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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유목 Nov 17. 2020

가을 편지 1




오늘은 일찍 잠에서 깨어 오랜만에 혜화에 갔어요.

당신이 다니는 학교까지 걸었죠. 도착하니 붉은 낙엽들이 길을 온통 뒤덮고 있더군요. 저 언덕 위를 얼마 전에 걸어갔을까, 얼마 후에 걸어갈까 그 생각을 잠깐 하다가 눈물이 터졌어요. 이내 돌아오는데 당신이 내 뒤에 있지 않을까 싶어 자꾸 돌아보게 되더군요. 당연히 거기에 당신은 없었어요. 다만 우리가 함께 걷던 길이 있었죠. 그날은 참 추웠는데요. 내 얇은 옷을 걱정하는 당신에게 추우면 그냥 좀 추워하면 되죠, 내가 그랬잖아요. 기억해요? 당신이 마구 웃었는데.

다시는 당신에게 말을 걸 수 없다는 사실이 아직 잘 믿기지 않아요. 나는 어디서든 어느새 당신에게 말을 걸고 있으니까. 힘들어요. 고마워요. 미워요. 어디예요? 뭐 하고 있어요? 그러면 대답이 없어도 견딜 수 있을 것 같아지거든요.

요즘엔 다시 시를 써요. 당신은 내 글을 참 좋아했는데. 다만 칭찬에 인색했죠.


며칠 전엔 작은 글씨를 쓰는 성실한 사람에 대한 시를 썼어요. 깊은 상실을 겪고 말을 잃은 사람인데요. 몸을 한껏 움츠리고 흐느끼는 게 특징인데 그럴 때면 꼭 가을이 올 것 같아요. 아, 가을은 정말 왔네요. 다음 시는 당신에게 쓰는 편지가 될 거예요. 이미 많이 썼지만, 마음이 축축한 스펀지 같아 자꾸만 할 말이 스며요. 이것이 마를 날도 있을까요?

당신이 나를 잊어버릴까 봐 무서웠는데 이제는 아니에요. 내가 당신을 잊을 수 없는 것처럼 당신도 나를 잊을 수 없겠죠. 당신의 짧고 짙은 눈썹, 눈꼬리, 날 닮은 코와 옅게 패인 보조개, 까만 손과 기다란 다리를 나는 다 기억해요. 당신도 당신이 좋아하던 나의 웃음을, 걸음걸이를, 오물오물 생각을 곱씹어 말을 뱉던 표정을 가끔 떠올리나요?


지날수록 선명해지는 당신을 아직 사랑하고 있어요. 당신이 가진 것도 아마 사랑일 거예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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