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마, 집밥이 뭐야?응... 라면
엄마 손은 있되 엄마 손맛은 없...
나는 지금도 내가 어렸을 적에 먹고 자란 음식의 맛과 모습을 생생하게 기억한다. 시래기국, 소고기 뭇국, 김치국밥, 꿩 된장찌게. 메주 만들던 날, 김장하던 날, 곶감과 시래기 걸어둔 처마밑, 고추와 무말랭이 말리던 청마루. 엄마의 손맛도 기억난다. 김장김치를 포기째 접시에 담아와 엄마 손으로 찢어주던 그 시원한 맛.
하루종일 밥을 부실하게 먹었더니 잠자리에 들 무렵 배가 출출했다. 주방을 둘러보니 밥솥에 식은 밥 한 덩이와 각종 야채, 그리고 오늘 아침에 딸자식 참치 샌드위치 만들고 남은 참치가 캔속에 적절하게 남아 있었다. 나는 이것들을 냄비속에 넣고 된장을 한 숟가락 넣고 물을 부어 죽을 끓였다. 슴슴하니 맛있었다.
죽을 먹으며 요즘 들어 나는 왜 된장 푼 죽을 즐겨 먹을까 생각해보았다. 그러다가 혹시 나는 이것을 이유식으로 먹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 떠올랐다. 그렇다. 이 맛은 내가 아주 어렸을때부터 먹어온 이유식의 맛일 것이다.
시부모에 자식 넷. 근처에 사는 시누이 열 명, 오일장마다 찾아오는 친척들. 거기다 농삿일까지. 이 모두를 건사하고 책임지느라 나의 친정 엄마는 자식들에게 이유식이란 것을 만들어 먹이지 못했을 것이다. 군불때서 밥짓는 집에서 이유식 요리가 뭔가. 그래서 젖뗄무렵 우리들은 어른 밥을 먹었을 것이다. 첫 이유식으로 엄마 입에서 꼭꼭 씹혀진 잘고 달콤한 밥알들이 내 입으로 들어갔을 것이다. 돌이 지나서 나는 어른들이 먹는 국에 밥을 말아서 먹었을 것이다. 고로 나는 아기였을때부터 어른들이 먹는 음식을 어른들과 함께 밥상에 앉아 먹었을 것이다. 친정 엄마와 나는 그래서 그런지 식성도 비슷하다.
그런데 나는 내 자식을 그렇게 키우지 않았다. 가끔 이유식을 만들어 주거나 슈퍼마켓에서 병으로 나오는 이유식을 사먹였다. 조금 더 커서는 아이가 편식을 하는 바람에 미나 음식은 늘 따로 요리했다. 육식 좋아하는 방만구와 미나, 채식위주 나의 밥상. 매끼 번거로우나 늘 두세 번의 밥상을 차려야 했다. 그러다 보니 밥상을 최대한 대충 차리거나 인스턴트로 때웠다. 아쉽지만 내 자식은 내가 먹는 음식을 먹고 자라지 못했다.
사실 우리집 밥상이 이 모양이 된데는 내 탓이 크다. 나는 애를 낳고 난 이후부터 웬일인지 육식과 밀가루 음식은 전혀 입에 대기도 싫고 찬이 부실해도 밥을 먹어야 한 끼를 먹은 기분이 들었다. 그래서 서양음식 즉, 피자, 햄버거, 스테이크, 파스타 등을 데워서 남편과 자식에게 먹으라고 주고 내 밥상은 늘 따로 차렸다. 해서 우리집에는 엄마 밥상과 우리 밥상, 이렇게 두가지 밥상이 존재한다. 이제 미나는 엄마 밥상을 구경만 할 뿐 먹어보려 하지 않는다.
미나에게 물어보진 않았지만 혹시나 물어본다고 해도 이 아이는 음식에 관한한 나만큼 풍부한 추억은 없을 것 같다. 엄마 하면 떠오르는 맛이 뭐니? 하고 혹시라도 묻는다면 미나는 어쩌면 라면이라고 대답할 지도 모른다. 우리가 한 냄비에 끓여서 똑같이 나눠먹는 유일한 음식은 라면이기 때문이다. 라면을 비하하는 건 아니고.
추측해 보건데 미나에게 있어 어린 시절 길들여진 고향의 맛이라 함은 아무래도 소덱소(Sodexo)의 맛이 아닐까 한다. 소덱소는 학교와 기업체의 급식을 담당하는 독일의 기업체로 미나가 초등학교때도, 중학교때도 먹었거나 먹고있는 급식업체 이름이다. 소덱소가 만들어내는 보편적인 맛이 미나에겐 엄마 손맛이다.
약간의 죄책감이 든다. 엄마의 맛이 급식업체에 밀리다니...
그리하여 나의 죄책감을 상쇄해보려는 심산으로 지난 금요일엔 삼겹살을 구웠다. 삼겹살 정도는 자신있다. 그걸 요리라고 부를 수 있을지는 의문이지만. 나는 고기를 거의 안먹지만 간간이 삼겹살이 먹고 싶어지는 때는 있다. 장날에 할머니를 뵈러오던 친척들 대부분이 옥천식육식당에서 돼지고기 한 근씩 끊어오는 바람에 내가 돼지고기 맛은 좀 아는 편이다.
발코니에 앉아 삼겹살을 구울 준비를 했다. 여름이 되어가니 저녁이라고 해도 대낮처럼 밝았고 날씨마저 좋았다. 삼겹살 한 근에 상추와 파프리카, 오이, 당근 그리고 참기름을 듬뿍넣은 쌈장까지 식탁위에 올렸다. 전기레인지를 발코니 식탁위에 올려놓고 지글지글 고기를 구우니 신선놀음이 따로 없었다. 햇볕이 어찌나 좋던지 야구모자에 선글래스까지 쓰고 삼겹살을 쌈에 싸서 먹었다. 삼겹살 연기는 하늘로 무럭무럭 올라가고, 굽는 냄새는 이웃으로 도도히 퍼졌다.
이웃 여러분, 우리 오늘 맛있는 거 해먹어요.
행복한 집안에선 늘 맛있는 냄새가 난다죠? 호호호!
허겁지겁 말도 없이 먹다가 배가 조금 불러올 무렵에야 정신이 들었다. 아, 오손도손 가족끼리 앉아서 같은 음식을 먹고 있었지... 이 참에 사춘기에 접어든 딸과 다정한 대화라도 좀 나눠야 하지 않겠나.
"아참, 너희 담임은 병가가 길어지는 것 같은데 언제 돌아온다는 얘기 같은 건 없니?"
"없어."
"그럼 미술 선생은 언제 구한다니? 매번 그렇게 자습으로 땜빵해서야..."
"몰라."
미나는 이렇게 짧게 대답하고는 지가 먹은 빈 밥그릇과 숟가락을 챙겨 들고 횅하니 들어가 버렸다.
쯧.
애가 사라지고나자 씁쓸한 생각 하나가 떠올랐다.
모처럼 거하게 밥상을 차려놨더니... 쌀쌀맞은 기집애. 엄마 손맛에 대한 죄책감은 다 내 착각일지 몰라. 중학생의 세계에서 밥보다 중요한 것이 얼마나 많은데... 밥은 도리토스, 콜라보다도 아래야. 랭킹으로 따지자면 100위중 87위 정도. 그러니 괜한 생각으로 나를 자책하지말자. 게다가 소덱소야 말로 내가 차린 밥상보다 훨씬 낫지. 전문가들이니 얼마나 맛이며 영양이며 알아서들 밥상을 차리겠는가.
집밥이니 엄마 손맛이니 하는 말들 다 매스컴에서 만들어낸 말이다. 부질없다.
요즘은 자식이 잘 먹는다는 이유로 내가 소덱소나 멘자의 맛을 흉내내어 요리하고있다. 크림소스 얹은 푸실리(크노르 가루를 사다가 요리함), 굴라쉬 수프(크노르 가루를 사다가 요리함), 햄버거(블록 하우스에서 나온 패티를 사다가 요리함) 등등. 입이 짧은 애가 이런 음식이라도 먹어줘서 다행이다.
PS. 사진설명: 독일에선 햅쌀을 구하는데 애로사항이 있다. 그래서 나는 최대한 윤기흐르는 밥을 짓기 위하여 압력밥솥을 구입하였다. 그런데 미나와 방만구는 압력밥솥으로 지은 밥을 안좋아한다. 한국쌀도 안좋아한다. 둘은 푸슬푸슬한 안남미를 불리지 않고 일반 냄비에 밥을 해줘야 먹는다. 애가 아빠 입맛을 전적으로 닮았다. 밥까지도 따로 지어야 하는 내 팔자!!