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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샐빛 Mar 06. 2022

10. 그래도 '당분간' 은 살아보겠습니다

조촐한 크리스마스와 함께 자가격리가 끝나고, 조금씩 짐 정리를 하면서 시간을 보냈다. 가끔씩 고개를 돌려 통창 바깥의 어색한 풍경을 볼 때마다 내가 정말 하노이에 와 있구나, 새삼 느껴졌다. 이곳으로의 이주를 결심하고 준비하면서 있었던 여러 가지 일들을 생각하면 불과 두어 달 전의 일인데도 불구하고 까마득하게만 느껴졌다. 모든 것을 무사히 잘 해냈다는 안도감과 동시에 앞으로 이곳에서 살아가야 할 날들에 대한 약간의 두려움이 교차했다. 그러는 사이 어느새 해가 바뀌었다. 새해를 새로운 곳에서, 그것도 외국에서 보내게 될 줄은 정말 몰랐지만 이제 나는 어찌 되었든 하노이에 살게 될 것이었다. 아니, 그때까지는 그럴 줄 알았다.


남편은 내가 생각하는 것보다 일이 많았다. 주재원들의 삶이 대부분 그렇다지만 집에서 새벽 6시에 나가서 밤 10시는 다 되어야 돌아왔다. 아이 학교와 가까운 곳으로 집을 얻는 바람에 회사에서 집까지의 거리가 멀기도 했지만 기본적으로 퇴근시간이 늦었다. 게다가 토요일도 자주 출근했다. 원래는 매주 출근인데 그나마 법인장이 인건비 줄이느라 토요일 출근을 격주로 하고 있다고 했다. 한국에 살 때보다 저녁이 없는 삶이었고 더불어 주말도 없는 삶이었다.


한국에 있을 때는 남편이 혼자 이것저것을 처리하는 나에게 신경을 쓰지 않는다고 불만을 가졌었는데 여기 와서 보니 그럴 수도 있었겠다, 이해가 갔다. 게다가 모태 성실맨인 남편은 제발 월급 받는 만큼만, 티 나지 않을 만큼만 쉬엄쉬엄 일하라고 해도 자신이 받은 월급의 2~3배는 해줘야 한다고 생각하는 사람이었다. 문제는 그만큼 책임감 있게 일해도 위에서 알아주지 않는다는 데 있었지만.


남편이 다니는 회사의 법인장은 눈앞의 실적에만 연연하는 사람이었고, 당장의 이익만을 늘리려는 사람이어서 남편은 극도의 스트레스를 받고 있었다. 아마 그동안은 꾹꾹 누르고 있었던 것 같은데 나와 아이를 만나 마음의 안정을 찾게 되니 스트레스를 참기가 더 어려워진 것 같았다. 숨이 잘 안 쉬어진다고 할 정도로 극도의 스트레스를 받던 남편은 결국 한국으로 돌아가면 어떻겠냐고 털어놨다. 아이 학교 문제로 서둘러 들어오지 않았더라면 남편이 먼저 사표를 쓰고 한국으로 귀국을 했을지도 모를 일이었지만 어쨌든 수많은 난관을 뚫고 하노이에 온 지 이제 막 한 달이 넘어가는 시점이었다. 솔직히 어이가 없었다. 그럴 거면 진작에 말을 하던가, 굳이 내가 여기까지 온 이 시점에 저런 이야기를 하는 건 무슨 경우인지 화가 나다가, 얼마나 힘들면 저럴까 싶어 안쓰럽기도 해서 좀처럼 어느 쪽의 마음을 붙들어야 하는지 혼란스러웠다. 내 표정이 좋지 않자 남편은 좀 더 고민해보겠다며 말을 거뒀지만 이미 한 번 마음을 먹으면 고집을 부리는 걸 알고 있었기에 기운이 탁, 빠져버렸다.


며칠을 멍하게 지내다 나는 남편에게 솔직하게 얘기했다. 당신이 힘든 건 충분히 이해하고 공감하지만 솔직히 지금, 꼭 이 타이밍이어야 하냐고. 집도 차도 다 정리하고 아픈 애를 끌고 여기까지 왔는데 다시 돌아가자고 하면 도대체 그동안 나는 뭐한 건지 화가 난다고. 남편은 내 입장을 이해한다며 자기가 생각해도 지금 바로 돌아가는 건 아닌 거 같다고 이직을 준비하겠다고 했다. 이직을 하면 주재원이 아닌 현지 채용이라 대우가 좀 달라질 수는 있지만 최대한 비슷한 조건으로 이직을 하겠다고 했다. 이곳에서 만난 주변의 선배들과 상담을 했을 때도 다들 지금 돌아가는 건 아닌 것 같다며 이직을 도와주겠다고 했단다.


이직을 하라고 등을 떠밀 수도, 선뜻 돌아가자고 손을 내밀 수도 없어서 나도 혼란스러웠다. 게다가 이 모든 일들에 내가 선택할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는 사실이 나를 더 힘들게 했다. 오래서 오고, 가자고 해서 가고. 뒤치다꺼리나 하는 게 내 인생인가 싶어 울분이 솟았다. 결혼을 하고, 아이를 낳고 나서부터는 내 인생을 살고 있지만 중요한 순간마다 내가 선택할 수 있는 것은 거의 없는 것만 같았다. 앞으로도 우리 가족의 경제적 생존을 담당하고 있는 남편의 결정에 따르기 위해, 아이의 성장과 양육을 위해 나는 얼마나 더 뒤로 물러서야 하는 걸까 생각만 해도 우울했다.


성실하고 일 잘하는 것으로 평판이 좋았던 남편은 나의 우려를 얼른 씻어주기라도 하려는 듯 빠르게 이직을 준비했고 지금 다니는 회사보다 상위 업체의 실무 면접을 통과했다. 이직할 회사의 법인장과 형식적인 면접만 앞둔 상황에서, 두 회사의 법인장이 친분이 있는 데다 동종업계이다 보니 도의적 차원에서 현재 회사의 법인장에게 채용에 대해 연락을 했던 모양인데 현 회사의 법인장이 남편의 이직을 차단해 버렸다. 도대체 무슨 자격으로 그러는지는 모르겠지만 현재 회사의 법인장이 그러한 액션을 취하자 이직할 회사에서도 부담을 느껴 남편의 채용을 포기했다. 이런 상황이 안타까웠는지 실무 면접을 봤던 이사가 남편에게 미안하다고 직접 전화를 해 줄 정도였다.


남편은 일련의 상황을 겪으며 분노했고, 법인장이 계속 같은 태도를 취하면 이직을 하려 해도 할 수가 없을 것 같다며 다시 한국행 카드를 꺼냈다. 그냥 사표를 내고 좀 쉬었으면 좋겠지만 사표를 내는 순간 회사에서 만들어 준 거주증(취업한 회사에서 노동허가증과 거주증을 만들어 주어야 집이나 은행 거래 등을 할 수 있다)을 취소해 버리기 때문에 15일 내에 출국을 해야 해서 함부로 때려치울 수도 없었다. 이제는 나도 어찌해야 할 바를 모르겠어서 그냥 다 집어치우고 제주도 귤 농장에서 귤이나 따며 살자고 할 정도였다. 아이 개학까지 한 달도 안 남은 시점이었고 다시 짐을 싸야 하는지 어째야 하는지 매일이 불안했다.


고민하던 남편은 현 회사보다 연봉을 조금 손해 보더라도 다른 계열의 회사로 이직하겠다며, 이번엔 쥐도 새도 모르게 진행하겠다고 전의를 불태웠다. 면접은 양해를 구해 퇴근 시간 이후에 진행했고, 주변에서 여러모로 많이 도움을 주었다. 규모는 좀 작은 회사였지만 나름대로 탄탄한 곳이고 지금보다 일이 힘들지 않을 것 같아서 좋다고 했다. 게다가 퇴근 시간이 빨라서 진짜 저녁이 있는 삶이 가능할 같다며 기대하는 눈치였다. 무엇보다도 면접을 진행한 법인장이 무척 사람을 소중하게 대하는 분이라는 느낌을 받았다고 했다. 면접 진행 후 한국 본사에 보고한 후 연락을 주겠다고 한 며칠이 길게만 느껴졌다. 그리고 남편은 지금 회사에서 받았던 것과 거의 동등한 조건으로 이직에 결국, 성공했다.


남편은 또 한 번 법인장이 사표를 수리하지 않는 등의 방해공작을 펼까 봐 노동법까지 찾아보면서 대응법을 준비했는데 결국엔 나갈 것이라는 걸 인정했는지 생각보다 순순히 사표를 수리했다며 마음 편해했다. 홀가분해하는 남편을 보면서 나는 한편으로 마음이 무거웠다. 하노이에서 꼭 살고 싶은 것도 아니고 살아야 할 이유도 없는데 괜히 내가 붙들어 놓은 건 아닌가 하는 생각 때문이었다. 여기서 살아도 그만 한국에서 살아도 그만인데 그냥 명분이 있을 때 돌아갈 걸 그랬나 싶어 잠시 후회했지만 이왕 이렇게 된 거 이제 진짜로, 정말로, 하노이에서 "당분간은" 살게 될 것이었다. 퇴사를 2주 앞둔 상황이었고 아이의 초등학교 입학이 며칠 남지 않았던 시점이었다.


하노이까지 오는 과정도, 하노이에 와서도 뭐 하나 쉽지 않았던 우리, 하노이에서 정말 잘 살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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