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최작가 Nov 08. 2021

무기력하기 딱 좋은 날씨야.

- 언제까지 무기력할건데?


와. 하늘이 내 마음색이야!
칙칙한 회색.


비가 온다. 오랜만이다.

가을빛 충만하게 거리를 물들였던 단풍들이 떨어지는 것은 조금 아쉽지만 칙칙한 하늘과 후두둑 떨어지는 빗소리가 반갑다. 마음이 칙칙할 때 날씨가 같이 칙칙하면 마음을 공감해주는 것 같아 포근한 느낌이 들 때가 있다. 오늘은 그런 날이다.


사실 나는 맑은 날을 좋아한다. 햇살이 밝고 맑아서 보송보송한 햇살 냄새가 나는 날. 마음이 축축하고 기분이 쳐지는 날에도 맑은 햇살을 쬐면 물기가 날아가고 기분이 산뜻해지곤 한다.





하지만 사람의 기분은 다양하고 다양해서 '기분이 안좋다'류의 기분 카테고리 안에 또 다양한 종류의 기분들이 존재한다. 오늘의 '기분안좋음'은 맑은 날 보다는 비오는 날에서 위로를 받는 류의 기분이다. 우울한 것도, 짜증난 것도, 화가 난 것도, 슬픈 것도 아닌데 착 가라앉아서 '칙칙하다'는 표현에 더할 나위 없이 어울리는 회색톤을 띠는 기분. 오늘의 기분과 꼭같은 색의 하늘은 그 칙칙함을 희석해준다. 다 같이 칙칙하니까 오히려 칙칙함이 티나지 않는달까.


이런 날엔 집 안의 조명을 모두 끄고 있는 것이 좋다. 안과 밖의 구분없이 차분해지고 전기에너지 같은 인공적인 기운이 줄어들어서 편안하다. 옛 시절로 돌아간 것 처럼 전기없이 할 수 있는 일만 하면 좋겠다는 생각이 든다. 책읽기나 글씨 끄적이기, 창 밖 풍경 감상하기, 멍때리기 같은 것들. 커피를 한 잔 내려 마시는 것도 꽤나 만족스러운 느낌을 주곤 한다. 커피물은 전기를 사용하는 커피포트로 끓여야 한다는 것이 아이러니 하지만 어쩔 수 없다. 찻주전자가 없는 걸. (우리 생활에 전기는 놀라울 정도로 소소하고 세세한 곳 까지 사용된다. 익숙해서 의식하지 못하고 있을 뿐이다. 하루만 전기를 전혀 사용하지 말아보라고 한다면 그 하루는 분명 엄청 길 것이다. 누구에게나.)


커피 한 잔을 다 마시고 나면 또 뭔가를 해야 할 것 같은 생각이 든다. 내가 이렇게 하릴없이 흘려보내고 있는 오늘은 어제 죽은 사람이 그토록 바라던 내일이라며? 그런데 그게 뭐? 나는 나고 그 사람은 그 사람이니까 내가 오늘을 치열하게 살지 않는 것에 미안함을 느낄 필요는 없다고 생각한다. 


무기력의 시기. 무언가를 해야해서 하는 것이 아니라 하고 싶어서 할 수 있기를 바란다. 내가 지금 무기력한 이유는 하고 싶은 것을 잃어버렸기 때문이다. 나는 하고 싶은 일이 없으면 할 수 있는 일을 하면 된다고 떠들고 다니는 사람이다. 그런데 정작 스스로는 이러고 있다. 그래. 모순이다. 하지만 나는 지금, 할 수 있는 일이라는 이유로 무언가를 하고 싶지 않다. 무언가를 한다면 하고 싶어서 하고 싶다. 


월급을 받던 관성으로 '꾸준한 돈벌이'에 꽤나 연연하는 내가 이렇게 느긋하게 반응하는 모습이 낯설다. 아직은 정신적으로든 물질적으로든 여유가 있다고 생각해서일까? 더 급해지면? 그 땐 일단 할 수 있는 일을 하겠지. 아무래도 지금 나의 최우선 과제는 무기력의 해소가 아닌 듯하다. 무기력의 시기가 조금 길어지더라도 이번에야말로 하고 싶은 일을 찾아내자는 마음이 강한 것 같다.


조금 더 정확하게 내면의 생각을 파악하기 위해 자기 비판을 시도해 본다.


비판1. 앉아서 생각만 한다고 하고 싶은 일이 찾아지지는 않아!


맞다. 생각은 생각일 뿐이다. 그리고 늘 일정한 궤도를 그리며 돌고 돌다가 제자리로 돌아온다. 생각이 궤도를 벗어나려면 몸이 움직여야 한다.


비판2. 그렇게 잘 알면서 왜 가만히 있는데? 다 알면서도 하는 행동이라고 하면 합리적으로 보이는 줄 알아? 그건 아냐.


그것도 안다. 내가 내 행동에 대해 잘 이해하고 정확하게 분석하고 있다는 사실만으로는 아무것도 좋아지지 않는다는 것. 어제도 오늘도 제자리에 머물고 있다는 사실, 인정한다.


비판3. 그런데 왜 그러고 있는데?


왜 이러고 있는지는 6번째 문단에서 이미 이야기했다. 하고 싶은 일을 찾으려고. 


비판4. 아, 답답해! 그럼 다시 비판1의 질문으로 돌아가잖아! 언제까지 그러고 있을 건데?


음..... 당분간? 나에게는 무기력하더라도 별 힘들이지 않고 할 수 있는 행위가 몇가지 있다. 책읽기, 유튜브보기, 산책, 갑자기 떠오르는 생각 적어놓기, 그러다 궁금해지는 것 인터넷으로 찾아보기. 매일 이 5가지만 해도 가능성은 있다고 생각한다. 5가지 중 어떤 것을 하다가 어떤 생각에 갑자기 꽂히면 갑자기 움직이게 될 것이다. 그 움직임이 얼마나 지속될지가 관건이다. 반짝 치솟다가 금세 가라앉는다면 다시 무기력 상태로 돌아오겠지. 그렇게 꿈틀거리다보면 어디론가는 가지 않겠어?

 



없는 것을 억지로 만들어내려고 하니 괴로운 것이다. 나는 요즘 괴롭고 싶지 않다. 괴로운 것보다 평온한 무기력이 낫다고 느꼈기에 무기력이 찾아왔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무기력 극복 같은 건 하지 않으려 한다. 시간의 흐름에 맡겨보고 싶다. 언제까지 무기력할건데? 글쎄, 나도 잘 모르겠네.


무기력, 안녕?
나는 이제 너와 싸우지 않아.
잘 지내보자.


-end-

매거진의 이전글 나야, 무기력.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