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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오순이 Feb 15. 2022

독일어 C1 밤나무 반 모이세요

온라인으로 오전 8시 45분부터 12시까지

내가 처음으로 독일에 도착했을때, 그때는 2000년 크리스마스를 며칠 앞둔 한겨울이었다. 성질이 급한 나는 크라스마스나 새해를 즐길 겨를도 없이 문화센터(Volkshochschule)에 등록하여 독일에 온지 일주일이 조금 지나던 날부터 독일어 수업을 들으러 다녔다.


한국 괴테하우스에서 기초 독일어를 배우고 들어갔지만 그 독일어 수업에서 나는 당최 선생님이 하는 말을 알아들을 수가 없었고 간단한 독일어 문장 하나 제대로 구사하지 못했다. 독일어 교실에서의 나날이 바늘방석인 와중에 드는 의문이 하나 있었다. 아니, 저 사람들은 초급반에 들어온 사람이 어쩌면 저렇게 독일어를 잘할까... 나는 언제나 저 사람들처럼 독일어를 연마해서 저렇게 빠른 속도로 얘기할 수 있을까...


나중에 독일에서 조금 산 후에 알게된 사실인데 독일에서는 오랜 세월을 살면서도 제대로 독일어를 제대로 배운 적이 없어 브로큰 독일어를 구사하는 사람들이 많다는 것. 이들은 모르는 이들이 듣기에는 유창하게 말하는 것 같지만 알고 들으면 문법, 관사, 명사의 성 등을 무시하고 짧은 어휘력으로 유창하게 말한다는 사실이다. 내가 독일어 초급반에서 만났던 유창한 독일어의 소유자들도 10년 혹은 20년 넘게 독일에서 살면서도 초급반을 전전하는 사람들이었던 것이다.


왜 늘 어딜가나 나보다 잘하는 사람은 늘 존재하는 걸까, 왜 나는 평생 1등이 되어보지 못하는 걸까. 이 사실은 독일 어학원을 다닐때도 통용되어 내 독일어 성적은 노력을 하나 안하나 관계없이 늘 중간을 맴돌았다. 문법과 상관없이 말은 언제나 어눌했다. 어딜가나 있는 유창한 독일어 실력을 자랑하는 사람들을 보면서 나도 맹세한 적이 있었다. 언젠가 고급반을 졸업하고 초급반이나 중급반으로 다시 들어가 모두가 찬탄하는 독일어 실력을 갖춘 최고의 학생이 되리라. 글쎄, 그런 날이 과연 올까? 설사 고급반을 마친 내가 중급반으로 내려간다고 하더라도 거기서도 나보다 잘하는 누군가가 있지 않을까 싶다. 그것은 내가 내 인생에서 1등이 되지 못하는 법칙과 상관이 있을 것 같다. 오래는 됐다만 독일어 중급을(B2) 괜찮은 성적으로 졸업하고도 대한민국에서 치러지는 수능시험을 보면 번번히 만점을 받지 못하는 것과 관련이 있다. 독일에 한 번 와보지 못하고도, 독일인을 평생 만나보지 못하고도 교실에서 공부만 해서 내가 받지 못한 독일어 수능 만점을 받는 아이가 분명히 있겠지. 그런 생각을 하면 나는 자괴감이 든다.


어쨌든 나는 베를리츠 프랑크푸르트가 제공하는 독일어 C1 밤나무 반에 들어왔다. 하루 3시간 인텐시브 코스. 그 이유는 이전 글에 적었던 바와 같이 퇴사후 쉬면서 뭔가 나를 혹사시키지 않으면서도 쉬엄쉬엄 배울 수 있는 것을 찾았기 때문이다. 독일어 배우는게 제일 만만하지... 우리 반에는 선생님인 나디아를 비롯 총 20명의 학생들이 등록했다. 이들은 모두 나와같은 처지의 사람들이다. 직장을 사퇴하거나 짤리고 뭔가 하려고 어슬렁거리다가 독일어를 배우자 싶어 들어온 사람들. 어딜가나 나보다 잘하는 사람이 늘 존재하고 나보다 못하는 사람이 늘 존재하듯 여기서도 마찬가지다. 늘 중간성적만 유지하던 내 실력으로 고급반에 들어오니 여기서도 중간실력이다. 그나마 독일에서 살아온 짬밥이 오래되어 말과 작문은 잘 하지만 어휘력과 읽기는 많이 딸린다.


독일에 온지 3년 정도밖에 안됐으면서  문법을 평생 독일에서 산 사람들보다 빠삭하게 잘하는 이들도 있고, 읽기과제나 신문기사를 번개처럼 읽어내고 요약해내는 이들도 있다. 읽기 쓰기 말하기 모두 자국어로 잘하는 사람이 독일어로도 잘한다. 특히 C1 시험에서는 독일어 실력뿐만 아니라 풍부한 상식이나 순발력, 하나의 주제를 논리적으로 풀어서 결론을 이끌어내는 능력이 중요하다. 예를 들어 "현대의 영어는 라틴어를 대체할 수 있을까?"라는 주제를 가지고 글을 쓴다고 하자.(이것은 우리반에서 이미 과제로 나왔던 글쓰기의 주제이다) 이 주제에 대해 독일어로 글을 풀어나가기 위해서는 일단 라틴어와 영어의 역사에 대해 아는 것이 중요하고, 언어는 언제 최고의 힘을 가지며, 언제 소멸하는가에 대해서 아는 것도 중요하다. 아무리 독일어를 잘하더라도 상식이 없다면 시험에서 좋은 점수를 얻지 못하는 이유가 여기있다.


어딜가나 보석같은 매력을 뽐내는 사람들이 있다. 어학원에서는 어학실력이 뛰어난 사람이 매력적이다. 터키에서 온 Pinar는 그런 의미에서 우리반에서 제일 매력적이다. 완벽한 독일어 실력과 풍부한 상식, 지성과 미모를 겸비한데다 의욕이 넘치는 젊은 여자다. 그 누구도 따라올 수 없는 우리반 1등. Pinar는 터키에서 국제관계학을 전공하고 독일로 건너와 두이스부르크 대학에서 국제관계학 석사학위를 땄다.(독일어가 아닌 영어로.) 관계학을 전공한 사람답게 사람과 사람의 관계맺기에도 관심이 많아 우리 반에서 제일 처음으로 오프라인 미팅을 주선했으며 수업후 토론반을 개설하여 수요일마다 독일어와 관련된 모임을 도모한다.


하루는 내가 미팅을 주도하게 되어 미팅에 걸맞는 신문기사를 찾아보았다. 총 5개의 신문기사를 찾아 읽어보았는데 그중에서 신문 도이체 벨레(Deutsche Welle)에서 발췌한 북아일랜드에 대한 기사(Der Brexit gefährdet den Frieden in Nordirland)가 다른 기사보다 조금 길고 어려운 것 같았다. 신문기사들을 사람들에게 나눠주었는데 Pinar가 북아일랜드에 대한 기사를 읽고 싶다고 피력하여 그 기사를 Pinar에게 배정했다. 7분뒤 그녀는 기사를 정확히 읽고 이해하고 요약했으며 기사에 대한 자신의 의견을 첨가했다. 그것을 보고 나는 놀랐다.


내가 이러고 살 때가 아니다.


그동안 내 삶이 어떠했는가. 고인 물처럼 살았던 것이 사실이다. 그 무엇에도 그 누군가에도 감흥이 없고, 하고 싶은 것도, 되고 싶은 것도 없이 무미건조한 삶을 살아오다 그 끝자락에서 퇴사를 선택했다. 하고싶은 것이 없다는 사실은 괴로운 일이다. 목표없이 허둥대는 삶을 산다는 것은 비참한 일이다. 심지어 나는 그동안 서류로 가득찬 감옥같은 사무실에 갖혀 기계처럼 일을 하면서 내가 하고싶은 일이 없는지 조차 모르고 살아왔던 것이다. "사는 게 다 그렇지 뭐..." 하고 치부하며 내 인생을 스스로 낭비하며 살아왔다. 그런데 퇴직을 하고보니 내가 하고싶은 일을 찾고 싶었다. 그것이 남들 보기에 하찮은 일일 지라도.


내가 하고싶은 일은 Pinar가 가져다 주었다. 나도 그녀처럼 독일어 기사를 빨리 읽고 제대로 요약하고 싶다는 것. 도대체 몇 년 만이냐. 이런 자극을 받고 내가 뭔가를 스스로 하고싶다는 생각이 드는 것이. 그래서 독일어 신문 앱을 핸드폰에다 깔았다. 아침에 눈뜨면 네이버 뉴스를 보는 대신 Focus와 Deutsche Welle를 뉴스를 읽는다. 물론 내 정치적 성향과는 맞지 않는 신문들이지만 내 독일어 수준에는 맞는 신문들이다. Spiegel이나 Süddeutsche Zeitung보다는 기사들이 한결 쉽다. 수업이 끝나면 숙제를 포함해 복습하는 시간이 하루에 3시간 정도 된다. 에세이 숙제라도 있는 날이면 오후내내 독일어에 시간을 할애한다. 혹자는 이렇게 말할지 모르겠다. 번아웃으로 퇴직했으면 조용히 집에서 쉴 것이지 왜 일을 만들어서 또 스트레스를 받냐고.


스트레스가 없다. 일단 동기가 생기면 힘든줄 모르겠다. 공부를 할수록 내가 여태 이런 단어들도 모르고 살았나 싶어 한심해서 더 공부하고 싶고, 나보다 잘하는 사람을 보면 자극이 생기고 활력이 생긴다. 쉬는 것 보다 나은게 하고싶은 일을 하며 활력있게 사는 일이다. 독일어 코스에 등록할 때만 해도 놀멘놀멘 시간때우기로 하자고 시작했는데 하고보니 이게 웬 떡이냐 싶다. 진정 쉬는 것은 종일 누워서 빈둥거리는 것이 아니라 하고싶은 것을 하며 거기에 온 마음을 집중하는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나는 지금 잘 쉬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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