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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초록빛 청메이 Jun 09. 2019

그냥 감정 그대로 하세요. 참지 말고

난생처음 해 본 심리검사

"와, 나도 겉으로 괜찮아 보이고 차분하게 말을 잘하길래 충격적인 일을 겪은 사람 치고는 잘 극복하고 있네 싶었는데 검사 결과를 보니 실제 심리상태가 많이 차이가 있네."


선생님은 육안으로, 그리고 환자의 이야기만으로 처방하는 데는 한계가 있다며 심리검사를 권장하셨다. 상당한 비용이기에 잠시 망설였지만 이번에는 하기로 결심했다.


검사는 좀 복잡하다. 일단 내가 사전 질문지를 해가야 한다. 질문은 우리가 성격 검사할 때 했던 객관식 질문들과 문장 완성과 같은 주관식이 있다. 문항이 상당히 많아 다 하는데 총 3~4시간이 걸린 것 같다. 떠오르는 대로 답하라고 해서 바로바로 체크한 게 이 정도다.


그러고 나면 담당 의사가 아닌 심리검사 전문 상담사와 면담을 하면서 다른 검사를 진행한다. 이것도 총 3시간이 걸렸다. 그림을 보여주고 무엇이 보이는지 꽤 구체적으로 물어본다. 그리고 몇 가지 그림도 직접 그린다. 너무 초딩같은 그림 실력이 민망했지만 이런 거 처음 해봐서 사실 좀 재밌었다.


일주일쯤 후 그 모든 자료들을 종합적으로 평가하여 수치화된 결과가 나온다. 그것들이 수치화되어 나온다는 것에 신기함을 느낀 지 얼마 지나지 않아 나도 몰랐던 내 상태를 들으며 나한테 더 미안해진다...


"상당한 우울과 불안을 겪고 있네. 이 정도면 필요할 때만이 아니라 약을 매일 먹어야 할 것 같아.  빼먹지 말고 먹어. 지금 이 상태면 먹어야 해. 그동안 정상적 생활과 판단이 거의 힘들었을 텐데... 어떻게... 잘 버텼네..."


"이거 수치가 많이 높은 거예요?"


"응. 아닌 줄 알았는데 자존감도 엄청 떨어져 있고 자기 비하도 심하네... 겉모습이랑 너무 다르잖아 이거. 아니 근데 왜 그렇게 참아. 이렇게 분노가 올라와있는데 다 터뜨려야지. 억압 기제가 너무 강해. 이거 안 돼. 큰일 나. 미투 못 봤어? 그 사람들 왜 10년 전에 있던 일을 이제 와서 그러겠어. 지금도 그때 그 분노가 그대로 남아있는 거야. 그냥 화가 나면 화를 내고 그냥 감정 그대로 해. 이러면 안 되겠지, 사람들이 이상하게 보겠지 그런 생각하지 말고. 지금 안 이상한 게 이상한 거야."


엄마 뻘 되시는 정신과 선생님은 결과를 보시더니 갑자기 내가 너무 안타까워 보이셨는지 말을 놓고 나보다 열폭하며 조언을 해주셨다.


그렇구나, 내 상태가 좋지 않구나. 일부러 감성적이지 말라고 질문지도 대낮에 다 작성하고 애매한 거 나오면 좋은 쪽으로 체크한 건데 하하....


솔직히 잘 모르겠다. 감정대로 행동하라는 거. 그거 어떻게 하는 건데요....???


그 인간이 나한테 뭐라 할 때마다 속시원히 욕 한 번 제대로 해주지 못한 게 너무 화가 나는데 지금이라도 여기서라도 화내면 되나? 명언집이라도 만들어야 하나 싶었던 그 자식이 나한테 했던 이야기들.


- 이 이야기(자기가 유부남에 애도 있다는 거 속이고 날 만났다는 거)는 우리끼리만 알면 안 될까? 누가 왜 헤어졌냐 하면 그냥 안 맞아서 헤어진 걸로 하면 안 될까?

- 너 선 넘으면 나도 가만히 있지 않겠다

- 왜 이렇게 나쁜 쪽으로 몰아가냐  

- 내가 마녀사냥당할 것 같다

- 가해자한테 지나친 경향이 있다

- 피해자가 보호받아야 하는 거지만 그렇다고 가해자를 해칠 특권이 있는 건 아니다

- 본인 잘못도 있을 텐데 자기반성이란 없는 사람 같다.


감히 그 와중에 저런 소리를 할 수 있다는 게 너무나 대단하다는 생각밖에 안 든다. 솔직히 내가 뭐라도 했으면 모르겠다. 난 끝까지 배려했다. 쓸데없는 배려였다는 게 저런 소리 들으면서 하나씩 더 깨달았지만.



4시가 되어가네. 약 먹고 자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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