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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야자수 Mar 31. 2020

최은영_몫

책을읽고_01

씻기지 않는 외로움이 느껴질 때가 있다. 돈을 써도, 유튜브와 넷플릭스를 봐도, 열 시간씩 인터넷을 해도 사라지지 않은 외로움 같은 것이. 그럴 때 좋은 소설을 읽으면 그런 공허감, 외로움이 얼마간은 지워지는 경험을 한다. 덜 아프다. 그런 독서 경험을 할 때면 다른 사람들도 이런 순간을 경험했으면 하는 소망을 하곤 한다. 좋은 소설을 읽고, 조금이나마 채워지고 위로받을 수 있는 순간을.


최은영 작가는 인터뷰에서 <소설>의 힘에 대해 이렇게 이야기한다


졸업작품을 완성하고 졸업장을 받고 나서 한동안 꿈을 이뤄 결국 그것을 잃어버린 듯 한 공허함 속에 갇혀있었다. 분명 무언가를 해낸 시간들과 결과물이 선명히 남아있음에도 불구하고 무언가 허황된 것으로 가득 채워진 만족감의 풍선이 하늘로 날아가버린 듯 한 기분이 들었다. 앞으로 새롭게 해 나가야 할 것들에 대한 고민하는 법을 잊은 채 앉아있는 나에게 동생이 책을 하나 건넸다.


짧으니까 오늘 안에 읽는 거 쌉가능.

신조어에는 늘 그렇듯 지적하기 애매한 상스러움이 배어있는 듯하다. 자극적이고 강하게 찌르는 표현을 쓰는 동생은 최은영 작가를 사랑하고 무라카미 하루키의 소설을 즐겨 읽는다.


방으로 들어와 불을 켜고 책을 읽었다. 60페이지 남짓한 작은 책은 나에게 앞으로 어떻게 살아갈 거냐는 질문이 아닌 나와 내 주변의 사람들은 이렇게 살아, 너는 어때?라는 부드러운 물음을 받았다.


90년대의 작은 여성 문제는 강단 있게 주장을 내세운 이들 덕에 페미니즘을 배워야 말이 통하는 사회가 도래했다. 그러나 여성 문제 대해 이야기를 나누는 희영과 용욱 그리고 정윤의 모습이 어떻게 불과 몇 개월 전 지인과의 대화의 모습이 떠오를까. 더 화나는 건 그 앞에서 당당하게 의견을 말하는 용욱과 결국 우물쭈물해버리는 희영의 모습이 그 남자와 나의 모습과 닮아있던 것이었다. 아무리 관련 서적과 기사를 읽어도 그들과 대면하여 설명하는 것은 여전히 나에겐 과제처럼 남아있다.


무언가를 말하는 일. 그것은 나에게도 중요한 가치이다. 나는 영화를 전공하였는데 그 계기는 흥미와 더불어 내가 하고자 하는 이야기를 잘 정돈된 어떠한 것으로 이야기하는 삶을 동경하는 마음에 있었다. 영화를 만드는 일은 하고자 하는 말을 적어놓은 한 줄의 로그 라인을 이야기로 확장시키고 네모난 틀에 담길 화면을 표현하기 위해 고민하고 실제 제작하는 작업을 거치고서야 비로소 마무리된다. 그런 과정에서 가장 높은 산은 시나리오를 적는 단계인데 가끔은 영화화하고자 하는 솔직하고 개인적인 이야기를 활자로 모두 채워버리면 무언가 해소되어버리는 것 같은 느낌이 들어 영상화시키는 단계로 넘어가지 못하는 것들이 많다. 그래서 학교 사람들과의 대화에서 흔히 주고받는 말이 '나 트리트먼트는 많아'라는 말이다.


영화가 되지 못한 글들, 세상이 들을 수 없는 이야기들은 그대로 각자의 마음 안에서 삭는다. 그러다 어떤 때가 오면 그것들을 숨겨 놓았던 시간이 무색할 만큼 단시간에 만들어지고 상영된다. 그렇게 만들어진 영화는 무언가를 기록해내고 시간이 지나도 꺼내보아도 계속 이야기하고 있다는 느낌을 주게 된다. 이야기하는 삶의 힘을 믿는 탓인지 지속적으로 기록을 남기고 그 기록을 들춰보며 다시 공론화시키고 미래가 된 현재에는 어떻게 해석할 수 있는지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이 좋다. 영화를 만드는 일을 계속해 나갈지는 미지수이나 힘이 닿는 한 나는 나의 몫을 해나가며 살아가고 싶다.


5분의 노래 안에는 가끔은 운명적인 시간이 담기기도 하고 반주와 함께 눈물을 흘리게 만들기도 하는 능력이 있다. 이 작고 단단한 소설이 내게는 그러했다. 나는 마음을 담아 이야기하는 이에게는 마음을 담아 기도한다는 말을 좋아하는데 이 작가는 사람을 바라보는 방식과 그에 대해 생각하는 모습을 솔직하게 표현해낸다. 그리고 그 공간에서 나는 시간을 잊는다.

가끔 소설을 읽을 때 나와 화자 또는 주변 캐릭터가 너무 닮아 있어서 내가 제일 좋아하고 어쩌면 나만 좋아할 수도 있을 거라는 생각을 하기도 한다. 하지만 그런 책은 항상 인기가 좋고 그럴 때마다 나와 같은 사람들이 이토록 많은데 왜 그들과 대면하는 것은 힘들 때가 더 많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그 이유는 나의 목소리를 잘 들어보면 가장 잘 알 수 있겠지만.. 나는 이 책의 좋았던 부분을 필사하는 것으로 나와의 대면을 잠시 회피해보겠다.


10.p

    정윤의 목소리가 조금 달라졌다고 당신은 생각했다. 정윤은 망설이며 모르겠어, 같은 말을 하는 사람이 아니었다. 그녀의 목소리는 차갑고 맑은 물 같았다. 목소리 자체도 맑았지만 그보다는 그 목소리가 담고 있는 결기가 차갑고 시원하게 느껴졌다. 자신에 가득 찬, 자기 자신을 온전히 믿는 사람만이 낼 수 있는 목소리라고 그때의 당신은 생각했다. 정윤이 조리 있게 자신의 생각을 말로 풀어내는 모습을 볼 때, 당신은 매혹되었으나 동시에 옅은 거부감을 느끼기도 했다.


11.p

    그대로라는 말이 거짓인 것만은 아니었다. 그대로라는 말은 그 많은 변화 속에서도 여전히 예전의 당신이 존재한다고, 그 사실이 내 눈에 보인다고 서로에게 일러주는 일에 가까웠다. 정윤은 그 또래보다 나이가 더 들어 보였다. 새치를 염색하지 않은 데다 얼굴에 화장기가 없어서 그런 것인지도 모른다고 생각했지만 얼굴 자체에 배인 피로가 그런 인상을 강하게 해주는 것 같았다. 그런데도 당신의 눈에는 그때의 정윤이 보였다. 당신이 학생회관 쪽으로 걸어가고 있으면 편집실 창문에서 <이해진이!> 부르고 유난스럽게 손을 흔들던 스물하나, 2학년 선배의 모습이.


34.p

    당신은 걷다가도, 밥을 먹다가도, 심지어 잠을 자다가도 깨어 분노에 휩싸였다. 분노는 배출될 수 없는 독처럼 하루하루 당신 몸에 쌓였다. 당신은 당신의 분노가 무엇 하나 바꾸지 못하고, 그저 당신 자신의 행복을 깨뜨리고 있다는 생각에 슬픔을 느꼈다. 가까운 사람들을 대할 때, 심지어 당신 자신을 대할 때 당신은 예전보다 더 엄격하고 까다로운 사람이 됐다. 짜증을 쉽게 냈고, 작은 일에도 화를 냈다. 아무것도 바꾸지 못하면서 자기 분노 속에 갇혔을 뿐이라고 당신은 생각했다. 그것은 당신이 바라는 바가 아니었다.


37.p

    이기적인 생각일지도 모르겠지만 차라리 이런 일을 모르던 때로 돌아갔으면 좋겠다고. 아무것도 모르고, 세상은 그럭저럭 잘 굴러가는 곳이라고 생각했던 시절로 이제 돌아갈 수가 없게 되어 버렸다고. 당신은 희영처럼 강한 사람이 아니어서, 화가 나서, 그러나 무력해서 속이 부식되고 있는 것 같다고 말했다.

    당신의 이야기를 다 듣고 희영이 입을 열었다.

    넌 내가 강하다고 생각했네.

    희영은 창가에 서서 당신을 바라봤다.


58.p

    글이라는 게 그렇게 대단한 건지 모르겠어. 정말 그런가...... 내가 여기서 언니들이랑 밥하고 청소하고 애들 보는 일보다 글 쓰는 게 더 숭고한 일인가, 그렇게 대단한 일인가 누가 내게 물으면 난 잘 모르겠다고 답할 것 같아.

    희영은 열어놓은 창가를 바라보며 말을 이었다.

    나는 그런 사람이 되기 싫었어. 읽고 쓰는 것만으로 나는 어느 정도 내 몫을 했다, 하고 부채감 털어 버리고 사는 사람들 있잖아. 부정의를 비판하는 것만으로 자신이 정의롭다는 느낌을 얻고 영영 자신이 옳다는 생각만으로 사는 사람들. 편집부 할 때, 나는 어느 정도까지는 그런 사람이었던 것 같아. 내가 그랬다는 거야. 다른 사람들은 달랐겠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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