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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초록빛 청메이 Jun 24. 2019

속이 다 후련한 결말

블랙미러 시즌 2 <화이트 베어>

이 글은 블랙미러 시즌2 <화이트 베어>에 대한 스포가 상당히 있습니다.



요새 집중하는 또 한 가지. 콘텐츠.

넷플릭스를 유난히 많이 보고 있다.


마침 브런치에서 넷플릭스와 콜라보 이벤트를 우연히 봤는데 <블랙미러>와 <기묘한 이야기> 기대평을 쓰라고 해서 워낙 좋아하는 콘텐츠들이라 반가운 마음에 혜택이 뭔지 보지도 않고 기대평을 썼다.


그랬더니 됐다.


넷플릭스 3개월 이용권과 블랙미러 스페셜 굿즈가 왔다. 기대는 안했는데 꽤나 고급지게 와서 기분은 좋더라.

<블랙미러> MD는 블랙미러 엄청 좋아하는 우리 작가님 줘야겠다


솔직히 <블랙미러>는 그렇게 좋아하지는 않는다^^;

처음에는 신기해서 보다가 사실 보고 나면 유쾌한 기분이 들지는 않아서 잘 안 보게 됐는데 

업계에서 하도 난리인 콘텐츠라 약간은 의무적으로 보는 그런 영드다.


블랙미러 시리즈에서는 물론 드라마 시리즈는 아니지만 <밴더스내치>가 최고라 할 수 있고, 이번 달에 시즌5가 나왔지만, 오늘은 뜬금없이 시즌2 <화이트 베어>에 대해 이야기하고자 한다.


넷플릭스의 <화이트베어> 소개글(출처: 넷플릭스)


사실 <화이트 베어>는 최근에야 봤다. 앞서 말했듯이 뭔가 찝찝한 기분 때문에 시즌1을 본 이후 2는 굳이 보지 않았는데 저 소개글을 보고 보고 싶어 졌다. 요새 이 생각 저 생각이 많아지면서 '한 8개월 정도의 기억만 싹 다 지우고 싶다' 이런 생각이 많이 들었어서인지 왠지 저 이야기에 끌렸다.


역시나. 블랙미러는 거의 항상 감탄사로 마무리된다. 특히 <화이트베어>의 결론은 블랙미러의 다른 시리즈들을 보면서 왠지 모르게 불쾌했던 마음과는 다르게 속이 후련했다.


이야기를 간단히 소개하면 이렇다.

한 여인이 모든 기억을 잃은 채 깨어난다. 희미한 기억과 정체불명의 기호가 머리를 어지럽힌다. 밖으로 나오자 사람들은 휴대폰으로 그녀를 촬영하고 누군지 모르는 사람들이 그녀와 그녀를 돕는 이들을 공격하고 죽인다. 그녀를 돕는 줄 알았던 남자도 사실은 공격자였다. 그녀의 기억은 끝까지 돌아오지 않는다. 마냥 괴롭다. 사람들이 왜 저러는지 알 수 없고 죽음에 대한 극단의 공포에 그녀는 점점 더 미칠 것만 같다.

사실 이 곳은 일종의 테마파크였다. 영화 <트루먼쇼>와 비슷하다고 보면 된다. 주인공은 그것이 자신의 삶이라 믿고 있었는데 알고 보니 누군가에 의해 조종된 연출인 것이다. 그렇다면 그녀는 피해자인가?

아니, 그렇지 않다. 그녀는 어린아이를 유괴하여 학대하고 살인한 유괴살인범의 약혼자였다. 그 살인범은 자살을 했고 대중은 그것에 분노했다. 가해자가 그 죄의 대가를 받지 않고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는 점에서. 그래서 그녀가 같은 선택을 하지 못하게 하려고 이 잔인한 테마파크가 만들어진 것이다. 아이가 끔찍하게 살해당하는 모습을 즐기며 촬영한 자에게 똑같은 체험을 경험하게 해 주기 위해, 그녀의 기억을 지우고 그녀를 괴롭히는 사람들을 방관하며 그녀가 괴로워하는 모습을 옆에서 웃으며 촬영을 한다. 마지막 무대의 막이 열리고 환호하는 관객들을 보며 그녀는 왜 이런 일이 벌어진 것인지 알게 된다. 서럽게 우는 그녀에게 사람들은 거짓 눈물은 역겨우니 울지 말라고 야유한다. 그녀는 다시 무대 뒤로 퇴장하고 연출자는 울며불며 사정하는 그녀의 기억을 다시 지운다.  
여주인공이 본인이 한 짓을 깨닫게 되는 장면 (넷플릭스 블랙미러 <화이트베어> 화면캡처)


사실 굉장히 잔인하다. 무한반복의 괴롭힘. 이 편을 보고 아마 이 작가는 분명 어떤 가해자에 대해 큰 분노를 가지고 있거나 간접경험을 한 사람일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피해자로서의 분노는 그 어떤 법으로도 해소가 되지 않는다. 그렇다고 그 가해자를 어떻게 할 수 있지도 않다. 할 수만 있다면 똑같은, 아니 더 괴로운 경험을 하게 해주고 싶다. 그 답답함이 이런 이야기를 쓰게 만들지 않았을까.


가해자들은 이러저러한 이유를 대가며 본인의 잘못을 축소하고자 하는 경향이 있다. 자신이 저지른 큰 죄가 있지만 자기는 원래 그런 사람이 아니라는 것이다. <화이트베어>의 여주인공이 자신은 약혼자의 주문에 빠진 거라고 변명하는 것이 이런 거다. 더불어 이제 그만하라며 마지막까지 몸부림을 치는 것 역시 자신의 잘못을 인정은 하지만 그 죗값이 너무 큰 것 아니냐는 반항으로 상징된다. 하지만 피해자는 그들이 자기변명을 만들 그 시간에, 그리고 그 변명에, 수도 없이 또 다른 상처를 입고 잊히지 않는 괴로움에 힘겨워한다. 본인의 죗값은 자신이 선택하는 것이 아니다. 받아들이기 싫어도 받아들여야 한다. 그걸 거부하는 모습이 피해자를 또 힘들게 한다는 것을 알았으면 한다. 피해자는 누구든 <화이트베어>의 결론을 원한다.




 #넷플릭스 #스토리텔러 #블랙미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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