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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최작가 Oct 13. 2022

안갔다왔습니다.

나이 많은 싱글이 되면 생기는 일



지난 3월부터 달리기를 본격적으로 시작했다. 제대로 달려보고 싶어서 러닝크루에도 가입했다. 달리기 모임 활동을 하면서 재미있는 질문을 받았다. 그것도 같은 질문을 세번씩이나. 각각 다른 자리에서 다른 사람에게. 재미있다고 표현한 건 내가 39년 인생동안 들어본 적 없는 질문이었기 때문이다. 평생 듣지 않았던 질문을 갑자기 몰아서 세번이나 들으니 신선하기도 하고 웃기기도 하다가 생각이 많아졌다.




갔다왔어요?


무슨 뜻인지 알겠는가? 처음 이 질문을 받았을 땐 이야기의 흐름상 못알아 듣지는 않았지만 불쑥 물어봐서 당황스럽기도 하고 황당하기도 했다. 질문한 회원과는 초면이었기에 당황스러움은 숨기고 장난기를 섞어 대답했다. 


- 나 : 아, 정말! 39세까지 싱글이면 안되는 거예요? 너무하네!


몇번의 티키타카를 거쳐 유쾌하게 마무리되는 시나리오를 예상했는데 상대방의 대답은 너무도 다른 방향으로 돌아왔다.


- 회원1 : 저는 갔다온거라서요. 혹시나 싶어서 물어봤어요. 다른 뜻으로 오해했다면 미안해요.


전혀 예상하지 못했던 대답이다. 두번쯤 갔다왔다고 해도 별로 이상하지 않을 나이지만 주변에 돌싱이 거의 없어서 이런 전개는 생각하지 못했다. 상황상으로도 딱히 적절한 대화내용은 아니라고 생각했다. 어떤 상황인가하면 달리기 모임 후에 맥주집에서 가볍게 친목 도모 후, 2차로 회원1의 집에서 한 잔 더 하는 중이었다. 회원1은 회원2와 연인사이인데 둘이 같이 거주하는 집이었던 것이다. 술자리에는 물론 회원2도 함께였다. 나는 전혀 기분이 상하지 않았지만 회원2도 괜찮은건가? 요즘 사람들 쿨하군.이라고 생각하며 대답했다.


- 나 : 아뇨. 충분히 궁금할 수 있죠. 그런데 저는 한 번도 안갔다왔어요.


그 뒤로 회원1의 이전 결혼스토리와 회원1,2의 연애스토리와 나의 연애스토리가 이어졌던 것 같다. 밤이 깊어갔다. 적당히 웃고 떠든 후 적당히 마무리 된 기분 좋은 술자리였다. 이 날의 질문은 새삼 내 나이를 자각하게 만들었다. 그래. 나 이제 결혼을 몇 번 했었다고 해도 이상하지 않을 나이구나.



신혼여행이었어요?


이건 또 무슨 상황일까? 이번에는 회원3의 질문이다. 날씨가 더웠고 같이 달리기를 한 후 아이스아메리카노를 마시던 중이었다. 두번쯤 보는 사이여서 서로를 잘 몰랐고, 각자의 일상과 취향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가장 좋았던 여행지에 대해 질문을 받았고, 그래서 퇴사전 10년 휴가로 다녀왔던 팔라우가 생각났고, 팔라우가 참 좋았더라고 대답했다. '휴양지'라는 단어에서 '신혼여행'을 연상하는 건 자연스러울수도 있지만 보통 싱글이라고 여겨지는 사람이 휴양지를 다녀왔다고 해서 이런 질문을 하지는 않잖아! 지난번 "갔다왔어요?"사건이 생각나면서 웃음이 터졌다.


- 나 : 풉.

- 회원3 : 왜 웃어요?

- 나 : 이 모임 가입하고 이런 의미의 질문을 두번째 받네요. 신혼여행 아니예요.

- 회원3 : 하하. 혹시 그럴수도 있잖아요. 그런데 또 누가 이런식으로 질문했어요?


회원1과 회원3이 꽤 친하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기에 지난번에 있었던 일을 이야기해 주었다.


- 회원3 : 그치. 회원1이라면 그렇게 물어볼 수 있지. 회원1은 갔다왔으니까요.


이번에도 전혀 기분이 나쁘지는 않았다. 이 나이에 혼자 살고 있으면 과거가 있었을 거라고 생각하는 것이 자연스러운 흐름인가 하는 생각이 들었을 뿐이다. 그리고 과거에 대해 질문하는 것이 아무렇지 않은 시대가 되었나 하는 생각도 들었다. 회사 그만두고 한량 생활 오래했더니 나 요즘 시대에 뒤쳐진 거야? 아니면 이 모임 사람들이 독특한거야?


결혼 안 했었어요?

질문이 점점 직설적으로 변해간다. 이제는 대놓고 물어본다. 회원4의 질문이다. 상황을 살펴보자.


올해 상반기에는 코로나 때문에 오프라인 마라톤대회가 개최되지 않았다. 날씨는 따뜻해져 가고 대회없이 지나가기에는 아쉬운 봄이었다. 달리기에 열정적인 러닝크루 운영진들은 언택트 마라톤 대회를 오프라인 대회처럼 자체적으로 진행하는 이벤트를 기획했다. 공식적인 오프라인 대회는 아니었지만 약 20명의 사람들이 모여 마라톤 기념티셔츠를 입고 달리고, 서로 응원하고, 기록을 공유했다. 진짜 대회에 참가한 것 같은 기분이 났다. 모두 즐거워했다. 즐거운 행사 후에는 뒤풀이가 있어야 하는 법. 뒤풀이는 1차 고깃집, 2차 맥주집으로 이어졌다.


내가 앉은 테이블에는 나(84년생/여), 회원4(89년생/여), 회원5(88년생/여), 회원6(89년생/남) 이렇게 4명이 있었다. 회원4,5와는 안면은 있지만 처음 이야기를 나누어보았고, 서로에 대해 잘 몰랐다. 회원4는 나를 꽤나 어리게 본 모양이다. 회원5가 나를 언니라고 부르자 굉장히 이상하다는 듯이 물었다.


- 회원4 : 왜 자꾸 언니라고 해요?

- 회원5 / 나 : 언니니까요!

- 회원4 : 정말요?


자꾸만 언니 맞냐고 하더니 급기야 신분증을 공개하라고 장난어린 요구를 했다. 젊게 봐주시니 감사하다고 생각하며 어물어물 넘어가려 했지만, 신분증을 꺼낼 수 밖에 없게 만드는 집요한 재촉이 이어졌다. 나, 참, 여기 84년생 신분증 있습니다? 반쯤 취한 회원4는 주민등록번호를 확인하더니 한마디 날렸다.


- 회원4 : 어? 84? 진짜 84예요? 근데 왜 결혼 안해요? 결혼 했었었죠?


너무 웃겼다. 자칫 무례해 보일 수 있는 질문이지만 회원4는 취했고, 무슨 의도인지 알기에 기분 나쁘지 않았다. 나를 꽤나 괜찮게 봤고, 꽤나 괜찮은 사람이 나이가 이 정도 되도록 결혼을 안 하고 있는 것이 이상하다는 의미였다. 그러니까 자연스럽게 전에 한 번은 했었을 것이라는 추론으로 이어진 것이다.


- 나 : 하하하. 태어나서 세번째 받는 질문이네요. 39년 동안 받은 적 없다가 이 모임 가입하고 세번이나 받았어요. 결혼 안했었어요. 결혼할 예정도 없구요.

- 회원4 : ...진짜... 결혼 안 했었어요?


모두 웃음을 터뜨렸다. 결혼을 안하고 있는 상태가 어색한 나이라니. 뭔가 유쾌했다. 나를 괜찮게 보고 나의 미혼상태를 의아해하는 사람들. 당연히 결혼 못했을 거라고 여겨지는 것보다 훨씬 기분 좋지, 뭐. 39세든 40세든 50세든 미혼이어도 자연스러운 시대가 되면 좋겠다고 생각하지만 그건 아직 먼 것 같다. 




갔다왔어요?라는 질문이 실례가 아닌 시대. 갔다왔다는 사실이 결함이 아닌 시대. 갔다왔다가 또 갔다와도 그럴 수 있다고 반응하는 시대. 열린 시대가 되어가는 것이 좋다. 하지만 동시에 갔다가 올 필요가 없는 사람을 만나 오래오래 행복하게 사는 시나리오가 더 좋다고 생각한다. 누군지도 모르고 어디 있는지도 모르지만 행복하게 잘 지내다가 나를 만나 나와 함께 더욱 행복해졌으면 좋겠다.


그 때까지 나는 몇 번이나 더 답해야할까?

안갔다왔습니다만?


-en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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