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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최작가 Oct 29. 2022

파이어족과 백수 사이

백수일기2. '은퇴한 젊은이'라는 타이틀


- 오늘 뭐했어요?


요즘 자주 받는 질문이다. 사람들은 나의 하루 일과를 궁금해한다. 왜냐면? 요즘 대외적으로 나는 '은퇴한 젊은이'니까. 의도하지 않았지만 '은퇴한 젊은이'라는 타이틀은 사람들의 호기심을 자극한다.




시간이 많이 흘러서 나의 퇴사생활은 벌써 4년차로 접어들었다. 퇴사 후 이렇다 할 직업 없이 생활해왔다. 처음에는 낯선 사람들에게 '무슨일 하세요?'라는 질문을 받으면 '저 백수예요.'라고 대답했다. 하지만 그 대답이 충분하지 않았는지 항상 질문이 따라붙었고 나는 지금 회사를 그만둔지 꽤나 오래된 상태이며 취업을 다시 할 생각은 없고 나에게 맞는 부류의 일을 '급하지 않게' 찾고 있다는 설명을 추가로 해야했다. 이 모든 설명을 한방에 정리할 수 있는 말은 없을까? 라는 고민을 하던 중 '파이어족'이라는 용어가 떠올랐다. '파이어족' 문화가 한창 유행하고 '경제적 자유'라는 말도 흔한 단어가 된 요즘이기에 대수롭지 않게 여겨질 줄 알았다. 가만히 살펴보면 나는 파이어족처럼 생활하고 있었다. '저는 파이어족이에요.'라고 말하는 것은 좀 어색하니까 '은퇴했어요'라고 설명하면 꽤나 깔끔하지 않을까? 그래서 새로 만나는 사람들이 나의 직업을 궁금해하면 '저,은퇴했어요'라고 말하기 시작했다.


저, 은퇴했어요.


처음에는 어느정도 효과가 있었다. 은퇴했다고 하니 다음 구직활동을 궁금해할 필요가 없었고, 예상치 못한 대답에 반응할 말을 찾지 못해 그냥 그렇구나,라고 듣고 넘기는 분위기였다. 하지만 문제는 그 새로만나는 사람들과 관계가 반복되면서 생겼다. 지난 3월, '달리기'에 꽂힌 나는 러닝크루에 가입했다. 달리는 게 좋아서 열심히 달리고 싶은데 혼자는 잘 달려지지가 않았기 때문이다. 그렇게 가입한 러닝크루 사람들은 러닝은 물론이고 운동에도 매우 진심이었기에 처음에는 적응이 어려웠다. 체력레벨이 달랐다. 비운동인에 체력 최약체인 나는 운동 능력이 많이 약해서 모임에 민폐를 끼치는 것처럼 느껴졌다. 하지만 꿋꿋하고 꾸준하게 활동했고, 모임에 익숙해지면서 사람들과 친분이 쌓이게 되었다. 그러고나자 '은퇴했어요 부작용'이 발생했다.


지금 나의 은퇴는 잠정적이다. 더 이상 하기 싫은 일로 인생을 채우고 싶지 않아서 퇴사했지만, 퇴사 당시 무엇을 하면서 살지 계획이 전혀 없었고, 시간이 꽤 지난 지금도 아직 하고 싶은 일을 못찾았다. 파이어족 본연의 정의대로 평생 일을 안해도 될 만큼의 부 같은건 없다. 기껏해야 몇년 정도의 시간을 스스로에게 선물해줄 수 있는 수준의 여유뿐이다. 하지만 사람들은 내가 부를 쌓아놓고 은퇴했다고 착각했다. '오, 파이어족!'이라 반응하며 부럽다고 하기도 하고, 젊은 나이에 어떻게 그렇게 할 수 있었냐고 진지하게 궁금해 하기도 했다. 들을 때마다 민망했다. 뭔가 잘못됐다. 과장되지 않으면서 정확하게 설명할 수 있는, 더 좋은 키워드는 없을까?


백수는 이런 점이 피곤하다. 스스로의 상태를 어떻게든 설명해야 한다. 직업이 있으면 직업을 말하면 되고 직장을 다니면 직장을 설명하면 되는데, 백수는 자기 자신에 대해 설명해야한다. 파이어족과 백수 사이인 나의 상태를 어떻게 설명하면 좋을지 고민하던 중 좋은 단어가 떠올랐다. 안식년! 그래, 나는 지금 안식년을 갖고 있는 중인거다. 안식년이라는 단어가 마음에 들었다. '안식년 4년차예요.' 라고 설명하면 깔끔할 것 같다. 이제부터 안식년을 갖는 중이라고 대답해야겠다.




4년이나 안식했으니 이제는 움직여볼까 싶은데 잘 되지 않는다. 눈덩이는 한 번 굴러가기 시작하면 계속 불어나지만 처음에 작게 뭉쳐서 굴리기까지 힘이 많이 든다. 자꾸 부서지고, 너무 작아서 잘 굴러가지도 않고. 그러다가 흐지부지되고 만다. 모든 일은 눈덩이를 굴리는 것과 비슷하다. 시작을 제대로 하기가 어렵다. '시작'의 정의가 단순히 눈을 모아서 한 번 뭉쳐보는 거라면 시작은 쉽다. 하지만 눈을 모아서 뭉쳐서 굴러가게 만들어서 눈덩이처럼 보이게 하는 것 까지가 시작이라면 시작은 어렵다. 정말 시작이 반이다.


어떻게 하면 멋있게 안식년을 마무리 지을 수 있을까? 안식보다 멋진 무언가를 찾아서 활동하고 싶다. 휴식도 좋지만 근사한 활동은 더 좋을 것 같다. 은퇴했지만 복귀하고 싶은 젊은이는 오늘도 고민중이다.



-en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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