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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거진 윤씨 잡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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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Eli Sep 10. 2024

장 그르니에 "어느 개의 죽음"에 사족을 붙임

<윤씨 잡문>


#1

나는 어느 정도는 내 개의 하인이었다. 스스로 모든 의무에서 자유로워졌다고 생각하기도 했지만 내 개에 대해서는 한 번도 그러지 못했다.


내가 낳은 두 아이들은 다 커서 제 앞가림을 하기 시작했으므로 내가 돌보아야 할 의무에서 많이 자유로워졌습니다만 내 개에 대해서는 그렇지 못합니다. 갓난아기나 서너 살 정도의 아이를 키우듯 보살펴야 합니다. 아침, 저녁밥을 먹여야 하고 물도 깨끗한 것으로 자주 갈아주어야 합니다. 문을 열어주어야 하고 필요에 따라 옷을 입혀야 하며 데리고 나가 걷게 하고 몸을 씻겨 주어야 하고 병원에 가서 치료를 받게 해야 합니다. 개들이 내 곁에 있는 한 나의 돌봄이 필요합니다. 나 또한 내 개들의 하인입니다. 그러나 들은 온전히 내 처분에 달려있습니다. 내가 선택할 것은 무엇을 해 줄까 보다 어떻게 사랑할까입니다. 어떻게 사랑할까를 생각하면 무엇을 해 줄지가 떠오릅니다.


#2

개들의 눈빛은 우리가 느끼는 것과 같은 감정을 나타낼 수 없다고 누가 감히 주장할 수 있단 말인가?


꽃밭에 오줌을 누었다고 꾸중을 들은 탱이는 눈을 옆으로 돌렸고 손님에게 짖었다고 혼이 난 투투는 테이블 밑으로 들어가 걱정 가득한 눈으로 쳐다봅니다. 간식을 먹을 때의 눈빛과 간식을 달라고 요구할 때의 눈빛이 다릅니다. 마당의 꽃을 밟으면 안 된다고 하니까 다른 한쪽 발을 빙 돌려 밟지 않고 와서 내 앞에 와 앉은 후 마당이 반들거리도록 꼬리를 쳤습니다. 칭찬해 달라고 말입니다. 머리를 쓰다듬어 주려고 가까이 가면 탱이는 제 발을 들어 손바닥에 놓으며 애정을 과시했고 투투는 꼬리를 치며 얼굴과 손을 핥습니다. 아침에 인사할 때와 저녁 인사할 때의 눈빛이 다릅니다. 외출할 때의 눈빛과 돌아왔을 때의 표정이 다릅니다. 무언가 질문을 하면 눈을 마주치며 고개를 갸웃갸웃거립니다. 개들의 감정은 지극히 단순하고 분명해서 그 깊이가 매우 깊습니다. 우리보다 직감적이며 즉각적이어서 다정하고 두려운 감정을 숨김없이 드러냅니다. 꾸미거나 감추는 것이 없습니다.


#3

타이오가 있음으로써 발생되는 어려움들은 오히려 그에게 애착을 느끼게 만드는 또 하나의 이유가 되었다.


여행을 가기 위해 는 제일 먼저 개를 돌볼 사람을 확인합니다. 만일 집에 남아 개를 돌 볼 가족이 없으면 나의 여행은 취소되거나 일정이 바꿉니다. 집에 손님들이 방문해도 일정한 시간에 데리고 나가 배변 산책을 해야 하고 개들 때문에 중요한 모임에 빠지기도 합니다. 그래도 개들을 원망하지 않습니다. 많은 병원비가 한꺼번에 지출되어도 괜찮습니다. 지불할 병원비가 있다는 것이 다행이라고 생각합니다.


개들이 애써 심은 잔디를 망친다고 해도 땅을 파는 행위가 만족감을 준다면 기꺼이 내버려 둡니다. 이 내버려 두는 우리의 행동도 잔디를 파헤치는 개들의 행동만큼 자연스러운 일입니다. 우리가 그 잔디보다 개를 더 아낀다는 생각을 하면서 스스로 만족합니다. 잔디를 망친다고 하는 타박도 사실은 그저 하는 말입니다.


#4

살아 있던 존재가 사라지고 나면 우리는 그 존재에 온갖 장점을 가져다 붙이게 된다. 그렇게 손쉽게 부채감에서 벗어나는 것이다. 얼마나 위선적인지 생각하면 구역질이 나지만 나 역시 다른 사람들과 똑같이 그런 위선의 죄를 저지르고 있다.


탱이는 동네에서 가장 -단언컨대- 점잖은 개였습니다. 지나가는 아무나 보고 함부로 짖지 않았을뿐더러 낯선 사람이 집 가까이 접근을 해도 대문 밖에 있으면 경계만 했습니다. 그가 대문 가까이 다가오면 경고의 의미로 한 두 번 짖었고 사납게 굴지 않았습니다. 만일 탱이가 연속으로 짖어댄다면 그것은 반드시 다른 이유 때문이었습니다. 뱀이 나타났거나 다른 사람들이 함부로 집 주차장 가까이 차를 댔거나 비가 많이 내려 마당이 물에 잠겼거나 할 때였습니다. 


탱이에 대한 이러한 기억으로 "탱이는 훌륭한 개였어."라고 하는 것이 탱이에게 부족했거나 잘해 주지 못한 마음의 부채감이라고 여기며 나 역시 위선에 빠집니다. 탱이의 죽음을 화제 삼아 이 글을 쓰고 있는 내 모습은 가장 지독한 나의 위선입니다. 하지만 탱이를 회상하며 "탱이는 정말 훌륭한 개야." 하는 것은 나의 부채감과는 상관없이 사실입니다. 개가 죽고 나니 잘해 줄 걸, 하는 마음이 얼마나 구역질 나는 것인지 잘 압니다만 짖을 때와 짖지 말아야 할 때를 알았던 탱이는 점잖은 신사였습니다. 개보다 우월하다고 여기는 우리 자신을 생각하면 탱이의 덕목이 나의 위선을 오히려 위로해 줍니다.


2023년 가을의 탱이-사진 찍는 형아를 보고 귀가 눕혀졌다


#5

우리가 그 개를 이전의 환경, 즉 떠돌이 개들의 환경에서 빼내 온 행위는 그에게 행복을 주었지만 또 그만큼 불행을 안겼다. 언제든 배고프면 먹을 수 있게 되었고 부족한 게 없어졌으니 어떤 의미에서 타이오는 행복해졌다. 단지 자유를 잃었다.


블랙탄 레트리버 믹스인 탱이의 몸무게는 40kg 가까이 나갔습니다. 탱이는 생후 5개월까지 집안에서 지냈지만 몸이 점점 커지자 여러 가지 일이 생기기 시작했습니다. 제일 먼저 배변이 문제였습니다. 저녁이 되어야 가족 모두가 돌아오는 집안 형편상 하루종일 탱이 혼자 집안에 있어야 하는 건 옳지 않았습니다. 당시 우리는 셋집인 한옥에 살고 있었는데 남의 집을 망가뜨릴 수는 없었습니다. 다행히 마당이 있었기에 탱이는 마당으로 나갔습니다. 한창 농사철일 때는 묶이기도 했습니다. 주변 밭을 망가뜨린다고 난리가 났었으니까요. 처음 줄에 묶인 날 탱이의 거부를 기억합니다. 남의 집이 아닌 우리 집이 생기고 대문을 만든 후 탱이를 마당에 풀어주었습니다. 비로소 줄에놓여나 자유롭게 지냈습니다. 얼마나 좋았는지 모릅니다. 그러나 마당이라는 울타리 안에 갇혀 지낸 것이기도 합니다. 아침에 일어나 보면 나무로 만든 대문이 뜯겨나가 있기도 했고 밤늦게 빗장을 열고 나가기도 했으니까요. 탱이는 원하는 대로 자유롭게 나가고 싶어 했습니다.


#6

동물의 고통도 인간의 고통과 비슷하지 않을까? 타이오는 나처럼 내가 병이 나서 아플 때처럼 아파했다...... 인간의 고통에 대해서는 '설명'하고 '정당화'하면서 어째서 동물의 고통에 대해서는 그렇게 하지 않는가.


탱이가 죽기 두 달여 전쯤 수박을 먹고 탈이 난 적이 있었습니다. 수박을 좋아하는 탱이여서 우리는 양껏 먹으라고 많이 주었는데 배탈이 났던 것입니다. 며칠 설사를 하더니 밥을 먹지 않고 아팠습니다. 본격적으로 더위가 시작되어서 더욱 마음이 쓰였습니다. 4일째 밥을 먹지 않자 우리는 탱이의 죽음에 대해 의논하기 시작했습니다. 15살의 노령이었고 뒷다리의 관절에 이상이 와서 잘 걷지 못하는 데다가 헉헉대며 몰아쉬는 거친 소리 때문이었습니다. 게다가 머리가 삐딱하게 돌아간 채 까딱까딱거리는 모습은 치매 걸린 노인 같았습니다. 잘 생겼던 젊은 탱이의 모습은 어느새 사라지고 무력하게 늙어 헉헉대는 탱이를 보며 그 아이의 죽음에 대해 생각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이가 부실했던 탱이는 죽을 곤 했는데 마저 먹지 않으니 어떤 결정을 내려야  때가 올 거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탱이는 우리의 마음을 읽기라도 했는지 닭죽을 잘 먹었고  달여를 더 살았습니다. 개똥밭에 굴러도 이승이 정말 좋은 걸까요? 이 말에 나는 크게 동의하지 않습니다. 탱이는 다리 관절의 아픔과 치매, 실명, 여름 더위의 고통과 늙음겪으며 견뎌야 했습니다.


#7

당신이 누군가를 사랑하면서 그 사람에게 돌연한 죽음을 안긴다면 그것은 상대의 고통을 덜어주기 위해서인가, 당신의 고통을 덜기 위해서인가? 숨이 끊어지는 모습은 지켜보기 힘들다. 하지만 당신은 사랑 때문에 그렇게 할 수도 있다.


친구는 삽살이를 키웁니다. 청삽살개 산이는 7살입니다. 성격이 민감하여 배탈을 달고 살고 밥을 잘 먹지 않습니다. 그래서 그런지 산이는 까칠합니다. 그러나 교육을 잘 받아서 탱이처럼 점잖은 개입니다. 나는 삽살개 산이를 볼 때마다 푸르스름한 빛과 회색, 보랏빛이 감도는 그 자태에 감탄을 하곤 합니다. 탱이에 비해 산이는 아직 젊습니다만 산이의 보호자들도 산이의 죽음에 대해 조금씩 생각하는 듯했습니다. 어쩔 수 없는 상황이 되면 보호자들은 어떤 결정을 내려야만 하겠지요.... 고통과 깊은 슬픔을 동반하는 보호자들의 결정은 존중되어야 합니다. 사랑하는 개의 고통을 덜어주는 것이 먼저인지 나의 고통을 덜기 위해서인지를 저울질한다는 것은 제3의 고통을 겪게 하는 것입니다. 양 쪽 다 고통을 피해 갈 수는 없습니다. 다만 사랑이라는 동기의 순수함에 기댈 뿐입니다.


우리가 탱이를 만난 것은 2010년 4월 1일이었습니다. 탱이는 지상에서 14년 6개월을 살고 갔습니다. 탱이의 죽음을 예상했고 마음의 준비도 했지만 탱이의 담요와 가슴줄을 함께 묻을 땐 울고 말았습니다. 저녁 간식을 먹고 산책을 다녀온 후 잠을 자다가 간 탱이가 고마워서 울고 미안해서 울고 늙느라 힘들었던 탱이의 고통을 알았기에 그 고통이 애달파 또 울었습니다. 안락사를 고려하든 안 하든 우리는 사랑하는 개의 마지막을 결정하고 또 보아야 하는 고통에 직면합니다. 이 고통에 우열이나 차이를 논할 수 있을까요? 만약 이 고통을 피하고 싶다면 우리는 개를 키우지 말아야 할 뿐만 아니라 우리의 삶에서 다가오는 사랑마다 저울을 달아 그 무게값대로 자본주의식 이해타산을 따져야 할 것입니다. 고통을 알면서도 사랑하는 것은 용기입니다. 


6개 윌의 탱이


#8

동물들은 매일 아침 당신을 찾아오고 애정을 표한다. 그들이 하루는 사랑과 신뢰의 행위로 시작한다. 동물들은 적어도 솟구치는 애정을 품고 있다.


더 잘해 줄 걸, 더 사랑할 걸 하는 마음은 그 진정성의 여부와 관계없이 어리석어서 속이 상합니다. 앞날을 알 수 없어서 늘 후회하는 인생이지만 할 수 있다면 적어도 자신이 아끼는 대상을 덜 사랑해서 하는 후회는 하지 않기를 바랍니다. 그러나 이미 나에겐 후회가 차고 넘칩니다. 얼마나 어리석은지요. 이 후회를 넘어서려면 하루가 시작되는 아침에 애정을 불러일으켜야 하겠습니다. 날마다 마치 처음인 듯 새로운 애정을 솟구쳐 일으켜야 합니다. 애정은 그저 생기는 것일 수도 있지만 사실은 훈련하고 노력해야 하는 것입니다. 이 각오에도 불구하고 오후를 지나 저녁에 이르렀을 때 나의 애정이 희미해진다면 그때 다시 애정을 불러일으키겠습니다. 사랑한다며 뺨에 입맞춤을 하고 다정하고 따뜻한 말을 건네겠습니다. 내 개는 날마다 나를 향해 그렇게 합니다. 날마다 처음인 듯 반가워하고 부끄럼 없이 일말의 계산 없이 애정을 표현합니다.


#9

아침이면 계단에서 타이오의 발소리가 들리지 않아 나는 자꾸 놀란다


이제 마당엔 탱이가 없습니다. 차에서 내리면 대문에 바싹 다가와 꼬리를 치는 소리가 들릴 정도로 반가워하던 탱이는 이제 없습니다. 장바구니에 코를 박고 꼬리를 치느라 그 크고 긴 꼬리로 내 다리를 치던 탱이는 이제 없습니다. "아이고, 탱이야, 엄마 다리 멍들겠다" 하는 타박을 할 녀석도 없습니다. 걸핏하면 마당을 파헤쳐놓아 늘 공사 중인 현장이 되곤 했지만 이제 마당은 공사가 중단된 모습의 현장처럼 썰렁합니다. 물을 마시던 소리도 들리지 않습니다. 데크 위를 걸어 다니는 발소리도 없습니다. 탱이는 이제 없습니다. 우리보다 더 자연에 가까운 존재였던 탱이는 14년 6개월을 살고 자연으로 돌아갔습니다. 어느 유명 드라마의 대사처럼 탱이가 무로 돌아갔기를 바랍니다....


#10

우리의 운명은 모두 같다. 그렇기 때문에 나는 지금 개 한 마리의 이야기를 하면서 부끄럽지 않다.... 그런데 당신이 죽은 뒤에도 무언가가 살아남는다면 개들도 그러지 않을까?


생명을 누리던 존재들의 운명은 같습니다. 탱이를 보내며 흘린 눈물은 탱이의 죽음에 대한 애도의 눈물이었지만 나는 압니다. 제 슬픔 때문에 더 크게 울었다는 것을요. 탱이의 죽음 너머로 확장되는 생명 있는 존재들의 죽음에 대한 어떤 감정을 미리 내다보았다는 것을요. 죽음이 있기에 나는 생명 있는 것을 존중하며 그들과 내가 누리는 삶을 사랑합니다. 


나는 탱이가 좋은 세상으로 가는 것도 나중에 사람으로 태어나거나 하는 것을 바라지 않습니다. 아, 정말 아무것도 그 무엇으로도 다시 태어나지 않았으면 좋겠습니다. 나 자신도 마찬가지입니다. 죽어서 좋은 세상에 간다든지 혹은 다른 어떤 존재로 다시 태어나 끊임없는 삶의 수레바퀴 안에서 살아야 하는 것을 바라지 않습니다. 지금 내 삶이 엄청나게 힘들거나 괴로워서가 아닙니다. 내가 삶을 가볍게 여겨서도 아닙니다. 내게 주어진 삶을 사랑하지만 생명 있는 것으로 태어나 살아야 하는 고단함은 이 한 번으로 족합니다. 그 어떤 회한과 상관없이 한 번의 삶으로 충분합니다. 그래서 지금 주어진 내 삶이 소중합니다. 바로 이 때문에 지금 곁에 있는 내 개를, 고양이를 그 누구를 아무개를 아낌없이 돌보고 사랑해야 합니다. 이 바람을 매일 새로 일으켜 세우며 아침을 맞기를 나는 바랍니다.


탱이는 갔지만 투투가 남았습니다. 슬퍼하는 엄마가 투투는 이상합니다. 조금 떨어진 자리에 앉아 하루 종일 엄마를 쳐다봅니다. 장난감을 들이대며 놀자고도 하지 않습니다. 탱이에게 잘 해 주지 못했다고 후회하는 엄마의 위선을 투투가 극복해 주었으면 좋겠습니다. 투투는 그렇게 해 줄 것입니다....


"우리를 사랑하는 혹은 사랑할 준비가 된 이들을 사랑하자. 보잘것없는 힘을 사용해서 설득하려 들지 말자. 인간의 장점을 믿지 말자. 그대는 오로지 그 사랑의 행위를 통해서만 그대일 수 있다.(p.98)"




* 인용 출처: <어느 개의 죽음> , 장 그르니에 선집 3, 장 그르니에, 윤진 옮김, 민음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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