어 산란하게 만들었다. 다 보고 난 후 집 안에 가만히 있을 수가 없었다. 다른 일도 할 수 없었다. 드라마의 여운이 마음에 다 녹아 사라질 때까지 무작정 걷고 싶었다. 그래서 이렇게 나왔다.




이 드라마의 특징은 '큰 사건이 없다'는 것이다. 극적인 사건이 없다. 심각한 일이 터질 것 같다가도 그다지 큰일은 일어나지 않는다. 가장 큰 사건이라고 하면 드라마 시작부에 나오는 <'정우형'의 동반자살 사건>이다. 동반자살이라는 무거운 키워드가 극의 분위기를 누르면서 사건이 전개되지만 그 이후 파격적인 내용이나 자극적인 장면은 하나도 나오지 않는다. 잔잔해서 지루한 느낌은 아니다. 음울한듯 음울하지 않고 심각한듯 심각하지 않게 묘한 분위기로 사람을 홀린다. 드라마의 밀당에 빠져 계속 보게 된달까? 여기에는 왜 큰 사건이 없을까를 생각해 보았다. 이유는 등장인물들이 아무도 '나쁘지 않아서'인 것 같다. 보통 드라마의 큰 사건은 빌런에 의해서 발생한다. 여기에는 딱히 빌런이라고 할 만한 사람이 없다. 


드라마의 초반부를 보면 뭔가 '나쁜사람들'이 많이 나오는 것 같은 느낌이다. 하지만 끝까지 보게되면 그 누구도 나쁘지 않게 느껴진다. 그저 모두, 각자, 얼마씩, 슬플 뿐이다. 슬플수록 날을 세우게 되고, 그 날이 다른 사람을 찌르게 된다. 언뜻 보면 공격적이고 위협적인 것 같지만 잘 들여다보면 날을 세운 사람이 더 무서워하고, 더 많이 상처받고 있다. 그 사람도 다만 '제대로' 살고 싶었을 뿐이다.



( * 주의사항 :  스포일러가 될 수도 있습니다. 스포일러가 싫다면 이후의 글은 그만 읽는 것이 좋겠습니다. )



#1. '인간실격' 속의 빌런



14화 - 41분쯤 : 차 안에서 아란과 부정의 대화


- 아란 : 몇개월이나 됐다며? 지나네서 일한거. 지나가 그러던데.

- 부정 : 6개월 쫌 넘었어요.

- 아란 : (고개를 끄덕이며) 악플 올라올 때 부터네 그럼.

- 부정 : 악플 쓴지는 더 오래 됐구요. 일년도 넘었어요. 원고 막바지때부터 썼으니까. 아직 못보신 것도 많을 거예요. 하고 싶은 말 하세요.

- 아란 : 내가 하고 싶은 말이 뭔데?

- 부정 : 표절 얘기 하고 싶으신 거잖아요.

- 아란 : (기가 막히다는 듯이) 진짜 하나도 안변했다 넌. 뭐가 그렇게 잘났어? 그렇게 잘나서 표절했니? 것도 니가 번역하던 책에서? 난 니가 니 책에다 그랬다는게 믿기지가 않아서 처음 회사에서 그 말 들었을 땐 믿지도 않았어. 너 나한테 처음 찾아와서 책 내자고 했을 때 뭐라그랬니? 넌 책이 좋아서 니 책 하고 싶어서 그것땜에 사는 애라 그랬어. 이런저런 치사한 일 낮이고 밤이고 불러내도 책만드는 게 좋아서 그래서 견디는 거라고. 게시판에 니가 올렸니?

- 부정 : ...

- 아란 : (헛웃음지으며) 하. 하긴 너든 아니든 무슨 상관이야. 어차피 천권도 안팔린 책. 재고 전부 수거해서 폐기하고 절판시켰어. 비슷한 생각은 할 수 있잖아. 번역이 똑같은 게 문제지. 회사에서 너 고소한다는 거 내가 말렸어. 지나집 일은 왜 나가니? 나 엿먹일 거 뭐, 찾니?

- 부정 : (끄덕이며) 네..

- 아란 : 그래서 뭐 좀 찾았어?

- 부정 : (아란쪽으로 고개를 돌려 똑바로 바라보며) 그런걸 다 알려주면서 싸우는 사람도 있어요?

- 아란 : (어이없어하며) 니가 나를 어떻게 이기니??

- 부정 : 꼭 이길려고 싸우는 건 아니잖아요. 못 이겨도 얼마든지 상처낼 수 있어요. 피도 흘리게 할 수 있고요.

매일매일 기도했어요. 지금도 가끔 하고요. 두 분이 그냥 죽어버렸으면 좋겠다고. 남이야 어떻게 되든말든 자기 살 궁리만 하는 쓰레기라고 생각하니까.

- 아란 : (심각하기도 하고 황당하기도 한 표정으로 부정을 바라보며) 이 작가. 너 그렇게 사람 미워하면 병드는 건 너야. 지옥이 따로 있니 사람 미워서 견딜수 없으면 거기가 지옥이지. 어차피 너 나 못이겨. 꿈깨는게 니 건강에 좋을거야. 충고는 아니지만. 나한텐 니께 뭐 없을 것 같애?

- 부정 : (아란을 알 수 없는 표정으로 바라본다)

- 아란 : 너 그렇게 깨끗해?



꼭 이길려고 싸우는 건 아니다. 끝을 알면서도 할 수 밖에 없는 일이 있다. 때로는 결과보다는 과정이 의미있는 일도 있다. 가만히 있을 수 없어서 움직여야 하는 순간도 있다. '사람 미워하면 병드는 건 너'라는 말도 맞다. 알지만 병들어 가면서도 미워할 수 밖에 없는 그런 시기도 있다.


천상 악역 같아 보이는 아란도 알고보면 살기 위해 몸부림 치는 겁많은 사람일 뿐이다. 인터넷에 올라오는 평가에 전전긍긍하고, 폭력을 휘두르고 바람을 피는 남편의 치부를 애써 감춰주며, 표면적으로 다정한 부부의 모습을 유지하고 싶어한다. 전혀 괜찮지 않으면서 괜찮음을 연기하며 태연한 척한다. 꽤 그럴싸하게 보여지는 자기의 모습을 유지하는데 온 인생을 쓰고 있다.


하지만 자기 앞에 툭툭 나타나 성가시게하는 부정을 몹시 거슬려하면서도 마음먹고 치워버리지도 고소하지도 않는다. 의도적으로 부정의 약점을 노린 '깨끗하지 않은 어떤 장면'을 포착해놓고도 비겁한 방식으로 활용하지는 않는다. 의외다. 빌런인듯 빌런아닌 빌런같은 그녀다.


아마 인간실격에서 빌런이라고 할 만한 사람은 아란의 남편인 '서선생' 정도일 것이다. 누가 뭐래도 폭력은 나쁜 거니까.



#2. '인간실격' 속의 불륜


부정이와 강재, 정수와 경은이의 만남은 불륜일까? 조선시대에서 타임워프를 한 것 같은 우리 아부지가 이 드라마를 보신다면 부부가 번갈아 가면서 불륜을 저지르는 볼 가치도 없는 이야기라고 할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내 눈에는 그들 중 누구도 불륜이라는 단어와 어울리지 않는다.


15화 - 16분쯤 : 모텔에서 정수와 경은의 대화 ( 장소는 모텔이지만 둘은 그냥 앉아서 이야기만 하는 상황 )


- 경은 : 사랑해, 정수야.

- 정수 : ... ( 아무말도 못한다 )

- 경은 : 왜?

- 정수 : 갑자기 왜그래.

- 경은 : 옛날에 왜 그 말을 못했나 후회 많이 했어. 농담처럼이라도 한 번 해볼걸. 남편 죽기 전날 물어봤거든. 나 어릴때부터 좋아하는 사람이 있는데 그 사람하고 만나도 되겠냐고. 울더라구. 안된다는 거겠지.


( 정수의 휴대폰이 계속 울린다. 발신자는 울엄마 )


- 경은 : 집이야?

- 정수 : 엄마.

- 경은 : 받지 그래. 급한 일인 것 같은데.

- 정수 : 별일 아냐. 그냥, 거신거야.

- 경은 : 하..... 어떻게 막... 들 만나는지 모르겠다.

- 정수 : 뭐가?

- 경은 : 사람들 말이야. 유부남 유부녀들 서로서로 많이 만나잖아. 니가 전화만 쳐다봐도 심장이 쿵 내려앉는데. 다들 어떻게 만나는 걸까.  ......  난 너 제일 좋아했어 정수야. 지금도 그렇구. 넌 할 말 없어? 마지막일지도 모르는데. 아닐지도 모르지만. (피식 웃는다)

- 정수 : 나는 아직 통장 비밀번호가 그대로야. 니 생일. 대학때부터 한번도 안바꿨어.

- 경은 : 귀찮아서 안바꾼건 아니지?

- 정수 : 반반이야.

- 경은 : (웃는다) 쓸데없이 솔직해 너는.

- 정수 : (한숨을 계속 쉰더니 자리에서 일어난다) ...가자.

- 경은 : 응.



둘은 전에 연애를 길게 했었던 사이다. 헤어지고 각자 다른 사람과 결혼을 했지만 살면서 지치고 힘들 때 생각나고 마음이 쓰이는 서로였던 것이다. 둘 사이에 흔히 '불륜'하면 떠올리기 쉬운 육체적인 관계는 없다. 신경이 쓰이고, 걱정이 되고, 뭔가 해주고 싶고, 그래서 보게되는, 그런 사이다.


정수와 경은의 감정선이 사랑과 우정사이라고 한다면, 부정이와 강재의 감정교류는 훨씬 더 간접적이다. 물론 드라마 후반부에 강재가 급발진하기는 하지만(강재는 젊으니까...하하) 그 부분을 제외하면 둘은 사람과 사람의 진실한 만남 같은 느낌이다. 서로에게 덤덤하게 자기 이야기를 읊어주는 어색하고 싱겁지만 특별한 교류. 그 사이에 점점 짙어지는 미묘한 감정. 둘은 한없이 조심스럽고 한없이 애틋하다.



11화 - 1시간 5분쯤 : 텐트 안에서 부정과 강재의 대화


- 부정 : 파출소에서 경찰이 그랬잖아요. 저수지에서 신고된 거 처음 아닌 거 아냐고.

- 강재 : 그랬죠. 근데 뭐 막상 가서 상황보니까 대충 그냥 그런 느낌이라서 제가 뭐 아는거 이것저것 섞어가지고 적당히 둘러댄거예요.

- 부정 : 어떻게 아냐고 물어보고 싶은게 아니라, 그냥, 후회한다고 말하고 싶었어요. 살면서 제일 후회되는 몇가지 일 중에 하나거든요. 아무한테도 얘기할 수가 없었어요, 챙피해서.

- 강재 : (부정을 쳐다본다)

- 부정 : 아까 공부도 많이했고, 회사도 다녀봤고, 아부지도 남편도 있는데 왜 마음이 허하냐고 그랬잖아요.

- 강재 : 그랬죠.

- 부정 : 난 아무것도 못됐거든요. 그 중에 아무것도.

- 강재 : 뭐가 되고 싶었는데요?

- 부정 : 다요. 욕심 없는 척 겸손한 척 하면서 나쁜 짓도 많이했어요. 다 되고 싶고, 사람들한테 인정받고 싶어서. 아부지한테도 보여주고 싶고 남편한테도 보여주고 싶고 나한테도 보여주고 싶었어요, 내가 어떤 사람인지. 그런데 생각해보니까 꼭 뭐가 되고 싶었던게 아니라 뭐라도 되고 싶었나봐요. 근데 잘 안됐어요.

- 강재 : 그래서 어떻게 하고 싶은데요?

- 부정 : 기다리고 싶어요. 사는게 너무 챙피해서 다 끝내고 싶었는데 지금은 그냥 기다리고 싶어요. 다 지나갈 때까지. 그게 뭔지 알수는 없지만.


12화 - 24분쯤 : 천문대에서 강재와 부정의 대화


- 강재 : 내 일... 내 직업말이에요. 이 일을 하다보면 거의 매일.. 아니 하루에도 몇번씩 호박마차를 타요.

- 부정 : (강재를 쳐다본다)

- 강재 : 몇시부터 몇시까지 약속한 시간만큼 누군가의 친구가 되기도 하고, 연인이 되기도 하고, 가족이 되기도 해요. 근데 최선을 다할수록 허무해져요. 정해진 시간이 지나고 역할이 끝나면 상대는 현실로 돌아가지만 나는 대부분 거기 남아있거든요.

- 부정 : 그만두고 싶다고 생각한 적도 있어요?

- 강재 : 그만두고 싶다는 생각이요? 음... 하죠. 가끔. 선택하면 안되는 일을 선택해서 해야 할때나 내리기 싫은 마차에서 억지로 내려야 할 때. 그러다가 다시 또 다른 마차에 올라타는 거예요. 돈도 벌고 싶고 다른 할 일도 없고. 외로우니까. 그렇다고 이제와서 출근하고 등교하는 인생에 낄 수 없으니까.

- 부정 : 왜요? 아직 젊은데. 왜 그렇게 생각해요?

- 강재 : 왜냐면... 지고 싶지 않으니까요. 잘 모르는 사람들하고 경쟁하고 싶지 않아요. 싸우고 싶지도 않고. 질게 뻔하니까요. 비겁하죠. 아직 젊은데. ( 부정을 바라보며 ) 이런 사람하고.. 나같은 사람하고도 친구할 수 있어요? 손님말고.

- 부정 : ( 강재를 바라본다 )

( 하늘이 어스름이 밝아오며 해가 뜬다. 멋진 하늘이다. 둘은 나란히 일출을 본다. )



이런 식이다. 그저 들어주는 것. 물어봐 주는 것. 안에 무엇이 있는지 궁금해 해주는 것. 어떤 이야기도 할 수 있고 들어줄 수 있는 사이. 나를 알아주고 나를 더 알게 해주는 사람.   


'불륜'을 다룬 컨텐츠는 언제나 논란의 여지가 있다. 아무리 미화해도 불륜은 불륜이라는 시각이 많고, 작품은 좋아하지만 불륜을 미화한 부분은 짜증난다는 경우도 많다. 나는 어떤 편이냐면 '어떤 관계'는 사전적 의미로는 불륜일지 몰라도 정서적 의미로는 불륜이 아니라고 생각하는 편이다. (불륜옹호자는 아님! 단, 부정이와 강재의 관계는 지지하니까 생각을 정리해보고 싶었다.) 한순간의 충동이나 현실도피 수단으로의 만남이 아니라 진실된 소통일 때, 그리고 그 과정에서 주변사람들이 받을 상처에 대해서도 마음을 쓰며, 모두가 망가지지 않는 방향으로 가보려고 애쓰는 태도가 있는 경우, 그걸 불륜이라고 비난하고 싶지 않다. 불륜의 사전적 의미를 내 마음대로 바꿀 수는 없지만, 불륜 하면 떠오르는 어둡고 습하고 파괴적인 정서적 이미지는 떼어주고 싶다. 하긴, 이런 표현 자체가 무슨 의미가 있을까. 감히 나의 얕은 글에 담기 어려운 주제다. 글이 너무 얕아서 설명을 하고 싶었으나 설명이 하나도 안된 느낌이다.

 


#3. '인간실격' 속의 가족 


인간실격에서 두드러지는 것은 무엇보다 '가족'이다. 가족은 크게 '핏줄''같이산다' 두 가지 키워드로 정리해 볼 수 있다. 가족이라고 하면 보통 혈연으로 엮인 사람을 말하거나 같은 생활 공간에서 같이 사는 사람을 말한다. 인간실격 속의 가족은 흩어져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세상 어떤 것 보다도 끈끈하다. 둘도 없이 다정한 부정이와 아부지, 겉으로는 티격태격이지만 늘 서로를 생각하는 정수와 엄마, 핏줄은 아니지만 핏줄보다 더 핏줄같은 부정이 아부지와 정수, 아버지 없이 세상을 함께 담담히 헤쳐온 강재와 강재 엄마.


그리고 남처럼 변질되었나 싶다가도 서로를 위하는 마음은 고스란히 남아있는 부정이와 정수 부부.


16화 - 52분쯤 : 집에서 정수와 부정의 대화


- 정수 : (침대에 앉으며) 자?

- 부정 : (침대에 누워있다. 정수방향으로 등돌려 모로 누운 상태) 아니.

- 정수 : 이런 말이 어떨지 모르겠지만 아부지는 참... 아부지 답게 가셨어. 아무도 성가시게 안하시고 누구한테 조금도 짐이 안되게. 무게가 하나도 없으셔. 나비처럼.

- 부정 : ..응...

- 정수 : 부러워.

- 부정 : 뭐가?

- 정수 : 당신이 아부지 딸인게.

- 부정 : 당신도 아부지 사위잖아.

- 정수 : 난 자격이 없지. 난 자격이 없어.

- 부정 : 비밀얘기하나 해주까. 어머님이랑 다들 아는 얘기 말고. 나 죽으려고 했었어.

- 정수 : ( 부정쪽으로 고개를 돌린다 )

- 부정 : 알고 있었나? 인터넷 자살카페에서 사람들하고 같이. 그건 몰랐지? 돈도 모았어. 5만원씩. 이거저거 필요한게 많대서. 결국 못죽고 아픈아이 치료비에 썼지만. 사전 답사도 가고 그랬어. 만나기도 하고.

- 정수 : 다행이다.

- 부정 : 뭐가?

- 정수 : 안죽고 살아있으니까 다행이라는 거지 뭐가가 어딨어.

- 부정 : 몇달밖에 안됐는데 되게 오래된 일 같애.

- 정수 : 나 그거 알아. 전생 같은거.

- 부정 : 응. 전생같애.... 일년 전에 나한테 고백했었잖아. 옛날에 좋아하던 사람 다시 만난다고. 나 유산했을 무렵에. 그 때 그 얘기 나한테 왜했어? 내가 물어본 것도 아니고 들킨 것도 아닌데. 갑자기 작업방에 들어와서 얘기했잖아. 왜 그랬어?

- 정수 : 미안해. 그 때 나때문에 다들 힘들어했잖아. 내가 죽일놈이야.

- 부정 : 아니.. 그런게 아니야. 그런 얘기하려는게 아니야. 지나간 얘기를 하려는게 아니라 나.... 나도 좋아하는 사람 생긴거 같애. 좋아하는 사람 생겼어. 그냥... 아무한테도 말할 사람이 없어서.. 나는 친구도 없고 아무도 없잖아. 그 때는 이런 얘길 왜 나한테 하나 바보같이 그렇게 생각했는데 지금은 당신이 왜그랬는지 알거 같애. 너무 말하고 싶었던 거잖아. 좋아하면 말해야되니까. 좋아한다고.

- 정수 : ( 눈시울이 붉어지며 그렁그렁 눈물이 맺힌다 ) 어떻게 하고 싶은데?

- 부정 : 그냥. 지금은 좋아한다고 말하고 싶어.

- 정수 : 그 사람한테 얘기했어? 그렇다고?

- 부정 : 말 안했어. 말 안할거고. 당신도 말 안했잖아. 그래서 나한테 말한거잖아. 그사람한테 말할 수 없으니까. 말하면 망가지니까. 둘이 해결할 수 있는 일이 아닌게 되니까.

- 정수 : 그게 그런걸까.. 나 당신 사랑해. 당신한테는 다 줄 수 있어.

- 부정 : ..응..

- 정수 : 진짜야. 내 눈도 줄 수 있고 내 심장도 줄 수 있어. 다 줄 수 있어.

- 부정 : ( 눈시울이 붉어지고 코끝도 빨개진다 ) 나도 그래. 우린 서로 희생할 순 있지만 좋아할 순 없는거야 이제.

- 정수 : 어떻게 하면 좋을까.

- 부정 : 모르겠어.

( 정수는 화장실로 가서 운다. 부정이는 휴대폰에 있는 강재의 연락처를 삭제한다. )



왜 이렇게 되었을까? 부정이와 정수는 행복할 수도 있었을 텐데 그렇게 되지 못했다. 서로를 절절하게 위하는 마음은 있지만 같이 행복해질 수는 없는 사이가 되어버렸다. 정말 어떻게 하면 좋을까?


#4. '인간실격'의 결말


인간실격은 열린 결말로 끝난다. 부정이와 강재가 우연히(?) 어떤 장소에서 마주치는 것으로 드라마가 끝나는데 그 이후에 어떻게 전개될지는 보는 사람의 몫이다. 부정이와 정수는 정리가 되었는지, 정수와 경은이는 진짜 마지막이었는지 보여주지 않는다. 변함없는 강재의 일상과 안정되어 보이는 부정이의 일상이 각각 나올 뿐이다. 그러다가 둘만의 공통 키워드가 있는 장소(별자리 축제)에서 우연히 마주치며 서로를 바라보는 장면으로 끝이 난다. 서로를 보는 복잡미묘한 표정과 눈빛의 떨림. 보고 있으면 가슴이 일렁거리는 것 같다.


열린 결말을 싫어하는 편이지만 인간실격의 열린 결말은 마음에 든다. 아마도 많이 열려있지 않아서일 것이다. 둘은 그렇게 조금 더 행복해지지 않았을까. 진하지도 뜨겁지도 않지만 서로가 서로일 수 있게 이야기를 들어주고 휘청일 때 옆에 있어줄 수 있는 사이. 바라보는 것만으로 힘이 되고 마음이 차오르는 사이. 그들이 같이 행복해졌기를 바란다.





보는 내내 쓸쓸했고 따뜻했다.

쓸쓸하기만 하지도 따뜻하기만 하지도 않아서 위로가 됐다.

인생이란 그런거니까.

드라마 속 인물들과 같이 울고 웃고 아파하며 내 인생도 쓰다듬어 보았다.

내가 꿈꾸던 38세는 어떤 모습이었나.

지금의 나는 어떤가.



16화 - 24분쯤 : (아부지의 장례식 장면이 나오며) 부정의 나레이션


사랑하는 아부지. 아마도 나는 언젠가 마흔이 넘으면 서울이 아닌 어느 곳에 작은 내 집이 있고, 빨래를 널어말릴 마당이나 그게 아니면 작은 서재가 있고 아이는 하나? 아니면 둘? 그리고 운이 좋으면 내 이름의 책이 있는 그런 사람이 되어 있을 거라고, 그게 실패하지 않는 삶이라고, 그게 아부지를 행복하게 하는 길이라고, 그냥 그렇게 믿고 있었던 것 같아요.


어디서부터 잘못됐던 걸까요? 어디서부터 다시 시작해야 하는 걸까요? 아부지. 나는 이제 죽음이 뭔지 산다는 건 또 어떤 건지 조금은 알 것 같은 그런 기분이 들어요. 결국 죽는 일도 사는 일의 일부라는 걸, 그땐 왜 알지 못했을까요. 아부지가 없는 세상에서 하루도 살아본 적이 없는 내가 어떻게 남은 날들을 살아가야 좋을지 알 순 없지만. 아부지. 나는 이제야 아부지가 제게 세상에 태어나 무엇이 되는 것보다 무엇을 하는지가 더 중요하다고 내내 눈으로, 몸으로, 삶으로 얘기해왔었다는 걸 아주 조금씩 천천히 깨달아가고 있어요. 사랑하는. 아부지. 부디. 편히 쉬세요.



글에 담고 싶은 장면장면, 글에 쓰고 싶은 대사대사들이 수두룩 빽빽이다.

글에 다 담지 못한 이야기는 마음에 담았다.

한 달 쯤 지난 후에 또 한 번 볼 생각이다.



-en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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