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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최작가 Nov 10. 2021

인간실격1.

어? 나 드라마 좋아하네.



#1. 드라마를 보았다.


드라마를 보았다. 

드라마를 보는 일은 무기력해도 할 수 있다.

나의 집에는 TV가 없고 프로그램의 시간에 나의 시간을 맞추는 일을 별로 좋아하지 않기 때문에 보고 싶은 드라마가 있으면 스트리밍 서비스를 이용하는 편이다. 사실 가장 좋아하는 TV프로그램 장르가 드라마다. 좋아하는 만큼 푹 빠져들기 때문에 한번 꽂히면 다른 일을 젖혀두고 정주행을 하기 일쑤이며, 시청을 하는 동안에 딴 짓(예를 들면 빨래를 갠다거나 정리를 한다거나 하는 등의 잡일. 보통은 효율적이라는 이유로 드라마를 틀어놓고 이런 일들을 한다)을 전혀 하지 않는 타입이어서 드라마를 본다는 것은 상당한 시간이 고스란히 소요되는 일이다.


직장인 시절에는 드라마를 보는 시간이 휴식시간이자 힐링시간이자 기분전환시간이자 동기부여마저 되는 시간이었다. 나의 세계와는 또 다른 세계를 알고 느낄 수 있게 되어 생각의 범주가 확장되고 마음을 사용하는 반경이 넓어진다. 예고없이 심장을 파고드는 주옥같은 명대사가 나올때면 짜릿하기까지 하다. 요즘 말로 미쳤다! 찢었다!는 감탄사가 절로 나온다. 


#2. 드라마 친구 책에 대한 예찬


같은 이유로 책을 좋아한다. 드라마에도 책에도 마음을 움직이는 힘이 있다. 하지만 취미를 늘 드라마보기가 아니라 독서라고 대답하는 이유는 책이 드라마보다 시간과 공간의 제약에서 자유롭기 때문이다. 책은 언제 어디서든 주변에 영향을 미치지 않고 볼 수 있다. 중간에 흐름을 끊었다가 다시 집중하기에도 용이하다. 누군가는 책이 더 깊이 있기 때문에 더 좋은 것 아니냐고 한다. 나는 아니다. 깊이 같은건 잘 모르겠다. 마음을 휘어잡는 강도는 비슷하다고 느낀다. 


책이 더 좋은 진짜 이유를 굳이 설명하자면 드라마는 세상을 구체화시켜서 보여주지만 책은 상상력에 기반한 세상을 보여준다는 것이다. 누군가의 색깔로 창조된 세상이 아니라 나만의 색깔로 창조한 세상을 볼 수 있다는 면에서 책에 조금 더 후한 점수를 줄 수 밖에 없다.


#3. 다시 드라마 이야기 - 돈과 드라마


직장을 그만둔 이후로는 드라마를 보는 데 시간을 쓰면 안될 것 같아서 잘 보지 않게 되었다. 직장을 그만 둔 이후의 나의 시간은 내가 하는 대로 돈이 될 수도 먼지가 될 수도 있었기 때문이다. 돈이 될 수 있는 일이나 돈과 연결되는 일에 시간을 써야한다는 생각을 달고 다녔기에, 드라마를 자연스럽게 멀리하게 되었다. 


사실 생각만 돈돈거렸지 실행이 따라주지는 못했기에 드라마를 마음껏 봤어도 괜찮았을 것이다. 돈돈거리느라 드라마도 못봤는데 돈도 못벌었다. 웃픈 일이다. 그래서 요즘엔 드라마를 많이 보았다. 보복소비와 유사한 심리다. 글로벌 시장에 K컨텐츠 열풍을 가져온 오징어게임은 당연히 봤고, 그 바로 전에 이슈가 되었던 DP도 봤고, 최근 종영된 이하늬 주연의 원더우먼도 봤다. 아, 유미의 세포들도 정주행했구나. 보고싶은 화제작들을 다 보고나니 딱히 보고 싶은게 없었는데 단지 '드라마를 보고 싶어서' 드라마를 찾았다. 이건 회사 다닐때나 하던 짓인데 정말 오랜만이다.


그렇게 고른 드라마가 '인간실격'이다. 전도연, 류준열 주연. 분위기가 칙칙하고 음울한 것이 요즘 내 마음색과 비슷한 것 같아 골랐는데 왠걸. 첫화부터 기대 이상이다.


#4. 드라마 '인간실격'


전도연의 극중 이름은 이부정. 정많은 부자가 되라는 뜻으로 아부지가 지어준 이름이라고 한다. 극중에 이부정과 이부정의 아부지가 같이 있는 씬이 많이 나오는데 이 둘의 케미가 너무 좋다. 아버지와 딸. 어머니가 일찍 돌아가셔서 생기는 어쩔 수 없는 빈자리의 슬픔. 넉넉함 근처에도 가보지 못한 팍팍한 살림 속에 둘이 헤쳐왔을 시간들. 여유가 없기에 틀어지기도 쉬웠을텐데 둘은 참 꼬인것도 없이 서로에게 다정하다. 


나는 1화부터 마음을 두드려 맞았다. 1화 후반부에 나오는 부정이와 아부지의 버스정류장 씬.



- 부정 : (울먹이며) 아부지. 나는 실패한 것 같아. 나 실패한 거 같애요.

- 아부지 : (걱정스럽다는듯이) 회사에서 뭔일 있냐?

- 부정 : 아니...

- 아부지 : 그럼 뭐 종종 뭐가 잘못돼?

- 부정 : 아냐. 그런게 아냐. 그런 종류가 아니야. 그냥... 그냥 내가 너무 못났어.

- 아부지 : 그게 뭔소리여. 너는 내 자랑인데.

- 부정 : (더 서럽게 운다) 나 자랑 아냐 아부지. 자랑이라고 하지마. 나 그냥.. 너무 나빠진 것 같애.

- 아부지 : 왜 애기 때문에? 애기 잘못된 것 때문에? 계속 속상한거여?

- 부정 : 아니야...아니야... 그런게 아니예요. 내가 무슨 자격으로 그런 말을 해. 그냥. 다 나쁜거야. 그냥 이유가 없어요... 아부지 생각하면서 열심히 노력하려고 했는데... 나... 노력을 어떻게 해야 되는지 모르겠어. 아부지, 나는 아무것도 못했어요. 세상에 태어나서 아무것도 못했어. 결국 아무것도 못할 거 같아요. 그래서 너무 외로워 아부지. 아부지도 있고 정수도 있는데.. 그냥..너무 외로워.

- 아부지 : (다 안다는 듯이) 외롭지. 외로워. 왜 그걸 몰라. 괜찮아.

- 부정 : 사는게 너무 챙피해. (점점 더 서럽게 운다)

- 아부지 : (어쩔 줄 몰라하며) 울지 말어. 기운없어. 울지 말어.

- 부정 : 나는 아부지보다 가난해질 것 같애. 더 나빠질 것 같애. 그러면 아부지 너무 속상하잖아.

- 아부지 : (너무 안타까워 한다)아부지 괜찮어. 이러지 말어 부정아. 아부지 속이 다 없어지겄다.

- 부정 : 아부지... 나 어떡해요. 아부지.. 나... 아부지. 나 자격이 없어요. ( 아부지한테 기대어 점점 서글프게 운다 )



사람들은 치이고 밟히고 구겨져가면서도 똑바로 걸으려한다. 괜찮다고 괜찮다고 정신차리려 한다. 치이고 밟히고 구겨진 스스로가 너무 못나보여서 사라지고 싶을 때도 있지만 사라지기도 어려우니 똑바로 걷는 척이라도 하려 한다. 그러다 힘풀린 다리에 작은 돌 하나라도 치이면 주저앉게 된다.



그래도 다행이다. 아부지가 있어서. 딸의 존재자체가 자랑인, 딸의 슬픔이 곧 자신의 슬픔인, 든든한 가족이 있어서.


아무리 독립적인 척 해도 사람은 오롯이 혼자일 수는 없는 것 같다. 사람은 약하다. 


드라마는 길게 봐야 감정이입이 되기 때문에 1화에서 주인공이 운다고 따라우는 경우는 거의 없다. 인생드라마 '나의 아저씨'도 7화와 마지막 화에서 아이유랑 같이 울었다. 그 전에는 울지 않았다. 그런데 인간실격1화를 보며 부정이랑 같이 울었다. 우는 건 오랜만이다. 나는 어쩌면 울고 싶었는지도 모르겠다. 


세상에 태어나서 아무것도 못했어.
결국 아무것도 못할 거 같아요.
그래서 너무 외로워.



이거였나. 무기력의 이유.

내가 몰랐던 내 마음을 드라마가 찾아준다.

부정이의 마음이 내 마음이다.


심리학 책이었나 영상이었나. 어딘가에서 본 적이 있다. 외로움은 나와 타인과의 관계에서 나오는 감정이 아니라고. 나와 나 자신과의 관계가 잘못되었을 때 나오는 감정이라고. 결국 아무것도 못할 거 같아서 외롭다는 부정이. 스스로 자격이 없다고 말하는 부정이. 무슨 자격이 없다는 걸까? 아부지가 아무리 자랑이라고 말해줘도 소용이 없다. 스스로의 눈에 못나고 나빠 보이는 자신의 모습을 보며 세상 어느 곳에도 쓸데가 없다고 느끼는 것이다. 어떤 특정한 사건 때문이 아니라 어디서부터 어디까지 풀어야할지 모르겠는 자기 자신이 답답해서 외로운 것이다.




드라마를 시간낭비라고 이야기하는 사람들에게 알려주고 싶다. 드라마는 시간낭비가 아니라고. 드라마는 내가 살지 못한 또 다른 인생이고 내가 표현하지 못한 내 마음이고 내가 실행하지 못한 어떤 것을 어쩌면 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고 자극하는 자극제다. 


어쩌다 보니 드라마 예찬글이 되었네.


1화를 본 날 4화까지 보았다. 아직 12편이 남아있다. 든든하다.

나는 오늘도 무기력하고, 오늘도 할 수 있는 만큼만 움직인다.

5화보러 가야겠다.



-en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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