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로라 여행자의 일기 #20

체력의 비결은 아이들

by 오궁

아무것도 하지 않고 밤늦게 오로라만 보러 나가는 일정은 생각보다 만만하지가 않았다. 굳이 탓을 하자면 시차 적응 하느라 몸의 회복 속도가 늦었다. 외출이라도 한 번 하자면 중무장에 가까운 옷을 껴입여야 하는데 그 옷의 무게도 보통이 아니었다. 옷의 무게와 두께 때문에 움직임은 둔했고 체력 소모도 많았다. 그리고 무엇보다 날씨가 추워서 체온을 유지하기 위해 몸안에서는 잠시도 쉴 새가 없었다. 그 와중에도 아내는 쌩쌩했다.

“자기야, 이상하게 나는 별로 피곤한 줄을 모르겠어.”

“정말? 대단한데.”

“평소에 집에서 서너 시간씩 운동을 했더니 이제야 그 덕을 보나 봐.”

“그런가 보다. 국내에서 여행할 때는 어딜 가도 피곤해서 빨리 집에 가고 싶었는데 신기하네. 옐로나이프 공기가 좋아서 그런가?”


아내의 체력이 좋아진 것은 사실이다. 집에서 시간 날 때마다 동영상을 틀어놓고 운동 삼매경에 빠진 결과였다. 하지만 스무 시간을 날아왔고 시차도 적응이 안 된 곳에서 이렇게 멀쩡하다니.

우리 가족은 여태껏 해외여행을 가 본 적은 없지만 국내에서는 여행을 많이 다니는 편이다. 따뜻한 날이면 자연 속으로 캠핑도 떠나고 가보지 못한 낯선 도시를 여행하기도 한다. 아이들은 기억도 못하지만 어릴 적부터 비행기를 태워서 제주도도 몇 번이나 다녀왔다. 길어야 3박 4일이지만 여행이야말로 가족이 서로의 사랑을 확인하고 아이들에게 경험과 문제 해결 능력을 심어줄 수 있는 좋은 방법이라고 믿고 있다. 하지만 아직은 어린 두 딸은 그런 부모의 마음을 알 리가 없다. 조금이라도 차가 막히거나 자신들의 입장에서 재미없으면 이내 짜증을 내고 심통을 부린다. 아내와 나는 돈 쓰고 욕먹는다며 툴툴거리면서도 언젠가는 아이들이 우리의 진심을 알아줄 것이라고 생각하며 매번 새로운 여행 계획을 짜곤 했다. 그러다 보니 체력보다는 감정의 소모가 많아서 아이들과 떠나는 여행은 피곤할 때가 많았다. 빨리 집으로 돌아가자는 말도 매번 했던 것 같다. 이번에는 집에 빨리 가자는 말이 아내와 나 누구의 입에서도 나오지 않았다.


생각해 보니 우리 곁에는 아이들이 없었다. 비행기 안이 좁아서 불편하고 불평하거나 비행시간이 길어서 지루하다고 하는 사람이 없었다. 왜 이렇게 춥냐고 음식은 왜 이렇게 맛이 없냐고 툴툴대는 사람이 없었다. 겨우 이런 거 보자고 여기까지 왔냐며 시시해하는 사람도 없었다. 이거 사달라 저거 사달라 조르는 말도 없었다. 좋은 거 먼저 차지하겠다고 싸우는 목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그랬다. 우리가 옐로나이프에서 피곤한 줄 몰랐던 이유는 체력 단련의 결과가 아니라 아이들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감정의 소모가 없으니 몸도 피곤하지 않았다. 아이들이 없는 자유 속에서 부부는 오랜만에 안식과 평화를 얻었던 것이었다. 할머니 하고만 열흘 가까이 지내야 하는 아이들이 걱정돼서 편지를 모두 32통이나 써서 숨겨놓고 왔다. 소파밑, 의자뒤, 냉장고 안, 책 사이, 액자 뒤, 이불속, 옷주머니 안쪽… 그렇게 걱정되고 보고 싶을 줄 알았는데 아이들 봐주러 오신 어머니가 듬직해서였는지 우리는 아이들 이야기는 별로 하지 않았다. 우리 둘에게만 오롯이 집중할 수 있었다.


첫째가 태어난 2005년 이후로 단 둘이 처음 떠난 여행에서야 비로소 우리는 아이들의 부모가 되는 일이 얼마나 이중적인지를 깨닫는다. 아이들은 아주 많이 미이이이이이이이이입다가 잠시 예쁘다. 그리고 그 짧은 예쁨의 크기는 기나 긴 미움의 크기보다 훨씬 크다. 그래서 늘 속는 셈 치고 아이들을 키우는 것일지도 모른다. 엄마, 아빠도 엄마, 아빠가 처음이라는 말은 그래서 유효하다.


엄마, 아빠 없이 아이들은 할머니와 지내는 일이 그리 편하지는 않았나 보다. 아이들의 바쁜 스케줄 대로 뒷바라지하고 하나라도 더 해 먹이려는 할머니의 스타일을 아이들은 낯설어했나 보다. 우리 가족의 사랑이 이렇게 깊었나 싶을 정도로 아이들은 어쩌다 전화 통화를 할 때마다 보고 싶다는 말을 아끼지 않았다. 그래봐야 한국으로 돌아가면 사흘 만에 다 까먹을 테지만 아이들은 도대체 12월 24일이 언제 오는지 모르겠다며 안달이었다. 그러거나 말거나 우리는 옐로나이프 하늘 아래에서 오로라를 기다리며 행복했다. 얘들아 미안하다. 아빠, 엄마도 아주 가끔은 이런 시간이 필요했더구나. 아이들 없이 여행을 떠난 시간만큼은 연애를 막 시작하던 22년 전 같기도 했고 결혼한 지 얼마 되지 않은 신혼 초의 기분도 들었다. 아내의 손을 잡는 것도 어색하고 설렜는데 그것은 아마 22년 만에 함께 한 시간 때문이 아니었고 22년 전으로 돌아간 시간여행 때문이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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