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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오순이 Feb 12. 2022

나이 오십에 퇴사 그리고...

뜻하지 않게 독일어 공부, 뜬금없는 전쟁이 시작됐네

오십이 넘고보니 세상보는 눈이 조금씩 달라진다. 세상보는 눈이 관대해지고 멋진 중년으로 접어드는 중이라고 적고 싶지만 실상은 반대다. 쩍 소리만 들어도 늙었다고 괄세하나 싶고, 꼰대라는 말을 들으면 즉각 꼰대편이 되어 꼰대가 뭘 어쨌기에 사회악 취급하나 싶어 서럽다. 오십이 넘자 나도 슬슬 늙은이 편에 설 준비를 하는 거다. 작은 일에도 서러움이 북받히다보니 에너지 소모도 많아져 퇴근후에는 뭔가 창의적인 것을 할 엄두를 내지 못하고 그저 유튜브 방송만 보게된다. 마음의 여유를 찾고 싶었다. 내가 좋아서 자발적으로 뭔가를 도모한 적이 도대체 언제였던지 까마득하다.


나는 쉬어야 한다.


이리하여 8년다닌 회사를 그만두기로 했다. 회사에서는 멀쩡히 출근 잘하던 직원이 갑자기 그 어떤 언질도 없이 그만둔다고 하니 펄쩍 뛰었다. 사실 퇴직에 대해 어떠한 언질을 준 적이 없었던 것은 맞다. 나는 이런 부류의 동료들을 그간 많이 봐왔다. 그만둔다는 소리를 1년이 넘도록 하고 다니면서 정작 그만두지 못하는 사람들, 회사에 대해 온갖 불평 불만을 쏟아 내어 멀쩡히 일잘하는 다른 직원들까지 딴생각하게 만드는 사람들, 그리하여 볼때마다 나는 쟤는 도대체 언제 그만두는 걸까 궁금해지는 사람들. 그 사람들을 보면서 나는 절대 저런 소리를 입에 달고 다니지 않을 것이라 생각했다. 그리고 혹시라도 퇴직의 결심이 섰을때 한 큐에 깨끗하게 그만두리라 맹세했다.


어느날 재택근무를 하던 중이었다. 점심을 먹고 소파에 누워있다가 갑자기 오늘이 바로 그 날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조금 뜬금없긴 했지만 오늘 사표를 보내자. 그간 과적되는 스트레스로 인하여 병가를 내는 일이 잦아지고, 회사에 출근하는 것이 재판을 받으러 가는양 불편해지던 어느날, 나는 이메일로 오늘 점심 뭐 드시겠어요? 하고 묻듯 상사에게 사표를 보냈다. 아무래도 그와 관련한 대면미팅에 대비하여 일단 이메일로 언질을 주는 것이 좋을듯 해서였다.


생각했던 바대로 회사의 모든 이들이 깜짝 놀랐다. 회사에서는 나의 퇴사를 막기위해 여러 조건들을 제시하였다. 6개월을 쉬어라, 1년을 쉬든지, 아니면 파트타임으로 출근해서 설렁설렁 일해도 되고. 나는 쉬게 된다면 조건없이 내가 만족할때까지 쉬었다가 일하고 싶어 좀이 쑤실때가 돼서야 돌아오고 싶었다. 기한을 정하고 싶지 않았다. 일단 그만둔다고 생각하니 회사의 여러 꿀조건들은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그저 종일 뒹굴며 넷플릭스를 보고 실컷 여행을 다닐 계획을 세우고 뒷일은 생각하고 싶지 않았다. 굶어죽든 말든 일단은 놀고 싶었다. 그래서 퇴사를 했다.


독일말로 사밧야라는 단어가 있다. 독일어로는 Sabbatjahr라고 한다. 한국어로 번역하자면 안식년 혹은 휴직 정도 되겠다. 한국에서는 휴직의 조건이 어떻게 되는지 모르겠지만 독일에서는 대부분 월급이 지급되지 않는다. 어떻게 열심히 찾아보면 번아웃이라는 구실로 휴직이나 병가처럼 의료보험이 지급하는 급여를 받아낼 방법이 있을지 모르겠으나 나는 그 험난한 방법을 택하는 대신 퇴직을 택했다. 독일에서는 직원이 스스로 그만둘 경우에는 실업급여가 바로 지급되지 않고 3개월을 건너뛴 이후 4개월째부터 지급된다. 자식이 있는 사람의 경우 본봉의 67%, 싱글의 경우 60%를 받게된다. 그래서 일 안하고 받는 액수치고 큰 돈이다.


나는 실업자가 되었다.


이렇게 좋을 수가 없었다. 새벽 3시까지 넷플릭스를 보다가 오후 한 시나 돼서 눈을 떴다. 아침 7시에 나가는 미나와 방만구 씨는 내 실업자 처지를 그렇게 부러워 했다. 오후 한 시에 눈을 뜨면 나는 뉴스를 읽고 유튜브를 보며 하루를 보내다가 미나가 학교에서 돌아오면 간식을 만들어 주고 저녁을 만들었다. 나는 포근한 이불속에서 매일 매일 행복해하며, 언제 이 행복이 끝이날까 두려워 몸을 떨었다. 8년동안 꿈꾸던 진정한 폐인의 삶이었다. 한 달 정도 그렇게 천국같은 나날을 보내다 보니 슬슬 불안한 마음이 들었다. 누가 줬는지 모를 죄책감이 들었다.


이렇게 놀아도 되나? 뭐라도 해야하지 않나? 그럼 뭐하지?


독일 노동청에서는 실업자를 위한 프로그램을 운영하는데 취업에 필요한 코스라면 웬만한 것은 다 노동청의 지원으로 무료로 수강할 수가 있다. SAP 회계프로그램을 이 기회에 좀 습득해볼까, 아니면 그동안 놓고있던 독일어 공부를 좀 할까. 그러다가 쉬는 김에 만만한 독일어를 하기로 했다. 독일에서 살고 있지만 생활 독일어나 직장에서 사용하는 독일어는 한계가 있기 마련이라 날마다 신문을 열독하지 않고 이상 대충 살다보면 그간 갈고 닦은 독일어를 까먹기 마련이다. 이리하여 독학으로 공부를 하여 괴테 인스티튜트에서 주관하는 독일어 시험 C1를 보기로 했다. 정보를 찾아보니 시험료가 거의 300유로, 모델 테스트 교재비가 20유로, 그리하여 거의 40만원을 초과하는 지출이 나가게 생겼다. 실업자에겐 큰 돈이다.


이리하여 노동청에 이메일을 보냈다.


"안녕하십니까, 저는 미래에 더 나은 취업활동을 위하여 독일어 등급 C1 시험을 보려고 하는 1인입니다. 그리하여 알아보니 괴테에서 주관하는 시험이 규칙적으로 있사온데 시험료가 320유로나 된다고 합니다. 실업자가 된 제게는 좀 부담스러운 금액인데 혹시 노동청에서 이 금액을 지원해주실 수 있는지 문의드리고 싶습니다."


사흘 뒤에 노동청의 뮬러 씨에게 긍정적인 답변이 왔다.


"안녕하십니까 Frau Lee, 귀하의 문의와 관련하여 제가 드릴 수 있는 제안을 아래에 나열하오니 귀하의 상황에 맞는 코스를 선택하신 후 제게 그 결과를 알려주신다면 지원을 해드리겠습니다."


Berlitz Sprachschule Offenbach C1 Online-Unterricht

Berlitz Sprachschule Frankfurt C1 Online-Unterricht    

Volkshochschule Oberursel C1 Präsenzunterricht (미접종자 출입금지)


이 외에도 다른 교육기관에서 운용하는 독일어 코스가 있었지만 나는 외국어 교육에 있어서는 아무래도 외국어 교육 전문기관인 Berlitz가 제일 나을 것 같아서 그곳으로 등록하였다. 하루 3시간 인텐시브 코스 . 코스는 12월초부터 4월말까지, 시험은 5월 3일. 생각보다 시험준비하는 시간이 좀 오래걸리지만 나는 이 기회에 충분히 쉬면서 독일어 공부를 하기로 했다. 팽팽 논다는 죄책감을 덜면서도 나를 혹사시키지 않고 편하게 5개월을 보낼 수 있는 최선의 방법이다. 나중에 안 사실인데 괴테 C1는 Telc나 TestDaf에 비해 수준이 낮아서 대학 입학시 인정이 안된다고 했다. 대학엘 들어갈 것은 아니지만 아무래도 여러 기관에서 인정해주는 시험이 좋지 않을까하여 나는 5개월 인텐시브 코스를 한 후 5월 3일 실시하는 Telc C1 시험을 보기로 하였다.


12월 1일. 가벼운 마음으로 학원에서 알려준 온라인 Zoom을 클릭하였는데... 가볍게 쉬면서 독일어 공부를 하리라는 나의 계획은 수포로 돌아갔다. 그곳에는 날고 기는 독일어의 고수들이 모여있었다. 학생중에서 고국에서 선생님으로 재직했던 사람이 5명(그중 한 명은 놀랍게도 독일어 선생), 회계부장을 지녔던 사람이 1명, 독일대학을 중퇴한 이 2명, 건축가가 1명, 헤드헌터 출신이 1명. 과거는 알 수 없지만 독일어 선생에 버금가는 실력을 가지고 왜 이 독일어 코스를 듣고 있는지 의심이 가는 사람이 2명... 나의 독일어는 거기서 명함도 내밀지 못한 채 썩어가고 있었다.


독일어 코스를 듣기 시작한지 1주일, 수업종료를 10분 앞두고, 선생님의 주도하에 Kahoot이라는 독일어 문법 및 어휘력을 테스트하는 핸드폰 앱 게임을 했는데 나는 17명중에 12위로 랭크되었다. 이럴수가... 나는 다른 이들에 비해 어휘력이 딸렸고 빨리 읽는 능력이 딸렸다. 그동안 독일어 신문을 읽지 않고 한국어 신문만 읽은 탓이다. 나는 앞으로 남은 5개월을 죽기살기로 독일어에 매달리기로 하고 핸드폰에 앱을 깔았다. 도이체 벨레와 포쿠스. 날마다 독일어 신문기사를 읽으며 어휘력을 늘리고 빨리 읽는 능력을 늘려야 한다. 그렇지 않을 시에는 5월에 있을 시험에 합격하지 못한다.


선생님은 B2까지는 합격이 그럭저럭 쉽지만 C1로 올라가면 합격률이 현저하게 떨어진다고 했다. 어떨때는 반에서 3분의 1도 합격하지 못하는 일이 발생한다는... 이대로 간다면 내가 합격하지 못할 부류에 속할 확률이 높다.


친정엄마에 따르면 나의 대입을 앞두고 점쟁이가 그랬단다. "이 아이는 과거운이 좋아서 웬만한 시험이나 직장에는 척척 붙는다. 그러니 굿이나 한 판 하고 걱정은 접어두시라!" 점쟁이의 말때문인지, 엄마가 100만원을 들여 굿을 한 때문인지 그렇게 내 인생이 흘러온 것이 사실이다. 하지만 운도 운 나름이지. 실력이 현저하게 떨어지는데 운으로 붙을 순 없다.


지금부터 전쟁이다. 채찍을 맞아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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