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일이 들려주고 싶은 이야기
지난 일요일부터, 말갛게 갠 하루가 계속되고 있다. 가벼운 외투를 걸쳐 입을 수 있는, 쨍쨍하게 서늘한 봄 날씨.
외출하기 전, 옷을 여러 겹 겹쳐 입을 때 나의 모양이 더 풍성해지고 알록달록 해지는 기분이 든다. 봄옷은 봄 날씨 같아서, 낭창낭창하기도 해야 하고 또 적당히 묵직해야 되기도 하다. 일교차가 심해 감기 기운을 달고 살지만 봄에는 해와 바람이 하는 일을 충분히 좋아해 줄 수 있다.
이 봄을 만끽하기도 전에 요일—내가 운영하고 있는 브랜드의 이름이다—은 여름을 준비하기 시작했다. 내가 하는 일은 계절을 앞서가야 하는 일이기 때문에. 여러 해 분주한 준비의 나날이 계속되다 보니 한 계절 앞서 지금을 돌아보는 자세로 어정쩡하게 지내게 된다. 목을 쭉 빼고, 여름에 먼저 가있는 내가 봄을 생각하는 것이다. 나는 그 일이 어렵지 않지만, 아직 오지 않은 것에 내가 먼저 다가가야 하는 여정이 길다고 느껴지기는 한다. 올여름은 언제쯤 올까, 언제부터 헉헉거리는 더위가 시작될까, 언제쯤 장맛비가 내릴까, 여름은 언제 또 저물까. 그렇다면 여름옷을 입고 싶어 지는 때는 언제일까. 이번에는 어떻게 생긴 요일의 옷을 입고 싶어 할까, 요일이 맞이하는 두 번째 여름은 어떤 이야기를 품고 있어야 할까. 여러 가지 질문과 고민들이 시작됐고 수빈과 나는 작업실에 잔잔히 앉아 자주 이야기를 한다.
색깔을 가진다는 것은 분명 좋은 일이다. 특히 어떤 개인이 아니라 하나의 브랜드로 자리매김하기에 색깔만큼 좋은 게 없다. 여기서 색깔은 정말 빨강과 같은 색깔이기도 하고, 정체성이기도 하고, 나아가려는 방향이기도 하며 중점을 두는 부분이기도 하고 무게중심이기도 하다. 우리는 우리의 색깔을 고민하고, 계속해서 섞어보고, 다시 지워보다가 다시 진하게 색칠한다. 나는 그것을 가지치기와 비슷한 행위라 생각하는데, 아무리 우리의 것이라 해도 멀리 보아 우리의 색깔을 해칠 것이라면 잘라내는 것이 맞다고 여기기 때문이다. 하지만 객관성과 주관성을 함께 가지기가 참으로 힘들다. 수빈과 나는 각자가 가진 마음과 머리를 끊임없이 서로에게 보여주고 그 마음과 머리 사이에서 균형을 잡아야 한다.
올해, 수빈에게는 아픈 일이 있었고 우리는 잠시, 서로에게 마음 주는 일을 그만두었다. 그때 나는 내가 서있는 땅이 깊숙한 곳으로 푹 잠기는 기분이었다. 그러나 우리는 다시 회복하고 있다. 마음의 상처를 봉합하는 것은 스스로 해야 할 일이지만, 나는 상처 위에 가만 손을 올려 놓아줄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