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진은 룩셈부르크
애가 태어나고 1년이 지났을까?
바운서(aka 방방이)에 앉아 있던 아이가 크라잉넛의 <룩셈부르크>가 나오자 웃으면서 온 힘을 다해 몸을 튕기기 시작했다. 세상 행복한 표정이었다.
사실 <룩셈부르크>의 시작은 아이가 더 아기였을 적, 와이프가 애 재우느라 안고 자장가를 흥얼거릴 때였다. 우리 애는 희한하게 자장가를 불러주면 그렇게 싫어했다. “자장, 자장, 우리 아가”라고 운을 떼는 순간 울먹였고, <섬집아기>를 불러주면 그렇게 서럽게 울었다. 우리 아이에게 자장가는 자장가가 아니었다.
그러니 와이프 입장에서는 다른 노랠 불러줘야 했는데, 마침 낮에 들었던 <룩셈부르크>가 생각났었나 보다. 그런데, “룩, 룩, 룩셈부르크, 아, 아, 아르헨티나”라고 하는 순간 애가 너무 좋아했다. 그때부터였다. <룩셈부르크> 시대의 시작이었다.
애가 생기기 전, 우리 부부는 “나중에 애가 생기면, 어떤 음악을 들려줄 것인가?”에 관해 이야기한 적 있다.
사실 이 대화의 발단은 내가 어렸을 때 어떤 음악을 듣고 자랐는지에서 이어졌다. 부모님이 모두 클래식 음악을 전공하셨고, 누나도 음악을 전공했었다. 조부님께선 음악을 전공하시진 않았지만, 조예가 깊으셨다. 작곡가였던 아버지의 영향으로 어렸을 때부터 현대음악을 자주 접했고, 나중에는 나 역시 타악기를 전공하면서 현대음악을 끼고 살게 됐다. 그리고 나중에는 진짜 좋아졌고, 지금도 즐겨 듣는다.(와이프는 고통스러워 하지만..)
다시 위 질문으로 돌아와서, 나는 내가 어렸을 때 아버지, 어머니 따라다녔던 연주회와 차에서 듣던 KBS 1FM 이야기를 했고, 이런 경험이 음악 취향의 다양성을 만들어주는데 중요한 자양분이었다는 말을 했다.
그때 와이프는 “그거는 지금이고, 그래서 그 어렸을 때 당신은 행복했어?”라고 물었다.
생각해 보니, 어렸을 때 내가 그 음악회를 좋아했냐면, 그렇진 않다. 그 5~6살짜리 애가 뭘 알고 좋아하겠나. 그냥 부모님이 가자니까 가고, 앉아 있으라니까 앉아 있던 거지. 어렸을 적 나에게 예술의 전당, 세종문화회관, 국립극장 같은 공연장은 행복한 공간은 아니었다.
우리 집 분위기는 대중음악을 딱히 못 듣게 하는 건 아니었지만, 기왕이면 클래식을 들으라는 이야기는 언제나 있었다. 내가 처음 용돈 받아 샀던 음반은 베를린필이 연주하고 카라얀이 지휘한 베토벤 교향곡 5번이었다. 자의 반 타의 반이었다. 아버지와 강남역 타워레코드에 갔는데, 나는 팝과 가요 코너를 보고 싶었지만, 아버지께선 냅다 3층 클래식 코너로 데리고 가셨다. 내 눈에 베를린필의 베토벤 교향곡 5번 음반의 표지가 가장 멋졌고, 아버지께서도 적극 추천 했기에, 그걸 고르게 됐다.
하지만 어린 나에게 있어 베토벤의 음악은 앨범 표지만큼 멋지지 않았고, 자연스럽게 한 두 번 듣고 안 꺼내게 됐다.
이후로도 딱히 우리 집에선 클래식 음악을 강요하진 않았다. 물론 아버지께선 내가 서태지, 신해철, 마이클 잭슨 음악을 과하게 많이 들으니 그건 조금 걱정하셨고, (걱정하는 와중에도 테이프보다는 CD가 더 음질이 좋다며, 서태지 솔로 1집 CD를 손수 사다 주시기도 했다) 초등학교 말미 그린데이와 너바나를 듣기 시작하니까 슬슬 말리기 시작하셨다. 그러다 섹스피스톨즈에서 기어이 터지시긴 했었다.(지금 생각해 보면, 나라도 그건 말릴 것 같다. 일단 밴드 이름부터가...)
하지만, 그 나이대 애가 말린다고 말려지겠나? 나는 내 용돈이 허락하는 한 온갖 록, 메탈 음반을 닥치는 대로 사 모았고, 중학교 들어가서는 교내 밴드까지 했다.
현대음악을 비롯한 서양 클래식을 좋아하게 된 건 나중에 커서, 전공 입시를 준비하고, 대학을 거치면서였다. 내가 연주자가 되어보고, 깊게 파보니까 그 맛을 알겠더라.
여하튼, “나중에 애가 생기면, 어떤 음악을 들려줄 것인가?”에 대한 우리의 결론은 심플했다.
“그냥 우리가 좋아하는 것을 들려주고, 편견 없이 다양하게 들을 수 있게 해 주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