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 싸움
니체가 말하는 영원회귀의 시간 속에서 시간은 거칠게 다가오고 그 속에서 인간은 천변만화(千變萬化)하는 모습으로 다가오는 고통을 견디며 살아간다. 그리고 죽음으로 이른다. 이 흔들릴 수 없는 거대한 우주적 시간의 이치 속에서 우리는 니체가 말하는 우상을 버리고 어떻게 살 것인가? 그 고통의 삶을 이겨내기 위해서 피할 수 없는 것이 싸움이다. 자기 내면의 싸움이든지, 타자와의 싸움이든지. 사람이 운명의 주체가 되기 위해서 겪어야 할 것이 바로 싸움이다.
나는 개인적으로 말하자면, 싸움을 상당히 즐기는 편이다. 일부러 싸움을 걸지는 않지만, 다가오는 싸움을 회피하지는 않는다. 몇 년 전 내가 없을 때 아내랑 아들, 딸이랑 며느리가 같이 앉아 자기들이 아는 바대로 하면서 내 심리 테스트를 했는데, ‘논쟁을 즐기는’ 성격으로 나와 배꼽을 잡고 웃었다고 했다. 그들의 비웃음을 심각하게 받아들여, 공자 왈 맹자 왈, 니체를 꺼내며 설명하면 또 ‘진지 꼰대’ 소리 들을까봐 그냥 웃고 말아버렸지만, 사람들은 싸우는 것을 평가절하 하는 것은 사실이다. 싸움보다는 평화 그것도 희생하고 자비로우며 양보를 통해 평화를 추구하는 것을 훨씬 가치 있는 일로 생각하곤 한다. 나는 그런 평가에 동의하지 않는다. 평화라는 것은 싸움의 결과가 아니고 싸움의 일부, 더 정확하게 말하자면 싸움의 현상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평화가 오는 것은 그것이 열전이든 냉전이든 끝없는 내부와 외부의 싸움을 벌인 과정 중에 나타난 현상을 기술한 것이지 그 원인이나 결과로 고정될 수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결국 사회적 혹은 더 심하게 말하자면 과학적 원인 혹은 결과라 규정하는 것은 철학적 혹은 본질적 사유를 빼고서 하는 것일 뿐이다. 그렇다고 해서 철학적 혹은 본질적 사유를 빼는 게 바람직한 것은 아닌데, 사람들은 그렇게들 산다. 과학과 사회 학문을 사고의 원천으로 삼고.
내가 하는 논쟁은 외부와의 싸움에만 해당하는 것은 아니다. 내 자신의 내부를 들여다보면서 본능적으로 어떤 흐름에 시시비비를 걸면서 싸우고 저항하는 것이 더 주를 이룬다. 젊었을 때 나를 규정하는 것으로, 자의 반 타의 반 불렀던 것이, ‘체제 저항적 인간’, ‘자발적 사회 부적응자’와 같은 것들이었다. 나는 강해야 했다. 그래야 궁극에 가서 내가 이길 수 있다, 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나는 도덕이나 전통이라 부르는 그 체제 내의 문화를 썩어빠진 것이라 규정하고 그것들과 싸우면서 이기기 위해 강해져야 했고, 그것을 위해 악의 싹은 반드시 자르고 뿌리를 뽑아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것은 악에 대한 보복 행위다. 손쉽게 이해해 주고, 관용을 베풀고, 사랑으로 감싸서 될 문제가 아니었다. 애초 그렇게 해서 문제가 해결될 것 같으면 인류의 역사가 이렇게까지 될 리가 만무하다. 난, 확고하게 믿는다. 인간은 악이다, 라는 사실을. 그래서 싸운다, 싸우면서 난 강해지고. 그렇다고 피곤해 하지 않는 것은 아니지만, 그래도 피곤도 나의 운명이라 생각하고 받아들이면서 간다. 그렇다고 사회에서 말하는 큰 싸움 같은 데는 별로 관심을 두지 않으니 그나마 좀 덜 피곤하다. 그런 덕에 산다.
싸움의 주체는 나 자신, 개인일 수밖에 없다. 신이고 도덕이고 이념이고 간에 그 어떤 것도 나 자신을 대신하여 싸움을 치를 수 없을 뿐만 아니고 그러한 것으로 무장이 되면 나 자신 주체가 약화되어 싸움을 제대로 치를 수가 없게 된다. 주체는 아주 독립적이어야 하고, 그래서 개체여야 한다. 정신적으로 냉철해야 하며 무엇보다 유연하고 자유로워야 하며, 그것을 향한 힘에의 의지가 확고해야 한다. 그런데 그 의지라는 것이 이성에 의해서만 만들어지는 것은 아니다. 인간이라는 것이 이성적 동물이 아니고 감성적 동물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인간이 합리적이고 이성적 사유의 주체가 아니기 때문에 그가 수행하는 싸움 또한 나의 그리고 상대방의 – 항상 적인 것은 아니다. 때로는 자녀가 될 수도, 배우자가 될 수도 때로는 내 자신이 될 수도 있다. - 감정을 존중하고, 그것을 주체의 하나로써 그 고유 가치를 평가해줘야 한다. 그는 자신의 감정이 받아들여질 때 존중 받는 것을 느끼면서 비로소 강해지고 그런 과정을 통해 상대방이 나의 일부가 될 수 있기 때문이다. 돌이켜 생각해보자. 그 동안 살아오면서 얼마나 많은 경우가 있었는지를. 누군가가 나를 향해 부당한 비난을 하는 경우 그에게 즉각 반발하여. 나도 분노의 비난을 하고 그것들이 이어져 논쟁이 벌어지면 상대방은 자신의 잘못을 절대로 받아들이지 않고 역으로 자신이 더 크게 부당함을 당했다고 느낀다. 그러다 보면 이런 싸움은 논쟁에서 이기더라도 그와 함께 어려움을 극복하여 강한 미래를 여는 사람으로 나아 갈 수가 없다. 그것은 단순하다. 상대방의 감정을 이해해주지 않았기 때문이다. 상대방의 감정을 받아들이지 않고, 그를 이길 수는 없다. 그가 설득당하지 않고서 나를 받아들인다는 것은 무망하다. 그러면 나는 그 싸움에서 지게 되는 것이다.
싸움에서 가장 필요한 것은 그 대상이 어떠한지를 면밀히 살펴보는 것이다. 그가 처한 처지에서 가지고 있는 감정까지 말이다. 옳고 그름, 문제를 치유하는 해결책, 논리적인 계산 등이 항상 문제의 본질은 아니다. 여럿으로 섞인 이질적 덩어리를 실타래 풀 듯, 그 과정을 거치면서 나갈 때 싸움의 주체인 내 자신의 힘을 측정할 수 있고, 그 위에서 문제의 본질을 대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 싸움을 전개하는 과정에서 상대를 면밀히 살피는 것을 통해 내 자신이 강해진다. 따라서 싸움에서 내 자신이 해야 하는 가장 중요한 문제는 적수들을 이기는 것이 아니다. 자기 자신이 갖는 힘의 크기를 파악하고 키우고 그것을 극대화 할 수 있는 기술을 계발하는 것이다.
그 싸움의 기술은 긍정의 자세로 고통을 극복하는 것이다. 적을 닮아 적을 이기면 결국 적에게 무너진다. 영화감독 김기덕이 타지에서 전염병에 걸려 죽었다는 소식을 들었다. 일부 여성들이 그의 죽음을 조롱한다. 그건 이기는 싸움이 아니다. 그 페미니스트들이 싸움을 통해 얻어내는 것은 결국 단편적인 감정의 배출뿐이다. 그 싸움이란 그것을 통해 새로운 삶의 방식을 만들어내는 일이어야 하는데, 전혀 그렇지 못하다. 그렇지 못하면 싸움의 주체도 괴물이 되어 나락에 떨어질 수밖에 없다. 싸움이 끝나기도 전에, 한 발짝 앞으로 나아가기도 전에, 그 괴물과 얽혀 괴물 자체가 되어버리는 것이다.
"괴물과 싸우는 사람은 그 싸움 중 괴물이 되지 않도록 조심해야 한다. 네가 심연을 오랫동안 들여다본다면, 그 심연 또한 너를 들여다볼 것이기 때문이다."
《선악의 저편》 146
둘러싸인 게 삶이다.
사방천지, 모두 적이고 나까지도 적이다.
그들 안에서 나를 보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