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0 평생 제일 잘한 일 중 하나
내 인생 가장 잘 한 선택 중 하나가 장롱면허를 탈출하고 운전대를 잡은 것이다.
아이를 낳고 참 많은 시도를 한다. 아마 혼자라면 죽어도 못했을 도전을 ‘엄마’라는 이름으로 겁도 없이 부딪힌다. 길치, 방향치, 공간 치인 내게 운전은 꽤 큰 용기가 필요한 도전이었다.
스무 살 성인이 되자마자 한 것이 귀 뚫기와 운전면허 취득이었다. 왠지 이 두 행위가 ‘이제 나도 어른’이라 말해주는 같아 뿌듯했다.
이때 운전면허증의 역할은 신분증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지만 주민등록증 대신 운전면허증을 내밀때면 진짜 어른이 된 기분이었다.
내가 본격적으로 운전을 시작한 것은 20대 중반이었다. 당시 나는 회사 다니며 대학원을 다니고 있었는데, 학교 가는 날이면 차를 갖고 출근하곤 했다. 감히 아빠 차는 몰아 볼 생각도 못하고 오빠의 빨간색 슈마를 가끔 빌려 탔다.
목동에서 강남까지, 강남에서 대학로까지 꽤 먼 거리 운전도 어렵지 않았다. 차 선을 바꾸는 것도, 고속도로 위에서 속력을 내는 것도 두렵지 않았다. 단 나를 어렵게 했던 것은 '주차'였다.
2000년대 초반 오빠 차에는 후방 센서도, 카메라도 없었다. (어쩜 후방 카메라는 있었는지도 모르겠다. 기억이 가물가물) 앞에서 말했듯이 나는 지독한 공간 치이다. 내 차와 사물과의 거리가 가늠이 되지 않았다. 얼마만큼 틀어야 이 공간을 빠져나올 수 있을지, 어느 정도 뒤로 물러나야 부딪히지 않을지 적당한 거리와 각을 찾는데 늘 애를 먹었다.
주차할 적마다 쩔쩔맸다.
특히 지하 주차장은 쥐약이었다. 내 차가 빠져야 뒷차가 움직일 수 있는 상황에서 나는 한 없이 위축된다. 심장을 빠르게 뛰고, 등줄기에 식은땀이 흐른다.
차를 앞으로 뺐다, 뒤로 뺐다 핸들을 이리저리 틀어보지만 결국 차는 처음 위치 그대로다. (대체 나는 뭘 한 거지?) 각을 맞추기 위해 핸들을 어느 방향으로 틀어야 하는지 조차 모르겠다.
더 이상 뒷 차를 기다리게 할 수는 없었다. 몇 번의 시도에도 불구하고 주차가 되지 않을 땐 얼굴에 철판을 까는 수밖에 도리가 없다. 안전벨트를 풀고서, 차 밖으로 나온다. 최대한 공손하고 미안한 표정으로 폴더 인사를 한뒤 이렇게 말하는 거다.
“죄송합니다. 제가 초보 운전이라 주차가 서툴러서요. 제 차 좀 대신 주차해 주실 수 있으신가요?”
한 번도 이 부탁을 거절당한 적은 없다. 하지만 이런 경험이 쌓일수록 자신감을 쪼그라 들었다.
주행은 문제 될 것이 없었다. 주차가 문제였다. 기둥이고, 빈 벽이고 범퍼카 마냥 들이 박았다.이런 상황이 반복되자 결국 나는 운전을 포기했다.
그렇게 10년이 넘는 세월을 뚜벅이로 살았다. 주차하느라 애 먹는 것보다, 대중교통이 훨씬 편했다.
둘째를 낳기 전까지 뚜벅이 생활에 불편이 없었다. 나에겐 빨간 스토케가 있었으니, 유모차에 아이를 태우면 몇 시간이고 잘 있어주었다. 아이를 태우고 장도 보고 친구도 만났다. 내게 유모차+ 지하철 조합은 최고의 이동수단이었다. 한 때는 유모차에 아이를 태우고 서울에서 부산까지 종주해도 자신 있을 만큼 나는 걷는 것이 좋았고, 유모차는 내 최애 육아도우미였다.
하지만 둘째가 태어나자 상황이 달라졌다. 아이 둘은 도무지 대중교통으로 감당이 안되었다. 집 앞 대형 마트에 두 아이를 데리고 원데이 강좌를 수강하기 위해 들른적이 있다. 수업이 끝나고 집으로 돌아가려는데 비가 오고 있었다. 갑자기 쏟아진 소나기에 아무리 콜을 해도 택시는 잡히지 않았다. 아이 둘을 데리고 비 속에서 배차를 기다리며 눈물이 왈칵 쏟아졌다.
'차로 5분이면 될 거리인데, 운전을 못해 비 속에서 발만 동동 구르는구나.' 너무 속상했다. 내 자신이 왜이리 바보 같고 한심해 보이는 지, 이날 나는 한가지 결심을 한다.
‘다시 운전을 해야겠어!’
내게 운전은 생존이었다. 양가 어른 멀리떨어져서 아이 맡길 곳이 없는 나는 아이 둘을 이고지고 함께 움직여야만 했다. 운전이 꼭 필요했다.
“여보! 나 운전해야겠어. 근데 나 또 주차하다 차 들이박을까 봐 무서워. 그러니 새 차 말고 500만 원짜리 중고차 한 대 사줘.”
“아무리 중고차라도 500만 원짜리 차가 어딨어? 그리고 애 태우고 다닐 사람이 부딪힐 걱정부터 하면 어떡해? 운전 못 하는 사람일수록 좋은 차 타야 해. 그래야 더 조심하고, 다른 사람도 함부로 하지 못해. 일단 기다려봐 차는 내가 좀 더 알아볼게.”
나는 주차하기 쉬운 콤팩트한 사이즈의 경차, 부딪혀도 속상하지 않을 이미 흠집이 나 있는 차를 떠올렸다. ‘이런 차라면 부담 없이 운전 할수 있을거야.’하지만 남편은 떡 하니 독일 B사의 차량을 사 왔다.
“뭐야? 이 차를 내가 어떻게 몰아? 난 주차할 때마다 기둥에 들이 박는데, 이걸 어쩌라고? “
“일단 해봐. 사이즈도 크지 않아서 당신 주차하기도 어렵지 않을 거야. 그리고 요즘은 전후방 센서랑 카메라가 잘 되어 있으니 당신 예전 운전 할때랑 달라. 아이들 태우고 다니는데, 경차는 위험해. 동네에서만 몰 거니까 속력 낼 일도 없고, 주차는 이 센서들이 도와줄 거야.”
차부터 사놓고, 운전연수를 신청했다. 총 20시간의 운전연수 동안 주차만 공략했다. 4시간은 선생님 차량으로로 나머지 16시간은 내 차로 연습했다. 확실히 전후방 센서가 장착된 차는 주차하기 수월했다.
‘오 신이시여! 이 발명품이 나를 구원했나이다.’
그렇게 헤매던 주차가 어렵지 않았다. 신기했다. ‘아줌마 파워’ 인지, 과학 기술의 발전 덕분인지 더 이상 기둥에 차를 들이박지 않아도 주차를 할 수 있게 된것이다.
20일의 연수가 끝나자마자 둘째를 태우고 다니기 시작했다. 운전 못했던 날들의 서러움이 나를 용기 낼 수 있게 했다. 이제 더 이상 나를 태우러 먼길 돌아오는 친구에게 미안해하지 않아도 되었고, 비 속에서 하염없이 콜을 부르는 일도 없을 것이다.
당시 30개월이 채 안된 우리 둘째는 내가 운전하는 차를 탈 때면 긴장을 했다.
“엄마 차! 차 봐야지! 앞에 차 있어.”
“너무 빨라. 신호 잘 보고.”
“엄마가 다 알아서 하거든. 걱정하지 마.”
엄마가 운전하는 내내 잔소리를 늘어놓던 아이는 목적지에 도착해서는 긴 숨을 내쉬었다.
“휴~”
그렇게 일 년이 지났다. 둘째 어린이집을 보내면서 등 하원 때문에 매일 운전을 하게 되었다.
그 사이 내가 몰던 차는 더 커졌다. 남편이 이직을 하면서 더 이상 차 두대가 필요 없게 되었다. 기존에 타던 차 두대를 처분하고 평소 남편이 타고 싶어 했던 차로 바꾸었다. 번쩍번쩍 광이 나는 새 차에 기가 죽어 차가 도착한 첫날은 운전할 엄두도 내지 못하고 딜러에게 대신 주차를 부탁했던 나이다.
하지만 다음 날부터 어쩔 수 없이 실전에 돌입해야 했다. 별다른 도리가 없었던 나는 새 차를 몰고 둘째 등 하원을 시작했다.
이때 내 운전실력이 부쩍 늘었다. 매일 운전을 했고, 이전보다 커진 차체의 감을 익혀야 했다. 또 첫째 수학학원을 데려다 주면서 자신 없었던 골목길 주차와 운전을 마스터했다.
작년에는 처음으로 춘천 시댁에도 남편 없이 다녀왔다. 시댁 주차장에 도착해서 아이들이 내게 한 말이 기억에 남는다.
"엄마. 이제 운전 잘하네!"
"아빠 없이도 춘천 올 수 있겠다."
아이들도 이제 엄마의 차 안에서 긴장하지 않는다. 엄마가 고속도로를 타도 속력을 내도 괜찮다.
요즘은 매주 한 번씩 20킬로 거리를 첫 째의 시 훈련 때문에 왕복하고 있다. 총 40킬로 거리를 매주 운전한다. 이 거리가 쌓이면 이젠 장거리 운전에도 자신감이 붙을 것이다.
처음부터 내가 500만 원짜리 중고차로 운전을 시작했더라면 어땠을까? 지금처럼 내가 운전할 수 있었을까?
주차하기 쉬운 차, 내 몸에 최적화된 작은 사이즈의 차, 운행하기 쉽고, 차 2대 유지하기에도 부담 없는 중고 경차를 남편이 사왔더라면 어땠을까?
나는 아마 이 차를 버리지 못하고 3년이 지나도록 끌고 다녔을 것 같다.
편하니까, 부담 없으니까. 기둥에 부딪혀도 괜찮으니까.
남편 덕분에 내 한계를 계속 뛰어넘을 수 있었다. '나는 이런 거 못해.'라고 낮게 잡았던 나의 기준을 남편은 끌어올려주었다.
'이 정도는 당신도 할 수 있어.'라고...
아이가 하나뿐이었다면 운전할 생각은 하지 못했을지도 모르겠다. 아이 하나는 얼마든지 대중교통으로 이동 가능했으니까. 아직도 뚜벅이가 제일 속편 하다고 생각하며 살았을지도 모르겠다.
변화는 늘 두렵다.
변화가 가져올 새로운 행복을 직접 경험하기 전까진 알지 못한다. 그저 이게 제일 편한 거라고 경험 너머에 있는 세상을 제대로 알지 못한 채 속단한다. 행동을 제한하고, 변하기를 거부한다.
하지만 변하고 보면 안다.
이전에 내가 알고 있던 세상이 전부가 아니었음을, 새로운 세상에 눈을 뜨고 나면 더 이상 이전에 나로 돌아가고 싶지 않다. '이 좋은 것을 왜 이제 알았을꼬?' 싶다.
경험이 추가되면 할 수 있는 것들이 많아진다. 내게 더 많은 선택권이 주어진다.
기준을 너무 낮게 잡아도 성장의 한계에 부딪힌다. 목표는 할 수 있는 것보다, 가능하다고 예상되는 범위보다 한 두 단계 높게 잡아야 한다. 그래야 발전한다.
그런 의미에서 나는 남편에게 감사한다. 장롱면허 탈출을 도와준 두 아이와, 내 한계를 뛰어넘을 수 있게 도와준 남편 덕분에 적어도 '나는 운전 못해'. '자신 없어.' 하는 꼬리표는 뗄 수 있었다.
남편 덕분에 만년 털털거리는 500만원짜리 중고 경차를 탈뻔 했는데(내가 정한 기준은 이정도 수준이었으니 쉽게 깨지 못했을 것이다.) 지금은 폼나는 세단을 몬다. 마치 날 때부터 한 몸인 것처럼 능숙하게 주차를 할 수 있다. 이제 주차 때문에 운전 못하는 일은 절대 없다.
무엇보다 전에 없던 자신감도 생겼다.
"아! 또 김여사야?" 이런 소리는 듣지 않을 그런 자신감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