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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초록빛 청메이 Sep 16. 2019

결국은 잘 이겨낼 거야

로맨스물인지 알았는데 아니네

이 글은 JTBC <멜로가 체질>에 대한 개인적인 리뷰로 콘텐츠에 대한 스포가 다소 있습니다.


진짜 사랑이라 믿었던 그 감정인지 거짓인지에 데이고 나니 사랑이라는 것에 대한 회의감이 생겼다. 실제로 지금은 이 세상 모든 남녀의 사랑에 대해서 의구심만 남아있다. 그래서 요 몇 달간 멜로니 로맨스니 뭐 그런 단어들은 듣기도 싫고 보고 싶지 않아서 그 좋아하던 로맨틱 코미디들은 쳐다도 안 봤다. 다 거짓말 같아서.


그래서 <멜로가 체질>이라는 드라마는 제목을 보자마자 '윽' 거부감이 들었다. 실제로 관심도 갖지 않았다. 그러다 친구가 몇 번을 꼭 봤으면 좋겠다고 계속 얘기를 했다. 그냥 너가 봤으면 좋겠다고. 그런 이유가 있다고.


처음에는 친구가 나에게 생긴 사랑에 대한 부정적인 인식을 바꿔주려고 따뜻한 로맨스를 보라는 것인지 알고 "아 몰라 몰라~ 지금 멜로의 'ㅁ'자만 들어도 소름인데 '멜로가 체질'이라니. 어우. 너 많이 봐~ 너가 내 몫까지 더 봐~~" 라고 했다. 내 심정을 모르는 친구도 아니고 얘가 이렇게 말하는 이유는 뭐가 있겠다 싶으면서도 그냥 저게 온갖 사랑이야기에 대한 솔직한 내 감정이다.


그럼에도 이 친구는 포기하지 않았다. 틈만 나면 멜로가 체질 이야기를 했다. 질긴 녀석. 그 노력에 난 드디어 처음으로 이 드라마를 검색해봤다. '아, 이병헌 감독님이 썼다는 드라마가 이거였구나.' 급관심이 생겼다. 우리나라 최고의 코미디 영화감독의 첫 드라마. 진작 이렇게 말해줬다면 벌써 봤을 텐데ㅎㅎ 접근을 잘못했네 짜식.


1화를 보고, 정주행까지는 아니지만 며칠 동안 다 봤다. 하하, 이 드라마 물건일세.


일단 세련된 유머의 대사들이 참 마음에 든다. 처음에 상당히 얄미운 캐릭터로 나오던 범수는 입장 바꿔 생각해보라는 진주의 말에 이렇게 답한다.

"입장을 왜 바꿔서 생각해야 해요? 내 입장이 훨씬 좋은데?"

여기서 어우 때려주고 싶다 싶으면서도 웃음이 픽 났다. 맞네, 내 입장이 더 좋은데 왜 입장 바꿔 생각해야 하니ㅋㅋㅋ 기발하네.


진주가 스타작가의 보조작가가 되어 이제 꽃길만 걷자며 행복해하다 현실에 찌들어 글을 쓰며 하는 혼잣말도 기똥차다.

"그래, 원래 꽃길은 비포장 도로다."

그치, 비포장도로인 꽃길은 편치 않아. 보이기에만 아름답지.


제일 웃겼던 장면은 드라마판 선배로서 충고 한 번 하겠다는 스타작가 혜정에게 귀를 막고 고개를 절레절레하는 범수의 대사다.

"안 들어ㅓㅓㅓ 안 들어~~~ 충고 안들어-어ㅓ어~~~ 아아아아아아아"

진짜 배꼽 잡고 웃었다. 얼마나 통쾌하고 웃긴지.


제일 재수 없는 대사는 그래도 뭐니 뭐니 해도 얘 임신시켜 결혼하고 1년 만에 삶이 행복하지 않다며 이혼하자던 승효가 한 소리지. 한주가 "내 행복은?"이라고 물으니

"한주야, 네 행복을 왜 나한테 찾아?"

아니, 뭐라고??? 이런 놈들은 뭐 어떻게 좀 처단이 필요하지 않나?? 내가 이런 거 보기 싫어서 이런 드라마 안 본다고!!! 으악.


그러면서도 다 보고 있다. 심지어 저런 대사들 놓칠까 봐 소리 잘 안 들린 부분은 돌려서 다시 본다. 이 외에도 이병헌 감독 특유의 디테일한 유머들이 너무 재미있다. 은근 tvN 까는 것도 재밌고ㅎㅎ



그런데 내가 이 드라마를 좋아하는 더 큰 이유는 사실 다른 것에 있다. 바로 은정이라는 캐릭터 때문이다.


은정은 사랑 따위는 믿지 않았다. 그러다 홍대를 만났고 사랑에 빠진다. 둘은 세상 너무 아름다운 사랑을 했는데... 홍대는 병으로 세상을 떠난다. 그녀는 아무렇지 않은 척 원래 모습대로 살아간다. 힘들다는 이야기도 하지 않았고 울지도 않았다. 친구들과 웃고 떠들고 그냥 늘 그랬듯이 담담했다. 하지만 사실은 멀쩡하지 않았다. 그러다 결국 그 상실감이 폭발한 어느 날... 은정은 자살시도를 한다. 그때서야 비로소 진주, 한주는 은정의 상처가 너무 깊었다는 사실을 깨닫는다. 미안한 마음에 마냥 운다. 다행히 생명에 지장은 없어 다시 집에 돌아온 은정이지만... 유니세프 후원 광고를 보면서 전혀 웃기지 않은 장면인데 웃고 있다. 그 모습을 본 효봉은 또다시 누나를 잃을까 너무 무서워 진주와 한주에게 연락을 한다. 그날로 바로 진주와 한주는 은정의 집으로 모두 들어온다. 그렇게 세 여자와 한 남자, 아니 두 남자(한주의 아들까지)의 동거가 시작된다.

친구가 이 드라마를 나에게 추천한 이유도 이거였다. 왜 추천하는지 말하지 않았던 이유도 여기에 있었다. 이 친구는 내가 정신 못 차리고 헤매고 있을 때 "당분간이라도 우리 집으로 오면 안 돼? 그냥 같이 있고 싶어서."라고 했던 친구다. '너가 너무 걱정돼'가 아니라 '그냥 같이 있고 싶어서'라고 말해주는 그 마음이 너무 고마웠었다. 이 드라마를 추천하는 구체적인 이유를 말하지 않은 것도 비슷했다. "그냥 이거보다 보니까 우리도 같이 살면 재밌을 거 같아서." 이게 그녀의 추천 이유 한 마디였다. 그 마음이 또 한 번 느껴져서 난 그저 또 고맙다.


은정은 홍대의 환각과 환청 안에서 살아간다. 늘 항상 그가 옆에 있다고 느끼고 혼잣말을 한다. 진주, 한주, 효봉 모두 알고 있지만 사랑하는 사람을 잃을 뻔했던 그들은 함부로 은정이 잘못되었다고 지적하고 싶지 않다. 아니, 그러면 무언가가 더 잘못될 것 같아 아무도 말하지 못한다. 그렇게 2년이라는 시간이 흘러 우연히 은정은 본인이 찍은 영상 속에서 홍대와 대화를 하고 있는 자신을 발견하고 현실을 깨닫는다. 홍대는 곁에 없다. 또다시 멘붕에 빠진다. 담담하게 그리고 진심으로 심리상담가를 만났으면 좋겠다고 말하는 효봉의 말에 은정은 처음으로 심리상담사를 찾아간다. 언제 마지막으로 울었냐는 상담가의 질문에 은정은 이렇게 말한다. "음... 운 적이 없는 것 같아요. 기분이 없는 기분이랄까."


그냥 마음이 너무 아팠다. 그동안 그저 담담하게 살아왔던 은정이 남일 같지 않았다. 그렇게 감정을 숨기게 된 것도 다 무언가의 계기가 있는 거다. 감정, 특히 슬픔의 감정은 폭발하고 분출해야 한다. 그냥 담아둔다고 담기는 것이 아니다. 터져야 곪지 않는다.


2년 넘게 기다린 말이야. 힘들다고 말해줘서 고마워.


2년 만에 처음으로 "나 힘들어. 안아줘"라고 말하는 은정에게 진주, 한주, 효봉이 하는 말. 그녀 곁에 이런 사람들이 있어서 그래도 그녀는 버텨가는 것이다.


아쉽게 시청률은 좀 낮은 것 같지만 나에게는 너무 감사한 드라마이다. 꼭 은정뿐만 아니라 그들 삶의 모습이 현실과 많이 다르지 않아서 그저 보면서 웃고 울고 마음의 위로를 받는다. 마지막 회에서는 트라우마를 잘 이겨낸 은정의 모습을 볼 수 있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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