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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유목 Mar 23. 2021

오늘도, 술




고등학교 때, 필리핀의 달동네로 봉사활동을 간 적이 있다. 내가 머물던 곳은 '면형의 집'이라는 이름의 작은 수녀원 건물이었는데 외벽은 온통 하얬고, 안쪽으로 아름다운 성모상이 있었다. 인솔하는 선생님 하나, 학교에서 선생님으로 계시던 수녀님 둘, 그리고 학생들이 열 명 정도 함께 갔는데 골목 쓰레기를 치우거나 가난한 이웃을 방문하거나 결연을 맺은 그곳 친구들과 근교로 여행을 떠나기도 했다. 평일 낮에는 학교에도 갈 수 없고 먹을 것도 마땅찮은 어린아이들이 방문하여 글자를 공부하고 놀이를 하다가 갔는데, 보조 교사가 되어 그 아이들을 가르치기도 했다. 날이 무진장 더웠고, 매캐한 공기 속에서 하루를 보내면 온몸이 축 늘어졌는데 야무지게 샤워를 할 수 있는 환경도 못 되었다. 음식은 대부분 입에 맞지 않았지만 그렇다고 안 먹고 치워버릴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하루는 선생님과 수녀님들을 따라 대형 마트에 가보는 일정이 있었는데, 얼마 없는 돈으로 과자와 초콜릿, 망고 같은 것들을  오며 기뻤다. 주변을 돌아보면 마음껏 기쁠  없는 기분이었지만 외려 그곳 사람들은 우리를 보고 많이 웃어 주었다. 그때 어른들은 산미구엘 맥주를   사다가 냉장고에 넣어 두었는데, 하루 이틀이 지나 냉장고엔  캔밖에 남지 않았다. 나와  친구, 그리고 선배 언니들은  맛이 무척 궁금하여 반나절  맥주 훔쳐 먹을 궁리를 하다가 내가 총대를 매어 살금살금 부엌에서 맥주를 꺼내 왔다. 넷이서 돌아가며  모금씩 꿀꺽꿀꺽 넘기다 보니 금방 동이 났고 캔을 어떻게 처리했는지는  기억나지 않는다.


선생님이 맥주가 없어진 것을 알아차리게 된 건 채 몇 시간도 되지 않아서이다. 그는 범인을 색출하기 시작했고, 가장 가깝게 지내던 나를 쉽게 의심했다. 결국 우리가 다 마셔버린 것이 들통났고 우스운 해프닝 같은 것으로 넘어갔지만 그중 나만은 그토록 시원하던 맥주 맛을 쉽게 잊지 못했다.


술을 물처럼 여기는 우리 가족들은 내가 성인이 되자마자 소주를 마셔보게 했는데 생애 첫 소주를 한 병 반 마시고도 취하지 않았다. 대학 엠티에 가서도 얼굴색 하나 변하지 않아 선배들은 내게 계속 술을 따라 주었다. 고학년이 되어서는 십시일반 돈을 모아 데낄라 같은 것을 잘도 사 마셨는데, 정말 맛이 좋았다. 그 후로 지금까지 쭉, 술에 대한 사랑은 식지 않았다. 술을 마시고 아무데서나 자고, 열변을 토하고, 밤을 새우고, 다음날 고생고생을 하며 출근해도 어느새 술을 또 마시고 있다.


며칠 전, 곱고 잔잔한 사람을 만나 술을 마시게 되었다. 첫 만남임에도 불구하고 이른 저녁부터 새벽이 올 때까지 쉬지 않고 떠들었다. 술을 마실 때는 내가 깊은 우물이 된 것 같아, 무엇이든 마음 깊은 곳까지 듣고 마음 깊은 데서부터 말하게 된다. 술은 좋을 게 하나 없다는 말에 동의하지 않는 이유는 술이 만들어주는 그 깊이를 무한히 존중하기 때문이다.


오늘은 마침 작업실에 멋진 사람들이 놀러 왔고, 우리는 또 어떤 술을 무엇과 함께 마실까 설레는 고민에 빠진다. 사랑을 간직하고 떠난 이에게, 나는 잘 지내고 있다 말할 수 있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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